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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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톨스토이를 읽을 때 러시아인이 되고 디킨스를 읽을 때 영국인이 되며 헤밍웨이를 읽을 때 약간 미친 남성 미국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고 싶다” - 작가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 모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소위 뻑 갔다. 작가의 말이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받는 감동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러시아 귀족이 되었고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골 소년이 되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나를 일본 전국시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참혹한 내전에 번민하는 스페인 민중이 되게 했다. 바로 이것이 소설의 힘이자 문학의 기능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파친코』가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소설 『파친코』는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89년 일본 버블경제 붕괴까지 약 80년의 현대사를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삶을 통해 관통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선자 가족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국전쟁, 80년 버블경제 붕괴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족적이기도 하다. 참혹한 시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선배 세대의 대를 잇는 고군분투가 감동적으로 읽힌다. 전쟁과 가난,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운 선자 가족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부산 영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 여성(선자)이 두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해서 어떤 계기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혐오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스토리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1권에 선자의 삶과 사랑에 집중한 반면 2권은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여러 각도에 훑는 방식을 취한다. 1권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느린 시간 흐름을 택했다면 2권은 대략적이고 중반부터 빠른 시간 흐름이 특색이다.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건 이 소설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의 초고 『모국(motherland)』은 자이니치(재일교포) 3세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결국 한 챕터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 했다. 작가의 고백대로라면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견 공감한다. 하지만 솔로몬의 시대가 할머니 선자의 시대보다 크기와 무게가 부족했다고 보지 않는다. 한 시대가 갖는 의미와 가치란 각기 동등하고 평등하다. 그런 차원에서 뒷부분에도 더 많은 할애를 하여 소설을 3권 이상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분량과 감동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역사를 다룬 소설에는 경우에 따라 거대 서사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나 『레미제라블』처럼 말이다.

『파친코』는 묵직한 여러 테마가 겹쳐져 읽히는 소설이다. 여성의 위대함, 역사의 도도함, 민족의 긍지와 투혼, 가족의 찬란함 등 굵직한 여러 읽기 코드가 작동한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러한 거대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의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시대에 짓눌린 인물이 나오기 마련인데 선자를 위시한 『파친코』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캐릭터성이 완전히 살아있다. 명징하고 생생하다. 선자의 인생을 뒤흔든 악역 같은 캐릭터 고한수도 자기 내면에 치열하고 남루한 번민을 가진 복잡한 인물로서 작품 속에서 그만의 개성이 완전히 살아 있다. 인물이 시대의 산물로서가 아닌 각 개인으로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 그게 바로 소설 『파친코』의 힘이다.

제목 '파친코'는 탁월한 작명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파친코'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지 알게 되면 무언가 묵직한 불편함이 엄습해온다. 파친코는 당시 일본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던 재일조선인의 삶의 터전이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탓으로 정작 일본인은 기피했던 것을 일제 패망 뒤 먹고사는 걸 해결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재일한인들의 삶이자 반전이자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냉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통해 응수했고 극복했다. 요컨대 제목 '파친코'는 이국땅에서 김치 냄새난다는 놀림을 당하면서 식당 일로 생계를 꾸리며 자식을 키워낸 선자와 파친코 사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쟁취해낸 모자수·솔로몬 부자의 치열한 역동성을 오롯이 담아내는 명제목이다.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좋은 느낌을 굳이 망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 소설과 대결하면 백전백패한다. 나는 지금까지 원작을 능가한 영상 장르의 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데 비해 인간의 감각 유한하기 그지없다. 이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거대한 공간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고 밀려든 묵직한 감동이 내 전신을 적신다. 잘 팔리는 소설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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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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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각자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매한가지일까.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인데 무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인간은 대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주변 지인들의 모습과 책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상의 양태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즐거워 한 이는 없다. 인간에게 죽음은 쿨하지 않다. 죽음은 공포다. 두려움 자체이며 본질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이 매한가지라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내 생각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어느 경제학자는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라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자기 위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종족이다. 반면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본성을 평등과 이타심으로 규정했다. 아무래도 앞선 경제학자의 말보다는 멋져 보인다. 이타적 인간이란 얼마나 세련되었나. 인간 종족의 품격이 느껴진다. 20세기 지구는 이를 실험하는 실험장이었다. 많은 직업정치인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고 집단을 창설했다. 천국과 신세계를 주장했다. 혁명에 가담했고 사람을 선동했다. 결국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점점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이 기계로 대체되는 중이다. 인간의 기계 필요 욕구는 점차 의존성으로 바뀌고 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편리함을 누리지만 정신적으로는 소외되는 중이다. 가끔 섬뜩함을 느낄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란 작은 기계를 만지작거릴 때면 스마트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내가 스마트폰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이러다 의식마저 가늘어진 조악하고 비루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영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왔다. 신간 『작별인사』는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철이는 유명한 IT 기업의 로봇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외출한 어느 날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로 지명되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수용소에서 여럿 로봇과 뒤엉켜 지내면서 자신이 인간인지 로봇인지를 고민하고 의심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사색에까지 도달한다.

