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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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에세이는 다르다. 결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다. 수필가가 소설가보다 글발이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완전히 새로 창작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창조나 전개가 아닌 일상의 포착이다. 삶 속에서 촉촉한 글감을 추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읽을 만한 에세이가 씌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만났다. 김연수와 함께 한국문학을 책임질 투톱의 젊은 작가로 불렸던 그다. '작가론'을 주제로 무명의 평론가와 피곤한 토론을 하다 논쟁이 되자 모든 걸 접고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오랜 침묵이 있었고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쓴 소설의 원작이 영화로 개봉되고 모 예능에서 온갖 잡지식을 늘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였다. 개인적으로 TV를 보지 않을뿐더러 일차적으로 작가는 작품으로 만나고 평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갑다.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의 최신 에세이다. 직업 소설가로서 그가 경험하고 관조한 여행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 두껍지 않은 책 속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과 겪은 체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사유가 잘 녹아 있다. 소설가답게 짧은 에세이에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내공이 탁월하다. 기계적이고 외연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본질 그 자체로서의 여행의 내적 성질을 깊이 탐색한다. 여행을 통해 뽑아낸 다양한 삶적, 작가적, 철학적 고뇌가 웅숭깊게 읽힌다.

 

책은 작가가 중국 여행에서 추방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후 대학 시절 때 우연찮게 간 중국 여행을 소개하며 계획대로 흘러가는 완벽한 여행보다 매끄럽지 않은 실패한 여행이 본질적으로는 더 성공한 여행이라고 얘기한다. 과연 소설가 다운 글의 시작이요 메시지의 제시다. 여행의 궁극이 결국 현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완벽한 스케줄에 의해 오차 없이 흘러가는 것보다 끊임없는 변수의 연속선상에서 오직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아름답다. 작가에게 여행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자 응시인 것이다.

 

여행에세이면서도 다른 여러 책들에 관한 인용과 해설이 많이 소개된다. 가끔은 북에세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작가는 책 소개를 무한히 쏟아낸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오히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여행을 통한 경험과 여행에 대한 저자의 주관이 과거 자신이 읽은 여러 고전들의 일면과 자연스럽게 포개어지는 것이다. 특히 책 말미에 여행을 소설과 비교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여행이 일상의 부재라면 소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현실과 다른 작동 방식의 시간성이 발휘되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집중력을 고양시키며, 분명한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타 관점에서 우주를 천착하게 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소설과 여행의 유사성을 탐색하는 작가의 사유가 흥미롭다.

 

작가는 여행의 의미를 깊고 넓게 풀이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으로 여행을 정의한다. 결국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론은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라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견해와 완벽히 일치한다. 곧 여행은 나 자신을 떠나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자각 혹은 대비라는 관점에서 결국 여행은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여행 에세이가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고 있다. 1인당 GDP 3만 불에 도달한 대한민국의 현재상은 앞만 보고 달려온 과거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소급해서 제어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힐링에 대한 갈망을 표출 중이다. 여행은 그 최전선이다. 서점에 한 섹션을 할당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여행 도서의 방대한 양이 이를 방증한다. 이 가운데 옥석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바로 여기에 김영하의 신간 『여행의 이유』의 위치가 있다. 간결하고 묵직한 방식으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특유의 감성적 달필로 써 내려간 이 작은 에세이를 쉼이 필요한 모든 독자에게 추천한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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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 김일성이 일으킨
강규형 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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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파랑 출판사에서 시의적절한 책을 출간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강규형 명지대 교수를 위시한 총 5인의 공저자가 6·25 전쟁에 대해 강론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공저자 5인의 이력만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책 내용은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기조에서 6·25 전쟁의 성격을 생동감 있게 풀이한다. 많지 않은 분량 가운데 당시의 참혹한 사진과 여러 수치들을 인용하며 6·25 전쟁의 객관적 민낯을 서술한다.

 

   책 제목에 주목하자. 제목의 구조를 살펴보면 '김일성이 일으킨'이라는 형용구가 '6·25 전쟁'을 수식하고 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 마는 사실 이삼십 대 젊은이들로부터 6·25 전쟁은 점차 잊힌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6·25 전쟁의 귀책성, 파괴성, 내밀성 에 대해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저 애매하고 말랑하게 '민족상잔의 비극' 정도로만 수렴하고 있는 인상이다. 김대중 정부 때 발병한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사글사글한 증상이 전염병처럼 옮은 것 같다.

 

   6·25 전쟁은 김일성의 발의를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하고 중국의 모택동이 지원한 국제 전쟁이다. 트루먼의 미국은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15개국의 연합군과 함께 이 땅을 지켰다. 자유를 위해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됐고 민간인 또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6·25 전쟁은 3차 세계대전을 막은 전쟁이자 그것을 대체한 전쟁이었다. 수호해야 할 가치는 '자유'였다. 자유를 지켜낸 자와 지켜내지 못한 자의 차이가 얼마나 대극적인지 6·25 전쟁 이후의 남과 북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통해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세대가 6·25 전쟁이 갖는 내·외재적 의미를 깊이 통찰하고,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며,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한편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지나치게 적은 분량과 공저자 5인이 집필했다고 보기 민망한 수준의 기본적인 내용에 아쉬움이 남는다. 완독하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얇은 두께다. 책 두께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큰 글씨체와 적잖이 수록된 사진들을 감안하면 본래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다. 또한 5인의 공저자가 무색할 정도로 내용이 단조롭고 일차원적이다. 각 공저자들의 개성과 문체가 하나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책값도 문제다. 도서정가제 이후 나는 출판사가 합리적인 책값을 설정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6·25 전쟁이 전 세대에 걸쳐 깊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반추해야 할 주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짤막한 팸플릿 수준의 책으로 11,500원을 받는다는 건 부당하다.

