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오랜만에 아이들과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추가되는 책은 많아지는데 순서에 맞게 꼽아놓지 않아 체계 없는 중구난방의 책장이었지요. 차일피일하다가 아이들이 도와준다고 하여 잽싸게 작업했습니다. 제 책장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침대가 있는 전면은 문학으로 채웠고 장롱이 있는 후면은 비문학으로 채웠습니다. 이마저도 공간이 부족하여 첫째 딸 방에 별도 책장을 설치해 제가 가장 아끼고 영향을 준 명저들, 즉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카뮈, 위고, 폴 존슨의 저작들을 따로 구분해두었지요.

문제가 되는 건 안방 책장의 한국문학이었습니다. 가나다순의 작가명 배열이 완전히 파손되어 공선옥부터 현기영까지 순서대로 맞췄고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 신경숙, 오소희, 김훈 작가는 별도 구획으로 모아놨습니다. 그리고 문학 내에서도 소설과 비소설을 나누어 일반적인 에세이, 즉 여행후기와 산문집 같은 책은 작가명과 무관하게 별도로 묶었습니다. 아이들이 도와주어 금방 끝날 수 있었지요. 이제 남은 건 후면의 비문학 도서―주로 인문학 서적―를 손보는 일입니다. 워낙 책이 많고 먼지도 많아 하루 반나절을 소요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즐겁게 도와주겠지요.

한국문학을 정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구나. 결혼 전 가장 많이 읽은 게 한국소설이었습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김훈의 『남한산성』을 벌벌 떨며 한달음에 읽은 기억은 아직도 선연합니다. 박민규는 한국소설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작가이고, 공지영은 내가 관심 갖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김별아의 에세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힐링'이었고 『달의 제단』을 위시한 몇 권 안 되는 심윤경의 소설은 나에게 하나의 독특한 '브랜드'로 심어졌지요. 신경숙의 문체와 이문열의 무게는 여전히 저를 압도하지요. 한국소설은 여전히 찬란합니다.

고전과 인문학으로 이탈했던 제 독서를 응시하면서 이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한국문학을 만나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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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 흔들리고 지친 이들에게 산티아고가 보내는 응원
손미나 지음 / 코알라컴퍼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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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파울류 코엘류를 참 많이 좋아했다. 오래전 정치와 인문도서를 즐겨 읽다가 문학으로 기호를 옮길 시점이 있었다. 그때 나를 강렬히 끌어들인 게 바로 코엘류의 연금술적 문장이었다. 당시 몇 달 만에 코엘류의 모든 소설을 읽었을 정도로 그의 글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15년 전 신(神)의 여성성을 탐구한 『포르토벨로의 마녀』에 처음 매료된 후 코엘류의 소설들을 거꾸로ㅡ현재에서 과거 순으로ㅡ읽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 그의 유명작들을 두루 훑었다. 그중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내 마음속을 가장 강렬하게 붙들고 있는 작품은 그의 처녀작 『순례자』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혼이 났던 기억이 선연하다.

소설 『순례자』 탓인지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로망이 되었다. 이후 내 나이 서른이 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산티아고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다 아이돌 그룹 GOD가 재결성되어 산티아고 길을 함께 걸은 TV 예능을 본 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열망이 다시 샘솟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산티아고는 완전히 잊힌 듯 보였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산티아고에 대한 내 무의식을 다시 일깨운 건 여행작가 손미나의 신간이다. 그녀의 신간 에세이는 오랜 시간 잠재적으로 봉인되어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 갈망의 불꽃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신간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는 작가 손미나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약 4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여정을 담았다. 이 책은 기존 여행기와는 달리 오직 '산티아고'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의 스페인 사랑을 생각하면 더 먼저 떠났어야 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떠났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을 언제 걸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때가 되면 그 길이 부른다"는 말처럼 지난해 봄, 작가는 가슴속에서 드디어 산티아고 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지독한 전염병이 3년간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사라지려 시작하려던 시점이다. 작가는 산티아고 길로부터 '계시'를 받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스페인행 비행기 표를 끊는다.

책 속에는 인생 2막으로 넘어가는 한 중년 작가의 도전과 용기, 열정과 사랑, 위로와 사유가 포근하게 담겨 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 24.2km 구간을 거쳐 총 800km에 이르는 대장정 가운데 작가는 여러 유의미한 주제를 포착하고 가치 있는 사유를 추출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거쳐가는 마을마다의 고유성을 관찰하는 재미는 현상적인 것일 뿐 본질적이지는 않다. 긴 여로에서의 본질은 결국 '나 자신'이란 걸 깨닫는다. 죽도록 힘든 피레네산맥 코스가 끝나면 앞으로 쭈욱 펼쳐진, 마치 자기 인생길을 은유하는 듯한 길고 긴 도보길이 펼쳐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작가는 산티아고의 울림을 더 깊이 발견하고 음미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한 작가는 종국적인 깨달음 앞에 고개를 숙인다.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면의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 그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위로와 사랑, 더 나아가 인생 2막에도 더 무겁게 짊어져야 할 타자와 세계의 무게 등. 작가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여러 의미는 결국 자기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기 위해 걸어야 했고, 그 길을 걸었기에 그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고백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여행 에세이로서 이 책의 강점은 적확한 사진의 배치에 있다. 글과 사진의 불일치성과 외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잃게 된 글의 무게는 조악한 여행수기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불편함이 없다. 책 속 빼곡히 들어선 다양한 산티아고 사진들은 나란히 기술된 작가의 글을 잘 수식하고 보완한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책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이 소중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산티아고 길을 향해 홀로 걷는 작가의 뒷모습을 풍경과 함께 찍은 책 표지 사진은 탁월하다. 표지만 보고도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기술이다.