수용소에서 만난 '민이'와 '선이'는 철이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어준다. 민이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로봇이고 선이는 진지한 복제인간이다. 두 친구의 도움으로 철이는 낯설고 위험한 수용소 생활을 적응하고 견디어간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는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동요가 생기고 그 틈을 타 셋은 수용소를 탈출한다. 자신을 인간으로 굳게 믿고 있는 철이는 아빠를 찾아 그걸 증명(확인)하기를 원한다. 아빠와 만나 집에 돌아온 철이는 자신이 몰랐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독자는 철이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답다'는 것 사이의 웅숭깊은 여백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철이의 시선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쉽고 흥미로운 SF 동화와 같은 느낌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의 질문은 묵직하다. 로봇공학, 종교, 의식, 감정, 죽음 등과 같은 여러 철학적 주제를 조명하고 부각시킨다. 결국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명제로 나아간다.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진짜 인간, 복제인간, 휴머노이드, AI 로봇 등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족들(?)은 끊임없이 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지구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인간이라는 통찰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안에서 충돌하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사유가 이 소설의 포인트다.

인간성의 탐구야말로 인류의 오랜 학문 대상이다. 문학의 목적도 인간에 대한 성찰이 아니던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인간성을 천착하고 탐구하는 데 있다. 이 대목에는 나만의 사색이 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다양한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점점 더 명징하게 깨닫는 게 있다. 인간은 부족하고 미천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이다. 인간만큼 증오스럽되 사랑스러운 종족은 없다. 인간의 과학은 위대하되 절름발이이고 이성은 탁월하되 모순적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본인의 유한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오직 겸손함으로써 타자와 우주를 공부(관계)하는 데 있지 않을까.

소설은 끝내 '작별'로 종결된다. 이야기의 말미는 인류의 절멸이다. 종국 기계 의식 시스템의 생존만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탁월한 작명이다. 작가가 2년 전 초고를 쓸 때의 가제가 '기계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개작을 거치며 소설 제목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무섭고 소름 돋는 작별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전개처럼 인류가 작별될 것으로 예상치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유일한 '단 하나의 나'로서 과학과 철학으로 복제되지 않는 신성한 개별성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주 먼 과거와 먼 미래는 과학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어쩌면 소설과 영화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복제인간이란 소재는 현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닐까.

진부한 소재를 명료한 이야기 속에서 촉촉한 철학 담론으로 뽑아낸 역량은 순전히 작가 김영하의 내공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장은 활력을 띠고 빠른 호흡 가운데서도 소설은 서사적 흡입력을 잃지 않았다. 김영하라는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하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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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다 가을하다
최상규.최종현.최훈 지음 / 나다운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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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썼다는 점에서 솔깃했다. 심리학·사회학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만큼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는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에서 말을 따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명명했다. 폴 비츠는 명저 『무신론의 심리학』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신(神)에 대한 스탠스를 결정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만만치가 않다. 그렇기에 부자간 함께 글을 써 책으로 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고민하다 가을하다』는 저자가 두 아들과 함께 쓴 에세이다. 첫째 아들이 쓰기에 동참했고 둘째 아들은 그림으로 동역했다. 저자의 아내는 글을 선정하고 심사하는 것을 도왔다. 즉 네 가족이 모두 공저자인 셈이다. 책 출간의 동기가 인상적인데 사연은 이렇다. 저자ㅡ이글에선 편의상 공저자 중 아버지 최상규 씨를 '저자'로 칭하겠음ㅡ의 첫째 아들이 대학 논문 심사가 통과되지 않아 크게 낙심 중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저자는 "생각도 정리할 겸 함께 글이나 써 볼까" 건넨다. 아들이 선뜻 응했고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100일이 지난 뒤 이들은 서로 성장해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쓰였다.

