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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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은 모두 다른데 텍스트적 관점에서 크게 두 개로 나누면,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있고 산문―소설도 산문의 한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수필(에세이) 정도의 소개념으로 산문을 칭함―을 잘 쓰는 작가가 있다. 시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제외하자. 산문가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지만 소설가는 가끔 산문을 쓴다. 그중 소설과 산문 모두 잘 쓰는 부류가 있다. 하루키나 김훈과 같은 작가는 소설과 산문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보다 산문을 더 잘 쓰는 작가도 있다. 김연수를 꼽을 수 있겠다. 반면 소설가일 수밖에 없는 작가도 있다. 오직 소설가일 때 빛나는 작가 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렇다. 공지영은 천상 소설가다.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에 감동했고 그녀의 모든 산문에 무감했다. 소설은 훌륭했고 산문은 별로였다. 그녀의 소설은 한결같이 읽기 쉽고 대중적이다. 쓸데없이 무겁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는 솔직함으로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어두운 곳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처절한 삶과 힘(권력) 있는 자들의 고약한 위선에 대해 추적하고 고발했다. 문학에 대해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한 소설가 조정래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지영은 문학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증명해가고 있는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공지영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평생 먹을 욕을 최근 몇 년 동안 다 먹고 있는 느낌이다. 조국 사태 후 그녀가 쏟아낸 진영 논리식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것 같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투표 잘합시다'라는 글을 게시하여 한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녀의 삶을 저리도 요란하게 만들었을까 우려하지만 작가는 우선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그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어렵지 않게 추스를 수 있었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이 고통과 허무를 통해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걸까. 공지영의 신작 소설 『먼 바다』는 정말이지 끝내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인 '첫사랑'을 그린다. 발군의 감성적 묘사와 유려한 문체는 이 소설을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다르게 읽히게 하는 동력이다. 소설은 현재의 미국과 40년 전의 한국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두 주인공의 기억을 소환하고 조합한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의 진실이 들추어지며 긴장감이 누적되는 흐름은 땀이 날 정도다. 결국 두 인물의 희미하고 불분명한 기억은 소설적 절정을 통과하며 명징해진다. 결국 소설의 끝에 도달했을 때 긴장은 종결되고 독자는 농밀한 감동을 선사받는다.

 

미국에서 의자 사업을 하는 '그' 요셉과 안식년으로 미국 여행을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 '그녀' 미호는 첫사랑의 기억을 추적해가는 두 주인공이다. 작가는 3인칭 시점으로 둘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적으로 추적한다. 4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을 연결해 준 매개는 '페이스북'이라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40년 전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판하고, 광장에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멸했던 '그'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자 사업가가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괴리를 작가는 유심히 포착한다. 다만 포착할 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것과 애써 싸우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적 배경으로 지긋이 물러나 있을 뿐이다. 이제 작가도 운동권 담론에 매몰된 과거 순진한 시절의 공지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종 두 인물의 기억을 추적한다. 둘의 기억은 조각나 있다. '그'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을 잃어버렸고, '그녀'는 '그'가 가장 강렬해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이었다. 이는 소설의 제목과 웅숭깊게 연결된다. 소설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난다. 소설의 앞과 뒤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먼 바다'는 두 인물이 함께 공유한 공간적 배경이자 잃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었던 추억을 회복한 초월적 상징이다. 그렇기에 바다는 멀어야 했다. '먼 바다'여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확인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멀고 길어야 했다.

 

