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End of Pacific Series 2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여행에 대해 이만큼 명확하고 본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의 외연적 의미에서부터 내포적 본질에까지 아우르는 깊은 통찰적 정의라 할 수 있는 명문장이다. 어린 아들과 함께 세계의 오지를 탐구하는 여행가이자 블로거 오소희씨는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깊이있고 냉철하게 보기를 좋아하는, 바로 그런 여자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로 처음 만난 그녀의 여행수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세 살 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 달동안 터키의 오지 곳곳을 수색(?)하고 다닌 점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여느 여행서적과 달리 여행에 대한 물리적이며 기술적인 설명 외의 웅숭깊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여행수기는 그저 다른 나라의 지리와 문화를 둘러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우주 탐구를 보여준다. 그녀의 독특한 여행세계에 책을 통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새로운 흔적을 확인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수 밖에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의 입장에서 이번에 출시된 그녀의 두 번째 신간은 내 머리속의 도파민과 베타-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읽기가 예약되어 있는 적잖은 도서들에 새치기하여 우선 구독하는 것을 손쉽게 결정하게 했다.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는 전작에 비해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이 상대적으로 많이 실렸고, 설명보다는 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총 분량이 대략 300페이지 정도의 평범한 두께지만, 사진은 많고 글자는 적어서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완독을 한 후에 느낀 것이지만, 라오스가 갖는 소박함과 안정감, 고즈넉함과 모자람 등을 표현함에 있어 장황한 설명보다는 어쩌면 짧고 간결한 글귀들의 시적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의도와 내 느낌이 부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어 읽었다는 점에서는 전작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라오스가 어떤 나라인가? 연간 3억불의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초등학교 수료율은 41%, 15세 이상의 문맹률은 43% 수준인 극도의 후진국이다. 유럽이나 미주여행이 해외여행의 교과서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해외여행기호에서 라오스라는 국가는 쌩뚱맞은 선택일 수 있다.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가?, 라는 냉소적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저자가 언급한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철저하게 배치된다. 여행이라는 스승을 통해, 삶에 대해 더 낮아질 것을 배우게 되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 오소희씨의 여행철학이다. 낮추면 보인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더 이상 내가 나를 낮추고 있지 않을 때였고, 스스로 그 직립이 피로할 때였고, 피로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라오스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시간의 속도가 더디게 흘러가는 곳이다. 바쁘지 않고, 바쁠 이유가 없고, 바쁨이 무언지도 모르는 곳처럼 보인다. 풍선이라는 작은 놀이기구 하나에도 새로움을 느끼며 흥분하는 아이들, 주고자 하는 돈과 받으려 하는 돈의 높낮이가 상하로 출렁거리는 최소한의 경제적 행위에도 익숙지 않은 시장상인들, 두 시간에 한 번씩 고장나는 버스를 타며 몇 시간을 이동해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을 때 자발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들, 개와 고양이까지도 조용하고 착한 그곳.. 라오스는 바로 그런 곳이다.  

  라오스의 남쪽과 북쪽의 지방색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흥미롭다. 남쪽에 비해 북쪽에 대도시가 많고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다. 한결같이 순수하고 고요함에 가득차 있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사반나켓은 여행자가 봉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수도 비엔티엔은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지 않은 곳(?)이다. 제법 북쪽에 위치한 방비엥이라는 작은 마을은 사랑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로 여행객들이 양분되는 두개의 얼굴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 할거리들이 적잖은 방비엥이 해외의 수많은 배낭여행가들의 침범으로 인해 그 영혼을 잃어가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쏭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석회 카르스트 가운데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둘로 나뉜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p170> 

  역시나 저자의 자녀교육은 철저하다. 축구공을 강력한 소통의 무기로 들고간 중빈이는 남부 시골에서 그곳 아이들과 쉽게 축구를 하며 교제를 이룬다. 하지만 라오스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사반나켓에서는 중빈이의 축구공에 신기해하는 아이도, 관심을 가져주는 아이도 없다. 내가 놀 수 있는 아이는 없어, 라며 결론 짓는 중빈에게 저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뒤 자전거에 몸을 실은 채 자리를 비켜준다. 용기내어 말을 걸어보고, 축구공을 굴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다. 중빈의 얼굴에 울기 직전의 모습이 역력하지만 저자는 자녀의 사회성 학습에 절대 개입하지 않은 채 관찰자로만 일관한다. 중빈의 접촉 시도와 상대방의 무시가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던 끝에 아이들중 나이 많은 여자아이의 종용으로 축구공은 중빈과 아이들 사이를 오가게 되고 사회성 학습은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려 1시간 30분의 지리한 긴장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성취한 중빈에게 돌아온 면류관은 엄마의 안아줌과 "JB!", "JB!"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환호성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생김새를 지닌 공동체 속으로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침투한 중빈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그것을 이룬 성취감은 훗날 그의 당찬 미래의 보증수표가 될 것임을 믿는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여행수기에 매료를 느끼는 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독서 기호와 그녀의 여행 목적이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읽는 내게, 독서는 인간 탐구의 또다른 성격의 학습으로 정의된다. 책 안에서 다양한 인간상들을 만나면서 인생과 사랑 등의 다양한 삶의 본질적 가치들을 목도할 때면 내 전두엽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내 마음속의 감성량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그녀의 여행에세이도 철저하게 인간과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경관의 웅장함이나 문화재의 화려함보다는 나와 다른 너에 대한 깊은 천착을 거듭한다. 특별하지 않아 놓치기 쉬운 소소한 것에서 대단한 것을 이끌어 내며, 보편적 정서와 상식을 뒤엎어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약간 다르게 봄으로써 우주의 이치를 멋지게 해석하기도 한다. 깊은 사색에서 오는 주옥같은 언어로 정제된 독백적 문장들. 내가 그녀의 글귀를 좋아하는 이유다.  

  한 명의 애독자로서 앞으로 저자의 후속 신간들이 봇물 터지길 기대한다. 저자의 신간이 늘어나고 책의 판매량이 증가할 때마다 중빈이의 지성과 감성의 수치도 지수적으로 증가하길 축복하는 바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명함이란, 가진 것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찾아온다.
그러나 시선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널린, 내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들을
오랫동안 두루두루 바라본 뒤에야 얻어진다.
젊음과 현명함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242>
 
남자들은 사랑을 <한다>.
면도를 <하고> 사업을 <하고> 산책을 <하>듯.
그러나 여자들은 사랑에 생을 건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전부가 <된다>.
호흡을 하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이 사랑과 결부된다.
사랑이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는 같은 여자여도 다른 여자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도록.
오직 사랑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도록.
그렇게 진화되어 오직 않았다면
유난히 긴 양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더러운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이다.
<p243>

모든 소망에는 그것을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장애가 있다.
생의 절반을 지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니.
소망을 이룰 때까지
모든 장애는 단지 변명의 크고 작은 다른 이름이었다.
<p274>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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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누르고 가요, 다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