책 분류상 이 책은 명징한 에세이다. 책 곳곳에 저자의 생각과 고민이 잘 담겨 있다. 글쓰기에 대한 철학을 말하기도 하고 바퀴벌레를 묵상(?)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친구와 있었던 일을 소환되기도 하고 아버지(구순九旬이 넘은 저자의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름의 여행 철학을 주장하기도 하고 몇몇 시와 노래를 소개하며 자신을 주관을 얹기도 한다. 죽음, 증오, 사랑, 용서, 배려 등의 인간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진지하게 탐색하기도 한다. 구석구석 인용된 고전(古典)의 명문장과 철학자의 말은 평소 저자가 얼마나 폭넓은 독서를 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란 소제목의 글이다. 대중가요 두 곡의 가사를 인용하며 '다행'과 '행복' 사이의 방정식을 추출하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이적의 <다행이다>와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 사이에서 상치된 개념으로서의 '다행'의 의미를 탐구한다. 저자의 해석으로는 이적의 곡이 죽도록 행복하다는 의미에서의 다행을 노래했다면 장기하의 곡은 '남의 고행'과 연결된 다행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나의 다행'이 '그의 다행'이 되는 행복한 세상을 소망한다. 최종적으로 구십이 넘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런 세상은 오직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짚어낸다. 즉 저자는 사랑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유행가 가사와 아버지의 일례를 통해 궁구한 것이다. 저자의 통찰력에 고개가 주억거린다.

책 곳곳에 자주 인용된 성경 구절은 저자의 신분을 암시한다. 책에서 직접 드러냈듯이 저자의 직업은 개신교 목사다. 수년 전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저자를 잘 알고 있다. 오래전 저자가 우리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유독 책을 좋아했던 저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어느 교역자보다 차분하고 성실했던 저자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조금 놀랐다. 기독교가 '개독'으로 불리는 작금의 시대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건 그 자체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저자의 용단과 뚝심이 텍스트 곳곳에도 잘 묻어 있어 포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개척예배 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 서평은 그 부채감에 대한 뒤늦은 피드백이다. 저자의 목회와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책을 덮은 후 도전이 하나 생겼다. 언젠가 나도 딸과 함께 책 한 권 내보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다른 건 몰라도 책읽기와 글쓰기만은 자녀에게 흘러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왔다. 고백하건대 천성이 빠르고 직관적인 나에게 글쓰기는 느린 속도와 신중함을 함양해 주었다. 때에 따라서는 말보다 글이 더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책 서두에 언급됐듯이 글쓰기야말로 평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낯설게 보고 소중하게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올곧은 지름길이다. 그런 차원에서 두 아들과 함께 글을 쓰고 함께 생각을 정리한 저자의 시도는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큰 영감을 준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정확히 말해 글을 써본 사람만이 아는 게 있다. 글쓰기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인간 사유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노곤한 작업이다. 무의미한 생각의 관성과 의식의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다. 단언하건대 글쓰기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역행한다. 흐트러진 걸 모으는 것이고 지저분한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모든 필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자기 생각을 적확하게 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분투한다.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끊임없이 잘라낸다.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아 애써 써 내려간 텍스트를 휴지통에 집어넣기도 한다. 깎아내고 또 깎아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인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신성하다.

서평을 정리하자. 저자 최상규의 『고민하다 가을하다』는 세 부자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한 내용을 담은 고민 회복 에세이다. 모 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 중인 저자의 현재적 고민과 생각이 잘 담겼다. 언제나 지인이 출간한 책을 읽을 때면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있다. 이 묘한 긴장감과 전술한 바 있는 저자가 준 강력한 도전이 잘 포개어진 따뜻한 독서였다. 특히 아들이 있는 분에게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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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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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정통 기독교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십수 년 전 블로그를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하나 있었다. 종교와 정치 색채를 최대한 배제할 것을 다짐했다. 건전한 토론을 넘어선 지나친 비방과 무의미한 논쟁을 조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철저히 내 소양 부족이었다. 오히려 몇몇 글에서 종교적 색채를 지나치게 드러냄으로써 비기독교인 이웃들에게 거부감을 준 적도 적지 않았다. 서두에 반성스럽게 고백하곤 있으나 여하튼 나는 분명한 기독교인이다. 글이란 필자의 생각과 이념, 철학과 신념을 뼈대로 하기 때문에 글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성을 완벽히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자 한다.

