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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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픈 사람은 달라진다. 아파본 사람은 삶의 깊이를 밀도 있게 천착한다. 죽도록 아파본 사람은 삶과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를 웅숭깊게 깨닫는다. 아픔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새삼 강렬히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성숙해졌다. 현명해졌다. 겸손해졌다. 글에 살기가 덜하다. 분노와 비난은 절제되었고 자기주장은 정제되었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조롱도 사그라들었다. 타인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함양됐다. 방송인 허지웅 얘기다.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가 암 투병을 극복하고 쓴 첫 번째 에세이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그를 평소 얼마나 싫어하고 비판해왔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 서평에서 그의 두 권의 에세이(2014 『버티는 삶에 대하여』, 2016 『나의 친애하는 적』)를 매우 신랄하게 기각한 바 있다. 내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 세대를 향한 조롱과 기존 권위를 경멸하는 그의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어설픈 지식 몇 토막으로 선배 세대가 힘겹게 쌓아올린 공()과 업적을 불인정하고 조롱하는 그의 언행은 과히 역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간에서는 그의 그런 기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의 에세이 중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향한 분노와 시기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텍스트다. 암 투병이라는 삶의 극한의 '바닥'에서 정신의 단련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는 성숙한 젊은 방송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 곳곳에 자기 자신에 관한 객관적 성찰, 과거 자신의 부적절하고 온당치 않은 언행의 후회, 삶의 여러 맥락에 관한 진지한 감사 등이 고백됐다. 허지웅이 맞나.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지. 그의 바뀐 태도 때문인지 문체까지 온화하게 다가와 책 곳곳을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내려갔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곳곳에 철학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니체를 다시 읽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와 기독교를 사멸시키려 한 서양 근대 철학자가 어색한 조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ㅡ저자는 '권력의지'로 표현했다ㅡ를 제외한 채 '운명애'와 '영원회귀'만을 떼어내 자기 삶의 긍정의 모멘텀으로 치환하는 건 어색하다. 니체적 삶의 희망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힘에의 의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맹목적인 것인데 비해 니체는 '힘(권력)에의 의지'를 통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우리 삶을 충만하게 넘쳐흐르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딴죽을 걸자는 게 아니다. 저자의 바뀐 태도를 긍정하며 진심으로 응원하기 위해 덧붙여보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을 인용한 건 저자의 바뀐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p. 191)라는 니부어의 기도문은 소위 '평정심(평온)의 기도문'으로 불리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과 씨름하며 살아갈 때 '현실-기적' 사이의 아이러니를 가장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명문장이다. 이를 오스카 와일드의 소송 이야기와 니체 철학의 '위버멘쉬'와 연결 짓는 건 다소 어색했지만 저자가 결국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는 니부어의 입장에서까지 추출해낸 대목은 흥미롭다. 아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모순과 한계의 발견,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충만한 감사가 저자의 삶에 흘러내린 것이니라.


바뀐 저자의 태도 때문인지 책은 술술 잘 익힌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자기 삶을 긍정해내려는 방송인 허지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응원한다. 저자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저자에게 무조건적인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었던 기성세대는 '가면을 써서라도 웃어야 할 존재'로 바뀌었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건 소중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준에 이르렀다. "가면을 벗고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해야 한다"는 조언도 첨가한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권위와 기존 질서의 틀은 분노와 투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악의적인 게 아니라면 웃음과 설득, 소통과 여유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가 바뀐 만큼 세상도 바뀔 것이다.


과거 저자를 비판할 때 저자의 영화 리뷰만은 까지 않았다. 저자의 영화 해설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수준급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 장르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은 물론 각 영화를 풀어내 우리의 삶과 사유에 적용시키는 각론화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일테면 책의 말미 영화 <스타워즈> 리뷰는 높은 통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스타워즈>를 "재능 있는 젊은이를 질투하거나 두려워할 것인지, 아니면 축복하고 응원해 줄 것인지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충격이다. 시리즈 전편을 다 본 나에게 영화 <스타워즈>는 그저 화려한 CG로 그려낸 광활한 우주 광경이나 스펙터클한 광선검 격투신이 전부였다. 그것이 축복과 응원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최근 주변에서 능력과 다름에 관한 시기와 반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기에 <스타워즈> 리뷰에 담긴 저자의 달견과 통찰은 시의적절하게 내 마음을 훔쳤다.


책 제목을 생각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제목을 지었는지는 책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살고 싶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게 농담이란 걸 선언하는 것인지, '살고 싶다는 농담'을 툭 던져보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건 책 곳곳에서 저자의 살고 싶은 의지만큼은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는 건 저자에게 진심이었을 게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까. 결국 저자는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 "살아라."(p. 274)


서평을 정리하자. 금번 허지웅의 신간은 읽어볼만했다. 좋은 느낌으로 따뜻하게 읽었다. 과거의 악평과는 독립적으로 호평이다. 분명 허지웅은 변했다. 과거의 날선 문체가 아니다. 분노와 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겸허한 소회도 엿보인다. 자기반성이 보인다. 정치 얘기는 일절 없다. 암 투병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 사유와 마음의 크기가 더 확장된 것 같다. 물론 그만 변한 건 아니다. 동갑내기인 나도 변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슴의 온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정서적 무드도 변했다. 40대 중반을 향하니 왜 그리 감사할 게 많은 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으로 보일 정도다. 그렇다.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 변화의 하모니에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이 놓여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려는 독자들에게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을 추천한다. 내가 허지웅의 책을 추천할 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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