책장을 덮은 후 생각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나는 왜 산티아고 길을 가고 싶어 했는지. 모호했다. 구체적 이유 없이 그저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애매한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기 위해 걷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의 비루함을 부인할 수 없겠다. 언젠가 꼭 떠날 것이다. 혼자도 좋고 아내와도 좋다. 때에 따라서는 큰 딸과 함께도 좋다. 산티아고 길의 로망을 다시 한번 내 가슴속에 밀어 넣으며 기분 좋은 감상을 갈무리한다. 손미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일독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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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끝장이자 극한'으로 평가받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작년에 완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10년간의 혼신의 번역이 출판사 민음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는 뉴스를 통해서다.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에 딱 맞춰 완간했으니 무덤에 있을 작가가 손뼉을 칠만한 절묘한 타이밍이다. 잘 알다시피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긴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단어나 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니 과히 노학자(老學者)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반 독자보다 작가와 평단에게 더 박수를 받는 작품이다. 모두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7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이 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한 소년이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을 향유하면서 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T.S. 엘리엇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20세기 2대 걸작으로 꼽으며 "이들을 잃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라고 했다. '타임스'와 '르몽드'는 이 소설을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베냐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소설은 읽기가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소설을 완독한 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완독주의자(完讀主義者)다. 웬만해선 완독하는 편이다. 도중에 그만둔 책은 많지 않다. 지루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완독한 나였다. 읽었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이었던 32권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짧은 시간에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껌이었다. 그러나 정말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있다. 읽다가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루함'이고 다른 하나는 '난해함'이다. 물론 둘을 동시에 갖춘 텍스트는 정말이지 한 장조차 넘기기 힘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기 위해 수차례 도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긴 호흡을 좋아하는 장편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프루스트의 대작은 과히 넘사벽이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스킵 없이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물음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드는 나만의 정신승리였다. 앙드레 모르아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말했다. 모르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아니 못한 사람이다. 

이 소설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냐면 매번 실패하면서도 재차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이 기묘하고 거대한 텍스트는 매력적인 완역본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최근 내 독서는 방향을 잃었다. 기준과 박력, 도전과 일관이 필요하다. 23년에 반드시 읽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다부진 도전의 가슴 뛰는 부담감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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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조성민 그림 / 현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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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1년째를 맞고 있다. 당초 예상을 깨고 장기전에 들어간지 오래다. 출구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젊은이와 민간인만 희생되고 있다. 인명피해는 물론 곡류와 가스 값이 폭등하여 세계 경제 침체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반도체 공급망 대란과 함께 작년 한 해 가장 큰 국제 뉴스가 됐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 같다. 국내에서도 북한, 중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호감 국가가 됐다. 러시아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러시아에 대한 내 인상은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푸틴이 지도하는 러시아'에 대한 호감은 매우 부정적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를 혐오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북한, 중국과 함께 가장 전체주의적인 나라가 러시아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러시아 문학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푸시킨(푸슈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19세기 러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인(文人)을 여럿 배출한 곳이다. 환언하자면 나에게 러시아는 스탈린과 푸틴에 의해 혐오스러운 나라이면서 동시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로 인해 사랑스러운 나라이다. 이 아이로니컬한 이질감이 최근 나를 더 러시아 문학에 빠져들게 했다.

저자 이현우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는 제목 그대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강의한 책이다. 저자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답게 깊이 있는 분석이 백미다. 19세기 초 푸시킨부터 19세기 말 체호프까지 총 7명의 작가를 훑는다. 저자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푸시킨으로 시작해 체호프로 끝맺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체호프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20세기를 여는 작가가 고리키라고 안내한다. 7명의 작가를 소개한 뒤 작가의 대표 작품을 한 개씩 리뷰한다. 도스토옙스키만 특별히 두 작품을 실었다. 작가의 필명 '로쟈'에서 알 수 있듯이 도스토옙스키를 친애하는 작가의 사심이 담긴 듯 보인다.

저자에게 러시아는 매력의 아이콘이다. 동시대에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를 한꺼번에 배출한 나라가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랴. 러시아가 태동적·역사적으로 왜 서구식 개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설명한다. 19세기 모든 작가가 관통하는 서구 유럽주의와 러시아주의 사이의 긴장과 간극을 알기 쉽게 풀이한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적이며 전 세계적인 가치를 대변한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오직 러시아적인 작가로 남았다고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거대한 러시아 문학에 진입하려는 독자에게 입문서 역할을 하는데 적확한 책이다.