기도의 용사를 어머니로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찬양 부르고 성경 읽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즐겨 부른 찬송가 중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곡이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곡의 2절에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라는 가사가 있다. 성경을 잘 모르던 어렸을 적에는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길래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나'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지만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위대한 선지자란다"라는 난해한 답변뿐이었다. 훗날 성경을 읽고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한 이후에서야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았다. 그때까지 엘리야는 항시 나에게 찬송가 가사로 귀에 맴돌던 인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외 작가 중 하나인 파울로 코엘료의 신간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다섯번째 산』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다룬 코엘료의 장편소설이다. 이미 오래전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영어판 중역의 어색함과 번역 오류 탓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이에 문학동네 출판사를 통해 포르투갈 원전으로 재번역된 것이다. 최근 구약사를 머릿속에 재정리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열심히 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지자로 꼽히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난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자 짜릿한 흥분이었다. 이에 단번에 책을 주문했고 한달음에 완독했다.

전술한 대로 소설의 주인공은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다. 성경의 이야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 구약 《열왕기상》 17~18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했다. '모세오경'과 신약 《마태복음》의 몇몇 구절이 곳곳에 인용됐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가적 상상력이 주를 이루고 있어 조심스럽게 읽히기도 하지만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와 한계를 코엘료 특유의 아름다운 묘사로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작가적 상상력이 인간 엘리야를 보다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성경의 중요한 맥락을 훼손하지 않기에 중심만 잡고 읽으면 은혜롭기까지 하다.

소설의 시점은 BC 9세기 초 이스라엘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시돈 땅 사렙타(사르밧) 지역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는데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아합 왕이 다스린 시대였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국제결혼을 해서 유일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라는 페니키아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신(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이스라엘에 오랜 기간의 가뭄을 예고했다. 이에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 수배 중이었다. 가뭄 기간 동안 크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건네주는 먹이를 먹으며 삶을 연명하던 엘리야에게 신의 음성이 도착한다.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집으로 이동할 것을. 바로 거기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교회를 다닌 사람 중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근의 때를 이기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에서 살아나는 복을 받은 이야기는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었다. 작가 코엘료는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 바깥에서 꾸며낸 인간 엘리야의 모습을 보태고 만들었다. 훗날 850명의 이방신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인 그도 신을 의심하고 한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작가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꾸며내고 그려냈다. 

소설 속 엘리야의 고민은 극한 시련에 관한 인간적 사유다. 소설은 종교적 색채가 최대한 배제되었다. 시련을 통과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엘리야의 존재론적 번민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 있다. 작가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관, 신념,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상에 주목했다. 시련 자체는 인간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시련은 언젠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시련을 겪어낸 인간은 스스로를 일으키는 법을 배운다. 위기의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보편적이고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를 깨달을 때쯤 주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소설은 그다음에 있을 일, 즉 선지자로서 엘리야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극적이며 강력한 사건 직전에 이야기를 끝맺는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엘리야가 얼마나 고독하고 거대한 싸움을 했는지.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인 숭배자들과 맞짱을 떠 승리하는 기적과 그 일이 끝난 후 빗속을 질주하여 왕의 마차를 추월하는 모습은 과히 압권이다. 어떻게 기도하면 엘리야처럼 장대비 속을 달리는 감격을 누릴 수 있을까. 여름철 장마가 쏟아질 때마다 밖에 나가 전력 질주를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엘리야다. 그런 엘리야조차 영적 침체기가 있었고 로뎀나무 밑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신세가 된다. 시내산 동굴에서 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까지 엘리야의 엘리야스럽지 않은 모습은 갈멜산 대결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선지자조차도 한낱 보통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엘리야의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신의 은총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끌어낸다. 작가의 연금술이 놀랍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각 시대적 배경에서 신의 뜻에 따라 신에게 소명 받은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은혜롭고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 인간으로서 신의 소명 앞에 얼마나 거대한 고독과 번민이 있을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가나안 땅 코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생을 마감한 모세, 자식의 쿠데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 왕, 죽으면 죽으리라는 뚝심으로 목숨 걸고 왕 앞에 나아간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본 베드로 등등 성경에는 신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에서 귀중히 쓰임을 받은 위대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기적의 클라이맥스와 막전 막후의 고비 때마다 그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들의 외모는 어떠했고 성격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의 MBTI는. 엉뚱하지만 궁금하다.