 

   서평을 정리하자. 6·25 전쟁은 소련, 중국(당시 중국공산당), 북한의 철저한 사전 모의와 은밀한 계획에 의해 발발한 침략전쟁이다. 1995년에 공개된 옐친 문서(스탈린 문서)는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공산 3국이 얼마나 내밀하고 악랄하게 준비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6·25 전쟁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밑줄이다. 공산권의 침공에 맞서 이 땅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을 치른 선배 세대들과 연합군 참전용사들의 용기에 깊은 경외를 표한다.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이에 대한 짧은 팸플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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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의 서양철학사. 이 어마무시한 책을 다시 집어 들기로 했다. 철학사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 열정이 이 수고로움의 본질이겠지만 과히 오랜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점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금번 개정판은 작아졌으나 두꺼워졌다. 직관적으로 참 이쁘게 생겼다. 철학 책 같지 않게 디자인한 을유문화사의 미적 감각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손때가 타지 않게 깔끔한 비닐로 포장해 서점에 진열해놓은 교보문고의 센스도 흐뭇하다.

 

   러셀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사실 러셀만큼 많은 저작을 남긴 지식인은 드물다. 일평생 78권의 책을 남겼을 정도로 그의 지적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나는 과거 2008년 네이버후드 어워드 시상식에서 그의 말을 인용해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과 러셀의 명언을 인용한 것 사이에 큰 정신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후일 반추해보건대 멋진 수상소감이었다. 요컨대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러셀의 말이자 나 다윗의 것이었다.

 

   평생 기독교를 조롱하고 무정부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삶이 내게 올곧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인정하는 건, 그의 케임브리지 대학 동년배들의 지적 허영, 즉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레너드 울프 등이 뒤섞여 온갖 불필요한 담론을 쌓았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핵심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증의 수준이 과거의 철학자들, 즉 포이어바흐나 니체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정갈했다는 점이다. 관념과 이성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목한 그의 지성을 나는 일견 높이 평가한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는 책이다. 하지만 재미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책이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 유명한 힐쉬베르거나 램프레히트의 것도 재미와 박력 면에서는 러셀의 것에 못 미친다. 물론 바로 이 지점에 세간의 호불호가 존재한다. "철학사가 주관과 흥미의 영역이냐"라는 무거운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에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빠져 보겠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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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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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심윤경이다. 한국소설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가는 많지 않다. 나에게 그 최전선은 박민규와 김애란이다. 그다음으로 김별아와 권지예가 있다. 그리고 심윤경이 있다. 나는 10년 전 출간된 연작소설 『서라벌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한국 소설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문학적 진화를 이뤄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소급해서 읽은 장편소설 『달의 제단』과 『이현의 연애』를 통해 단 번에 심윤경의 포로가 되었다.

 

소설가 심윤경이 일곱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신간 『설이』는 성장소설이다. 그의 처녀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못다 쓴 성장소설의 보완 혹은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설이'의 성장을 테마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한국 사회의 들끓는 교육열과 경쟁의식, 그것이 발산해내는 잘못된 가족의 모습과 비인간성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관통한다. 마치 소설판 '스카이 캐슬'이라 할 정도로 신랄하다. '좋은 대학'에 대한 전 국가적·전 가족적 로망에 함몰된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소설가 심윤경은 초등학생의 순수한 눈을 통해 가감 없이 고발한다.

 

소설은 함박눈이 내리는 새해 아침 보육원의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설이가 열세 살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설이를 구조한 보육원 원장은 설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훌륭한 교육뿐이라 믿고 우리나라 최고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설이는 세 번의 입양과 파양을 당하고 함묵증(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내면의 병)을 갖고 있지만 자존감 만큼은 허물어지지 않은 ‘되바라진’ 아이로 성장한다. 그 바탕에는 보육원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 설이가 흠잡을 데 없는 가정처럼 생각했던 시현이네 집에 들어가 살아보고 나서 얻은 전회와 같은 후회와 깨달음은 흥미롭다.

 

소설의 각 인물은 작가가 말하려는 각각의 캐릭터성을 잘 표상한다. 특히 설이의 이모는 친부모나 친이모가 아니면서도 계산 없는 따뜻한 가족애를 부어주는 진정한 사랑의 정수를 상징한다. 비록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대단한 선물과 지원을 해줄 형편은 못 되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테두리 안에서 설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녀의 사랑이야말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한다. 설이가 그토록 흠모하고 부러워했던 시현네 집에서의 가족에 관한 경험은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대비되면서 부모의 역할과 가족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웅숭깊게 질문하게 한다.

