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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일체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인간은 어떤 종족인가? 쉬운 질문일 수 있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채 반추하면 쉽지 않은 질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다. 심리학, 미학,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수많은 종교들도 인간을 천착한다. 불교는 인간이 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신이 되는 종교이며,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나선 종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간이란 종족은 만물의 영장인 동시에 이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 중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인류의 교육과 종교 등에서 드러난 보편적 이상을 정리하면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사랑>에 민감하며, 갈구하며, 구속된 종족은 없다. 모든 교육과 이상과 종교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귀결된다. <사랑>은 동기에 질문하지 않으며,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절대선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미움이나 분노? 아니면 질투? 사실 미움이나 분노, 질투 등의 개념은 사랑의 정의를 외연적인 의미로만 해석했을 때 가능한 반의어들이다. 사랑의 웅숭깊은 내면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반의어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두려워하며, 두려움이 극대화되었을 때에 사랑이 결락된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은 두려울 수 없고, 두려움이 충만한 인간은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우주의 시공간에서 사랑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친구격인 <외로움>은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 원인이다. 고독한 인간은 사회성 결핍에 빠지며 극도의 감정 불조절 인간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극도의 고독은 종국에는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적잖이 충격적이고 폐륜적인 사건들이 여기서 연유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독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 66억의 인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이기도 하며 <불관용>이라는 또다른 성질의 절대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절대선인 사랑을 지향하며 갈구하는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라 정의될 수 있을까? 답변을 함에 있어 꽤나 머뭇거림을 제공하는 질문이다. 나 또한 인간종족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종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부의 개념이 정립되어가면서 경쟁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은 인간성을 상실케 했고 극도의 이기심과 거짓을 양산하였다. 전쟁과 테러, 성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양심의 실종 등 인류는 온갖 부패함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또는 비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지금도 냉혹하게 진행되고 있다.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는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고독, 미움과 두려움, 잔인함과 폭력성을 깊이 있고 수준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그의 처녀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전개로 원초적 인간의 내면상을 통찰하고 있다. 세상에 절망하고 소통을 거부한 채 남극의 외딴 섬에 도착한 한 남성화자를 통해 절대 고독과 소통 불가함이 설정된다. 원초적인 공포에 앞선 두려움과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잔인함과 폭력성 등 인간의 악한 내포적 성향들이 다채롭게 출현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는 징그럽다 못해 섬뜩하다 . 소설을 읽은 후 차가운 피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한 남자의 1년여의 섬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 인간의 고독이 외로움을 만들고, 그 외로움의 잘못된 전이가 기괴한 사랑의 감정을 만들며, 이에 소통의 불가능이 합쳐지면서 미움과 비인간성의 극대화로 실현되는 것을 특이한 소재와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연출로 그려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제목 <차가운 피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전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피부다. 인간은 위대한 온혈동물의 포유류로서 가장 발달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직립종족이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가장 차가운 마음을 지닌, 냉혈한 종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차가운 피부>를 통해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냉혈한 <차가운 인간>종족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인류에게 얼마나 <사랑>이 결락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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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