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톨스토이를 읽을 때 러시아인이 되고 디킨스를 읽을 때 영국인이 되며 헤밍웨이를 읽을 때 약간 미친 남성 미국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고 싶다” - 작가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 모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소위 뻑 갔다. 작가의 말이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받는 감동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러시아 귀족이 되었고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골 소년이 되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나를 일본 전국시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참혹한 내전에 번민하는 스페인 민중이 되게 했다. 바로 이것이 소설의 힘이자 문학의 기능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파친코』가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소설 『파친코』는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89년 일본 버블경제 붕괴까지 약 80년의 현대사를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삶을 통해 관통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선자 가족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국전쟁, 80년 버블경제 붕괴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족적이기도 하다. 참혹한 시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선배 세대의 대를 잇는 고군분투가 감동적으로 읽힌다. 전쟁과 가난,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운 선자 가족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부산 영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 여성(선자)이 두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해서 어떤 계기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차별과 혐오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스토리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1권에 선자의 삶과 사랑에 집중한 반면 2권은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여러 각도에 훑는 방식을 취한다. 1권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느린 시간 흐름을 택했다면 2권은 대략적이고 중반부터 빠른 시간 흐름이 특색이다.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건 이 소설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의 초고 『모국(motherland)』은 자이니치(재일교포) 3세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결국 한 챕터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 했다. 작가의 고백대로라면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견 공감한다. 하지만 솔로몬의 시대가 할머니 선자의 시대보다 크기와 무게가 부족했다고 보지 않는다. 한 시대가 갖는 의미와 가치란 각기 동등하고 평등하다. 그런 차원에서 뒷부분에도 더 많은 할애를 하여 소설을 3권 이상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분량과 감동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역사를 다룬 소설에는 경우에 따라 거대 서사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나 『레미제라블』처럼 말이다.

『파친코』는 묵직한 여러 테마가 겹쳐져 읽히는 소설이다. 여성의 위대함, 역사의 도도함, 민족의 긍지와 투혼, 가족의 찬란함 등 굵직한 여러 읽기 코드가 작동한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러한 거대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의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시대에 짓눌린 인물이 나오기 마련인데 선자를 위시한 『파친코』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캐릭터성이 완전히 살아있다. 명징하고 생생하다. 선자의 인생을 뒤흔든 악역 같은 캐릭터 고한수도 자기 내면에 치열하고 남루한 번민을 가진 복잡한 인물로서 작품 속에서 그만의 개성이 완전히 살아 있다. 인물이 시대의 산물로서가 아닌 각 개인으로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 그게 바로 소설 『파친코』의 힘이다.

제목 '파친코'는 탁월한 작명이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파친코'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지 알게 되면 무언가 묵직한 불편함이 엄습해온다. 파친코는 당시 일본에서 차별받고 멸시받던 재일조선인의 삶의 터전이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탓으로 정작 일본인은 기피했던 것을 일제 패망 뒤 먹고사는 걸 해결하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파친코는 재일한인들의 삶이자 반전이자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냉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통해 응수했고 극복했다. 요컨대 제목 '파친코'는 이국땅에서 김치 냄새난다는 놀림을 당하면서 식당 일로 생계를 꾸리며 자식을 키워낸 선자와 파친코 사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쟁취해낸 모자수·솔로몬 부자의 치열한 역동성을 오롯이 담아내는 명제목이다.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좋은 느낌을 굳이 망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 소설과 대결하면 백전백패한다. 나는 지금까지 원작을 능가한 영상 장르의 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데 비해 인간의 감각 유한하기 그지없다. 이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거대한 공간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고 밀려든 묵직한 감동이 내 전신을 적신다. 잘 팔리는 소설은 이유가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