결국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은 절대 우주의 시간을 전복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시간의 일차월성과 무관하게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영장으로서의 인간적 생명력은 그 절반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잊힌 것은 잊힌 대로 의미가 있고 잊힌 것이 다시 복기될 때는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다. 두 주인공이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보게 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는 사람의 다음 시구절은 이러한 내 사유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재청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처음이라는 것과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처음이라는 건 '사실'의 세계이고 기억된다는 건 '이상(理想)'의 영역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다는 사실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종국에 이를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기억' 정도로 갈음하는 건 적절치 않은 정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이상이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와 현실을 더욱 냉정히 성찰할 수 있기에 말이다. 즉 첫사랑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비된 나를 천착하는 아름다운 소환이요, 이후 사랑의 가장 순수한 시금석이 되는 경이로운 추억의 숙성이다. 이러한 첫사랑의 생명력을 아름답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소설 『먼 바다』는 훌륭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추신'으로 붙인 문장이 자못 이색적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라는 추신을 남겼다. 소설의 정의가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는 점을 주지한다면 소설의 생명은 당연히 '허구(fiction)'에 있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불필요하게 저런 끝맺음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난 잠시 생각했다. 혹 지난 몇 년 간 작가 자신이 진실과 관련하여 지난한 싸움을 했다고 반추하며 스스로 지쳐있어 그런 건 아닐까. 즉 극한의 자존적 외로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감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작가에게 조언하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몽매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추가로 작가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제언하겠다. 소설로 말하는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할 때마다 문학적 생명력은 소멸된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동시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가 광장에 나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87년 체제는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절대로 과거 독재 정권 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진영 구도가 남았을 뿐이다. 여기에 선악을 대입하고 '옳고 그름'을 외치는 순간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는 점증되고 서로 간 신뢰는 결핍된다. 그 선봉에 소설가 공지영의 이름이 없기를 바란다. 부디.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소개보다 작가를 향한 잔소리가 많은 조잡한 글이 됐다. 정말 잘 쓴 훌륭한 소설인데 그만큼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솔직한 내 심정을 보태느라 글이 장황해졌다. 정리하자면 신작 『먼 바다』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그 자리에서 한달음에 완독했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첫사랑은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다는 것을 소설가 공지영은 이 한 권의 소설로 아름답게 들려준다. 최근 읽은 한국소설 중 최고다. 오래간만에 읽은 수작이다. 읽지 않은 사람은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기 바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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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네이버에서 가장 큰 북 카페의 서울모임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순수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작가 지망생까지 책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까칠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정식 모임 후 회식자리에서 가장 자주 안줏거리가 된 건 소설가 공지영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오(好惡)는 유독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나는 호(好)의 입장이었고 항시 소수였다. 다수의 공격은 매서웠고 광활했다. 과히 지독한 논쟁이었다. 밤을 새우며 공지영 문학을 토론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공지영의 신작이 출간됐다. 응당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신간 『먼 바다』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아직도 작가 개인을 철저히 배제한 완벽한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 중 탑이다. 최근 작가를 둘러싼 시끄러운 뉴스를 단박에 잠재울 만큼 소설 자체는 끝내준다. 공지영은 소설가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그녀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10년 전이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주관한 큰 규모의 시상식이 끝난 뒤 그녀와 나는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다. 여러 안건에 대한 솔직하고 가식 없는 그녀의 아우라를 긍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주량에 놀랐던 것도 기억한다. 이후 둘은 작가와 독자라는 전형적인 관계로 돌아와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최근 그녀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작은 정말 재미있고 훌륭하다. 자세한 건 내일 오전에 올릴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소설가 공지영의 삶과 문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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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 딸과 TV로 월트디즈니의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2>를 시청했다. 극장에서 이미 본 영화였지만 케이블 TV 더빙판으로 다시 볼 기회여서 즐겁게 시청했다. 2편은 1편과 결이 달라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전작과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다. 여자아이들이 워낙 좋아한 영화이기에 두 딸은 아빠의 분석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내가 평가한 <겨울왕국> 시리즈는 이렇다. 1편이 동생 안나의 영화였다면 2편은 언니 엘사의 영화였다. 내가 느낀 건 그랬다.

 

2편을 보면서 '엘사가 이제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사실 <겨울왕국 2>는 엘사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엘사 중심의 영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머리를 풀어헤치며 '렛 잇 고(Let it go)'를 부른 1편의 엘사보다 종횡무진 자신의 진본을 찾아 나선 2편의 엘사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인지 2편을 시청하면서 내가 유독 엘사에 대한 매력을 자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 아빠가 영화를 보면서 특정 인물을 한없이 칭찬하니 둘째 딸은 자신의 영어 이름에 아쉬움을 가지며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말한 것이리라.

 

사실 그랬다. 몇 년 전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작명해달라고 했을 때 아내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첫째 딸의 영어 이름은 '벨(Belle)'이다. 당시 실사로 재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에서 엠마 왓슨이 맡은 여주인공 벨의 매력이 우리 가족 모두를 적잖이 경도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영어 작명이었다. 둘째는 엘사로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했고 1편에서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안나(Anna)'를 선택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은 안나가 됐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안나는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인물로 꼽힌다. 나는 톨스토이의 불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보여준 진심에 대한 자유와 극한의 생명력을 긍정하며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이해(理解)에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영어 이름 안나를 톨스토이의 안나가 아닌 월트디즈니의 안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왕국 2>를 보며 엘사를 거듭 상찬한 아빠의 모습에서 무언가 마뜩잖음과 결핍을 느낀 것이다. 솔직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곧바로 아무 답변도 주지 못했다. 피상적으로 <겨울왕국> 시리즈의 주인공은 분명히 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잠자코 있던 첫째 딸이 엘사보다 안나가 더 대단한 존재라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더 놀랍다. "안나는 초능력(마법) 없이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엘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결코 생각지 못한 한방이었다. 첫째 딸의 해석과 웅변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항시 비범함은 범상함을 전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비로움을 쫓는다. 기적은 현실과 괴리되지만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불변한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엘사에 환호한 것은 그녀의 인간 됨보다 인간 되지 않은 초월성을 선망한 것이리라. 엘사의 강력한 마법과 초능력, 그리고 범상하지 않은 판타지적 카리스마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몽롱하고 화려한 미모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궁극일 것이다. 하지만 엘사에 가려진 안나의 매력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감상해왔다. 첫째 딸의 말대로 특별한 능력 없이 오직 인간적인 근거만으로 왕이 된 안나의 매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 간과해왔다. 반추해보면 인간적 관점에서 고도의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항상 일관되게 현실을 긍정한 캐릭터는 안나였다. 나는 입장을 바꾸었다. <겨울왕국> 시리즈의 진정한(내재적) 주인공은 언니 엘사가 아닌 동생 안나였다는 것으로.