 

소설에서 시현의 아빠, 즉 '곽은태 선생'은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소아청소년과 원장으로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병을 잘 다스리는 최고의 의사다. 돈도 많고 이쁜 아내를 두었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성공한 중년 남자의 표상처럼 보인다. 설이는 이모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곽 선생의 팬이 되어 그를 흠모하고 그를 아빠로 둔 시현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설이가 그의 집에서 목격한 가족의 내막은 밖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곽 선생의 실상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오직 공부 외에는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설이는 곽 선생에게 질문한다. "시현에게 왜 그러셨어요?" 이에 대한 곽 선생의 답변은 우리 시대 모든 부모들이 겪는 모순과 고민을 함의하고 있다. "내 아이니까"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은 '스카이 캐슬'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단단한 권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이 학벌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 자식을 올곧고 자유롭게 키운다는 건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작가 심윤경 자신도 소설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사촌기 자녀의 격렬한 갈등기를 겪느라 6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소설가 이전에 현실 부모로서 녹록지 않은 일상의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다. 자식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5살 아이에게 영어와 한문을 주입시키고, 이곳저곳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니고, 아빠의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기고, 수백만 원대의 사교육을 집행하는 이 정신 나간 광기의 현상이 과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은 부모의 욕망으로 들끓는 용광로와 같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즉 부모로서 자식에게 부어줘야 할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삼 성찰하게 한다. 설이의 이모는 이 작가적 질문의 소설 속 현현이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주어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예뻐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모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과 부모의 이기심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다단한 함수관계에 경종을 울리는 메신저라 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본질적으로 그 어떤 욕망과 이기심도 들어서지 않아야 할 가족의 원형, 참 부모의 진정한 자격, 즉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구성, 재미있는 이야기, 예쁜 문체, 쉽게 넘어가는 호흡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다. 심윤경의 소설은 모든 작품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완결성으로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더욱 농밀하고 밀접한 시선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자녀교육'과 '부모사랑' 사이의 난해한 방정식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는 소설이다. 결코 녹록지 않은 외부의 도전 가운데 자식을 키우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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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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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에 친중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가령 어느 정신 나간 지식인은 "중국은 우리에게 5천 년 우방, 미국은 50년 우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수·당의 역사와 병자호란, 6·25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런 영향 탓인지 미국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둥 G2 시대가 펼쳐졌다는 둥 아우성이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리고 진실을 호도하고 가공한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어떤 수치도 중국이 미국과 동급이 됐다거나 미국의 턱밑까지 도달했다는 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증거만 넘쳐날 뿐이다.

세계에서 국가 GDP와 1인당 GDP 순위가 모두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경제규모 2~5등 국가들(중국, 일본, 독일, 영국)의 1인당 GDP 순위를 보라. 전부 15위권 밖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018년 기준 미국의 국가 GDP는 20조 달러가 넘었다. 단연 부동의 1위이다. 2위 중국과 무려 7조 달러 이상 차이가 난다. 1인당 GDP는 6만 2천 달러로 7위에 링크되었다. 두 가지 순위가 동시에 높다는 것은 많은 걸 함의한다. 경제규모가 크고 인구도 많으면서 국민들은 평균적으로 잘 산다는 의미다.

미국은 인구가 3억이 넘으면서 1인당 GDP가 6만 불이 넘는 괴물 국가다. 근래에는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패권국에까지 등극해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있다. 최소 30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석유와 가스가 미국 땅 깊은 곳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채굴 가능한 에너지의 양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기술력, 군사력, 문화력은 덤이다. 그 힘과 자신감으로 최근에는 무역(관세) 전쟁을 통해 중국에 꿀밤을 주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 기업 'ZTE'는 부도 직전이고 '화웨이'는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다. 미국을 어떻게 중국과 체급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질서를 규정한 소위 '브레튼우즈 체제'는 서서히 종말하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경찰국가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식량과 에너지 문제에서 미국은 완전히 자급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고립주의로 점차 돌아서고 있다. 그에 따라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이럴 때 줄을 잘못 서면 피곤해진다. 미국 손 꽉 잡고 있기도 버거울 마당에 친중이 웬 말인가. 제발 줄 좀 잘 서라. 병자호란의 치욕은 결코 옛이야기가 아니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2월 말 베트남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베트남은 수십 년 전 미국과 참혹한 전쟁을 치렀지만 최근에는 중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미국에 줄을 서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 중 북한과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국의 우방이거나 동맹국 들이다.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미국의 지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극렬한 반대를 강력한 힘으로 잠재운 건 미국의 권위였다. 터키는 미국에 짓까불다가 경제가 작살났고 베네수엘라는 줄 잘못 섰다가 망국이 됐다. 심지어 북한조차도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줄을 서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피터 자이한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은 소중한 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국제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미국은 더 강해지지만 세계는 더 무질서해진다. 미국의 新 패권이 지정학적 조건과 맞물려 기존의 동맹 체제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G2는 없다. 제발 정신 차리고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자. 줄 좀 잘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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