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 - 네이버 인기 블로그 '풀각시 뜨락' 박효신의 녹색 일기장
박효신 지음 / 여성신문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몇 주 전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승용차로 교회까지 마중나간 적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어머니는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야밤에 무슨 포도거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포도에 대해 심히 경도된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엄마는 왜그리 포도를 좋아해?, 라고 질문했다. 어머니의 답변은 내가 얼마나 도시생활 속에서 과거의 추억을 잊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니 어미가 포도 과수원집 딸이라는 것을 몰랐더냐?" 

  그랬다. 어머니는 대전시(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가 아니었음) 유성구 반석동의 과수원집 딸이었다. 외갓집은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호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과수원을 구경하고 포도도 먹고 시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올챙이도 잡으면서 삼촌들과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낙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가 되기 전, 외가집 근처에 군사기밀건물이 들어서면서 과수원은 사라지고 마을 전체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수원과 시냇가의 추억은 내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고 성인이 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인데 말이다.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읽었다. 한 여성의 농사꾼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억 대 연봉을 받는 능력있는 중년여성이 대도시 서울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에 심히 놀랐다. 충청도 예산에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짓고 인간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지긋한 연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는 미래의 꿈과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환경, 그리고 자신의 열정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도시 서울을 한 번 쯤 떠나고픈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곳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부작용도 적잖은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의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의 모든 감각은 서울이라는 경직되고 인공적인 대도시의 환경에 맞춰져 있다. 시간 또한 철저하게 비지니스 아워에 맞춰져 있어 경제적 극대화만이 추구된다. <삶>이 아닌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에 자연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경제적 시계만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러한 곳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누구나 한 번 쯤 사유했을 만한 주제리라. 

  사계절 모두 각기의 맛이 있지만 저자는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많은 풍성함을 얻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이라는 책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사꾼으로서 매년 풍성한 소출을 안겨주는 가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봄, 여름에 농사지은 것들을 대부분 가을에 거둬들이니 땀흘린 대가를 확인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나 또한 개인적으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은 미지근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어서 싫다. 하지만 가을은 시원하고 아름다워서 좋다. 단풍의 계절이자,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남자의 계절이자, 고독의 계절이자, 무엇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1년의 정확한 사등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을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조상들께 어찌 감사할 수 없으리요! 

  저자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올 때 다짐한 세 가지 항목이 흥미롭다. 
  더 이상 인연은 만들지 말자.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
  더 이상 가지려 하지 말자.
사랑, 미움, 욕심.. 인간을 인간되게, 혹은 비인간되게 하는 인간사의 가장 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랜 기간의 대도시 생활을 통해 위의 세 가지가 얼마나 자신을 번뇌케했는지 고백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인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처가 발생하며, 사람을 미워하면서 마음의 그릇이 작아지기 일쑤며, 채우고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심들로 인해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다짐을 하게 된 원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사랑과 미움과 욕심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공간의 문제가 아닌, 철저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느 곳>의 문제가 아닌, <어떤 생각>의 문제. 인간을 번뇌케 하는 것들의 상당한 분량은 바로 자기 자신에서 연유한다는 깊은 통찰을 저자는 자연 속에서 깨닫고 있다.

  우리가 대도시의 생활에 지루하고 지쳐있음을 느끼는 이유를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이 아닐까? <결핍>의 문제가 아닌, <지나침>의 문제가 아닐까? 필요치 않은 것의 범람과 소소한 것에까지 경제적 대가가 필수불가결한 대도시와는 달리, 꼭 필요한 것과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것에만 노출되는 <시골>의 매력이 저자의 시공간을 그리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대도시 서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제도시로서 분명 살기 좋은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필요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또한 <경제적 극대화>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도 삶을 번뇌케 한다. 왠지 모를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그립다. 순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바람과 흙이 가르쳐주는 웅숭깊은 맛과 향기. 그것이 그립다! 
 

[인상깊은 구절]
우주의 시간표는 약속된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에 싹이 나오고,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열매를 맺는다.
요즘 나는 자연의 시간에 내맡기는 법을 배운다. 뿌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무 말이 없는 땅, 그러나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땅...
<책 내용중, p25>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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