 

안나는 궁극적으로 <겨울왕국>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다. 1편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부분은 안나가 엘사의 장갑을 벗기면서 엘사의 정체가 탄로 나고 그 충격으로 엘사가 산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다. 그 유명한 엘사의 '머리 풀어 헤친 <렛 잇 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때 엘사를 찾기 위한 안나의 여정이 시작되고 두 캐릭터의 내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안에서만 지내며 외부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엘사와는 달리 안나는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밝고 건강한 정신으로 언제나 당당함을 유지한 안나의 내면은 자아에 구속된 듯 보이는 엘사의 소극성과 대비되며 영화의 중후반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종국적으로 안나는 진정한 사랑만이 안나와 아렌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정령들을 깨워 마법 하나 없이 댐을 부수어 얼어버린 엘사를 녹여낸 것도 안나였다.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두를 구원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안나였다. 그 어떤 마법과 초능력도 없이 말이다. 드레스 변신 장면과 메인 테마곡이 모두 엘사에게 돌아가서 비주얼적으로 대중적 매력에 엘사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지만 인간 정신의 고결한 승리와 가치라는 면에서 안나는 항시 엘사를 압도했다. 그렇기에 결국 2편 말미에서 진정한 아렌델의 왕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겠는가. 안나의 왕 등극 장면은 월트디즈니의 연출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극작술의 극치였다. 결국 중요한 건 현실성이다. 산타클로스는 신비롭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크린(영화)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우리네 삶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안나는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안나의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둘째 딸의 오해, 즉 톨스토이의 안나와 월트디즈니의 안나가 괴리한 지점에서 이렇게 깊은 사유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는 전적으로 두 딸의 공이다. 가끔 아이들의 언어 가운데 신(神)의 터치를 엿볼 때가 있다. 특히 첫째 딸의 워딩에 가끔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 됨의 숭고함에 압도된다. 어른스럽다는 건 성숙하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만큼 때가 묻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관찰과 해석을 통해 현상에 가려진 본질을 천착할 수 있다. 태도는 어른처럼 성숙한 외연을 갖되 생각은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어름 됨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겨울왕국>의 진정한 주인공 안나에 대한 아이들의 관찰을 통해 그것을 깨닫는다. 둘째 딸의 영어 이름 '안나(Anna)'가 더없이 빛나는 순간이다. 가슴 벅찬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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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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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여러 책 속의 명문장을 끄집어내 통찰력 있는 해설을 덧붙인 에세이일 것으로 기대했다. 외연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지만 정작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고만고만하고 말랑말랑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최소한의 인문학적 무게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자기계발서의 오류와 한계로 지적받는 '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 등이 책 곳곳을 메우고 있다.

 

저자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채널을 통해 책 속의 좋은 글귀를 소개하며 매주 150만 명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인문 고전, 철학, 역사는 물론,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려 뽑은 130여 편의 ‘인생의 문장들’을 작가 개인의 진솔한 경험담과 함께 전한다"라는 모 인터넷서점의 홍보문구에 혹해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위로는 전혀 받지 못했고 몇몇 책 속 명문장을 소개받는 선에서 내 독서는 갈음되었다.

 