내가 오래전 출간된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앞서 언급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준 당혹감 위에서 다시 한번 제대로 러시아 문학을 톺아보기 위함이다. 러시아 문학은 나라의 땅덩어리 못지않게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세르반테스 이후 올곧게 이어져온 소설이란 장르의 규격을 초과하는 거대함으로 세계 문학사에 웅장함을 선물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분량이지만 막상 읽고 난 후에는 깊은 감동에 빠져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기념비적인 소설인 것이다. 

최근 나는 '거대함'이란 주제에 깊이 천착해 있다. 일터에서 사람과 부딪히면서, 가정에서 머리가 커지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교회에서 신앙의 일에 헌신하면서 '인간의 크기'에 대해 숙고하는 중이다. 생뚱맞겠지만 나이가 드니 이 숙고가 더욱 간절해짐을 느낀다. 마음의 크기가 넓다는 건 무엇일까. 한 인간의 내적 스케일과 그 사람의 언어는 존재론적으로 어떤 함수관계에 놓인 걸까. 나이가 든다는 것과 내면의 그릇이 커진다는 건 항상 비례하는 걸까. 하루하루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을 버티어가면서 나 자신의 '존재의 크기'에 대해 사유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절실하다. 그리고 흥미롭다.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는 나에게 청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가장 큰 지적·정서적 영감이었다. 최근 머리가 나빠진 탓인지 스토리 라인도 헷갈리고 있지만 말이다. 두 작품 외에도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의 대작을 얹어볼 생각이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로 시작해 볼 요량이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OTT 영상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목도한다. 이 직시(直視)를 한탄하며 다시 책으로, 고전 속으로, 러시아 문학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항시 그랬듯이 고전은 성경과 함께 내 지성과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절대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그 심연으로 여행하려 한다. 러시아 문학의 다부진 찬란함 속으로.

로쟈 이현우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는 이런 나에게 좋은 애피타이저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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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최근까지 고 이어령 교수의 저작을 두루 탐독했다. 그중 먼저 하늘로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공감이 될만한 부분이 많아 여러 부분에서 실제적인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딸을 향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감성도 좋았지만 딸에게 보내는 편지지에 넘실거리는 아버지의 거대한 지성이 인상적이었다.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여러 인문학적 토막을 인용해 고인 자신의 철학을 딸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하나의 지적(知的) 로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인생 최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이다. 안나의 선택을 진정한 사랑의 용기로 볼 것인지 순간 욕망에 빠진 불륜의 비극으로 볼 것인지. 톨스토이의 작품 속 분신인 레빈의 삶과 사랑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리뷰할 것인지.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천착한 톨스토이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먼저 쓰인 또 다른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소설이 더 뛰어난 작품인지 등. 나눠보고 싶은 얘기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내 로망을 교육적 욕심이나 지적 허례의식의 발로로 보지 않기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서로 간 견해의 차이를 나눠보기 위함,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빠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고전문학을 딸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동시에 읽은 후 자기만의 사유 속에서 아빠와는 분명히 다를 딸만의 감상을 경청해 보기 위함이다. 삶과 사랑, 연애와 결혼, 정치와 예술, 노동과 경제 등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다루는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초 나에게 영향을 준 양서만 모아놓은 책장 하나를 큰딸 방으로 옮겼다. 본래 거실에 있던 것을 아내의 피아노 레슨을 이유로 마땅히 옮길 데가 없어 딸 방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그 책장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찬연한 작품들, 알베르 카뮈 전집,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 폴 존슨의 인문학 저작들, 이근식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총서 5권,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시리즈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찬탄스러운 책들로 가득 차 있다. 내 딸이 그 책장에 꽂힌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토론하고 서로 간의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아빠일까, 생각했다. 

가끔 훗날 딸에게 물려줄 유산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얼마 안 되는 돈.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풍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읽은 거대한 책 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톨스토이와 헤밍웨이, 카뮈와 위고의 세계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서울 도심의 어느 대형서점 입구에 쓰인 글귀처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비전이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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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입니다. 자칭 전집선집특별판한정판 수집가입니다.ㅎㅎㅎ
서가에 꽂힌 1~7권 전집이 무엇인가? 처음보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위에 말씀하신대로 까뮈 전집이네요...전집수집가로서 부끄럽게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제가 뭐 까뮈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 별 관심이 없지만...저 전집은 탐나는군요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한권 한권씩 구입해야겠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절판되지는 않겠죻ㅎㅎ

다윗 2023-02-21 11:01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전집 수집가라 하시니 멋집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카뮈 전집(특별판)이 맞습니다. 당시 마누라 눈치 보면서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관련 블로그 포스팅 참고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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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2-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거대한 책더미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고 하셨는데 저하고 똑 같은 생각이십니다요. ㅋㅋㅋ 하지만 제 딸은 책에는 전현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함정 ㅜㅜ 제가 나름 괜찮은 귀한 책들 많이 모아 놓았거든요..몇 번 이야기했는데 전혀 관심무...ㅜ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