소설이 전하는 위로의 결을 생각할 때 재번역(재출간)의 타이밍은 시의적절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다. 21세기 근래에는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전염병 탓으로 먹지 못했고 가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고 자영업자들은 팔지 못했다. 심지어 6.25 전쟁 때도 닫지 않았던 교회 문을 닫기도 했다. 이제 좀 빠져나오는가 했더니 바이러스는 여전히 생동하여 우리 삶의 반경을 옥죄고 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련이나 아픔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견디어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눈부시다. 견디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견디기 위해 이기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기에 가는 것이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이 웅숭깊은 메시지를 신의 대리자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라는 픽션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 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코엘료의 장편소설 『다섯번째 산』은 인간적이되 신성하고 지엽적이되 국제적인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실감나게 관통하고 있다. 종이의 발명, 알파벳의 기원, 무역로 등 당시의 역사와 종교, 정치,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선지자의 전형' 엘리야의 강렬한 인간적 고뇌는 3천 년이란 시간을 넘어 우리의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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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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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가 별세한지 3주가 되어 간다. 아직도 고인의 숨결이 우리 주변 곳곳에 생동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인이 남긴 족적이 너무 거대해서 타계 후 더 고인을 갈망하고 우러르는 것 같다. 출판계가 특히 그러한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저작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고인의 유작들이 역주행을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 이어령 교수는 독보적인 다작 저술가로서 60년 동안 13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이중 생전 마지막 인터뷰집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인터뷰어이자 작가인 김지수가 암 투병 중인 고 이어령 교수를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인터뷰집이다. 책 속에는 죽음을 앞둔 한 거대 지성의 묵직한 사유와 철학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돈, 행복, 생명, 과학, 사랑, 죽음 등 인간의 가장 고밀하고 웅숭깊은 주제들을 총망라하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암 투명의 끝자락에서 불과 죽음을 얼마 안 남긴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인터뷰는 대범하고 역동적이며 열정적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 직전의 '마지막 수업'인데 고 이어령 교수의 지적 생명력은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힘이 있고 박력이 있다. 육체는 늙고 변하며 병들 수 있지만 정신은 늙지 않는다는 걸 본인 스스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책 곳곳에 지성의 바다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독자를 압도한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고인 특유의 수다스러움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터뷰어 김지수는 이러한 고인의 박학다식함과 지적 열정에 경도되고 압도된다.

눈에 띄는 건 인터뷰어 김지수의 탁월한 리액션이다. 아무리 훌륭한 지성을 만났다 하더라도 인터뷰어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좋은 대담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인터뷰이를 감당할 만한 지력과 실력이 인터뷰어에게는 꼭 필요하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지적·인격적 관계 형성, 적절한 호흡과 피드백, 공수를 오가는 건강한 긴장감 등이 훌륭한 인터뷰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저자 김지수의 인터뷰 실력은 수준급이다. 집필 과정에서 어느 정도 편집을 거쳤겠지만 실시간 대담에서 예상치 못한 걸쭉한 사유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어 김지수의 공이다.

책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주제는 바로 '죽음'이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뒤 그 어떤 항암 치료도 하지 않고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꾸준히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고인의 모습은 죽음의 달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인이 천착한 죽음은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다. 딸과 손주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죽음의 실전을 겹으로 체험했다. 고인에게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시작이고 생명이었다. 죽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며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다.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다"라고 말한 고인의 가르침이 바로 이 지점을 웅숭깊게 웅변한다.

고인은 자기 인생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임을 고백한다. 핏방울과 땀방울도 아닌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핏방울과 땀방울은 너무 흔하며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 특성 때문에 결국 피눈물밖에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피와 땀을 붙여주는 건 눈물이어야 한다는 걸 고인은 강조한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눈물은 나약한 것, 비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피와 땀이야말로 고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본질적 힘이라 인식했다. 하지만 고인은 88년 통찰의 결과로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한 것이 나오는 법"임을 일깨운다. 소름이 돋으면서 새 세상을 만난 듯한 전회와 같은 깨달음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굵게 하이라이트 한 부분이다.

한달음에 책의 막장을 덮었다. 고 이어령 교수와 동시대를 산 것이 영광스럽다. 정치, 종교, 나이, 성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MZ세대'가 난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세가 되었다. 기준과 질서가 모호해졌다. 물론 새로운 조류와 스타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우리가 새것이라 하는 것 대부분이 옛것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 꼰대 같은 소리일지 몰라도 진실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옛것의 새것스러움을 거대한 지성의 향연 위에 녹여낸 명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 빛나는 대화를 지성에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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