책의 구성은 심플하다. 고전 속의 여러 문장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그것에 대한 저자의 사유를 풀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일관적인 구조로 쓰여 있다. 평가하자면 인용과 해석 둘 다에 문제가 있다. 고전 속 여러 문장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와닿지 않는 평범한 문장들이 많아 호감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녹여내는 저자의 해설에 깊이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울림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라는 제목은 왜 갖다 붙였는지 책 내용과 괴리적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에 '인문학'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인다는 게 조악하고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자기계발서들이 범람하고 있다. 읽어보면 분명 자기계발서인데 책의 띠지와 출판사의 광고 카피는 '인문 에세이'라며 독자를 호도시킨다. 괴테나 프루스트의 글 몇 줄을 인용한다고 해서 인문서적이 되는 건 아니다. 저자(작가)만의 인문학적 콘텍스트가 그 재료들을 견인하고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문장 자체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사유와 울림 있는 전달력이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나 일기장에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수준 이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내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저자의 위상을 책 한 권으로 재단하는 게 아닐까 저어된다. 하지만 이 글은 서평이며 솔직하고 냉정하게 책에 대한 평가만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힐링서적 중에서 이 책은 최하위급에 속한다. 위로에도 수준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이한 말과 글로 타자(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용기가 가상하고 그런 위로에 따뜻함을 느끼는 독자의 수준도 안타깝다. 책이란 모름지기 차가움과 따뜻함을 혼용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멘토와 힐링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권의 책이 인간에게 본질적 위로를 줄 수 있을지에 답하기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위로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 책들은 대개 '진짜'였고 탁월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이 세상에는 굳이 시간을 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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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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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가 김연수는 어려운 존재다. 한국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유독 김연수의 소설만은 잘 읽히지 않았다. 주제나 소재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싫어한 이유는 오직 문장 탓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이 문장을 이유로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장 때문에 그의 소설을 멀리한다. 관찰과 사유의 깊이는 제법인데 그것을 문장력이 못 받친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그의 문장을 읽는 내 평가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소설가의 일』은 2014년에 출간된 김연수의 소설론을 정리한 산문집이다. 작가의 창작론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 속에는 국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쓴 중년 작가의 집필 내공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의 구조, 플롯, 인물, 주제 등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거의 모든 설명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 오르한 파묵 등 작가가 평소에 좋아하고 영감받아온 세계적인 소설가들의 명문장이 곳곳에 소개되며 작가의 주관을 돕는다.

김연수에게 소설 쓰기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쓰는 일'이다. 초반부터 완벽히 와꾸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소설의 길이 열린다는 게 김연수의 논리다. 그가 이 깨달음의 절정에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을 통해 글쓰기(특히 소설 쓰기)에 대한 운명론적 견인을 엿본다. 그리고 자신을 소설가로 이끈 다음 문장을 소개하는 대목은 일류 소설가 다운 걸쭉한 집념을 확인하게 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를 '캐릭터'와 '플롯'의 견인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본격소설이고, 사건 중심의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 장르소설이라는 얘기다. 작가는 전자(본격소설)를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소설에서 사건보다 인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인물의 전형성이라는 측면과 맞닿아 있는데 외부 상황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물보다 자기 내면의 천착과 성찰을 통해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 더 매력적이고 생명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바로 그것이 본격문학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소설의 시점을 얘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소설을 써야만 하며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을 써야 한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일인칭 소설이라 해서 작가가 일인칭 안에 구속돼서는 안 된다. 일인칭 안에는 일인칭의 시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인칭 시점에는 이인칭 시점이 숨어 있다. 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과 균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궁극의 힘이라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 된 것을 가장 좋은 예로 소개한 작가의 설명은 탁월하다.

작가의 말을 계속해서 빌리자면, 종국적으로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시점이 '너-나'의 관계를 넘나드는 공간적 관점의 입체성을 부여한다면 전지적 시점이란 소설 안팎의 구분을 넘어서 절대적인 시간의 차원을 확보한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신(神)의 존재와 등치시킨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전지적 작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객관적 예술성을 확보하는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레오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한 일,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이다,라고 끝맺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다.

이제 이 서평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나는 서두에서 작가의 문장력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교정되지 않은 난잡하고 장황한 장문장에 대한 거부감을 발산해왔다. 작가는 이 책에서 생각(사유)보다 문장이 우선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일단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라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도 이 세계를 감각하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유독 생각이 많은 소설의 전형을 발견해왔다. 화려하고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문장 자체는 제대로 잘 읽히지 않는 역설이랄까.

많은 독자들이 김연수의 문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문장에 대한 대중적 찬사에 동의하기 힘들다. 김연수의 문장은 확실히 현란하다. 하지만 그 현란함은 문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언어와 사유가 철저히 호혜적인 관계를 이룰 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사유의 빈곤을 감추려는 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연수의 문장에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은 우선 의미 파악이 쉽게 안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영일은 이에 대해 '문장이 사유에 짓눌렸다'고 비평했다. 즉 생각이 너무 많아 문장을 억누르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영일의 입장에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연수의 문장에 관한 내 개인적 호오와는 별개로 『소설가의 일』은 탁월한 산문이다. 오직 '소설 쓰기'라는 창작론을 주제로 이만큼 실제적이고 집중력 있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플롯 포인트, 불안과 무기력, 욕망(혹은 사랑)과 결핍이 채워주는 핍진성, 퇴고의 중요성, 캐릭터와 플롯 중심 소설의 차이,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 등등 작가의 20년 내공이 담긴 많은 충고들이 돋보인다. 소설을 위시한 창작 글쓰기를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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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소설집은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에세이와 소설 문장의 온도 차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