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프롤로그 : 코로나19와 고전(문학)

중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위험한 행동이 되었다. 아이들의 개학은 거듭 연기되고 바깥출입은 금기시되며 직장인들은 자택에서 근무 중이다. 외국 사정은 더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유럽 일부 국가는 80세 이상 고령 환자들의 치료를 포기했고 물리적인 의료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문학이야말로 현실성의 극치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분야이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동시대의 관심과 주제를 껴안는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tvN 독서 예능에서 이 소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영향도 컸다. 주지하다시피 『페스트』는 알제리(프랑스령)의 해안 도시 오랑에서의 전염병 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봉쇄된 채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소설에 묘사된 몇몇 장면에서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너무 흡사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역주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간접 공감의 열망들이 반영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에 코로나19 특집으로 카뮈의 『페스트』를 리뷰한다.

 

⑴ 이야기 (스토리 요약)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각 부는 페스트의 양상에 따라 구분된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랑시(市)에 페스트가 발병한다. 전염이 확산되고 사망이 증가한다. 도시는 봉쇄된다.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사망자 수는 더욱 증가한다. 자고 나면 수백 명씩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다.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급속히 퍼진다. 페스트균을 죽이겠다며 온 마을에 불을 놓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폭동이 일어난다. 혼란을 틈타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다. 지옥과 같다.

 

의사 리유(리외)와 동료 타루 등은 민간 보건대를 만들어 페스트와 싸운다. 도시 밖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불법까지 동원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유와 타루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느끼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그러던 중 실험 중인 페스트 백신 혈청을 맞은 어린아이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의 주검 앞에서 의사 리유가 교회의 신부 파늘루에게 묻는다. "페스트가 신이 내린 형벌이라면 이 아이의 죄는 무엇입니까?" 페스트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파늘루 신부는 리유에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후 신부의 설교는 조금 바뀐다. 얼마 뒤 신부도 페스트―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는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고 1년이 흐른다.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던 페스트균의 매서운 기세도 점차 꺾이기 시작한다. 백신 혈청이 효능을 보인다. 혈청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도시에서 사라졌던 쥐가 다시 나타나고 길고양이의 모습도 포착된다. 페스트가 종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리유와 함께 최전선에서 페스트와 싸운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리유의 동료 그랑은 페스트에 걸렸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다. 도시 봉쇄가 풀어지고 사람들은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동료를 재회한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기차 플랫폼에서 아내를 만나 포옹한다. 리유는 도시 밖에서 지병을 치료해온 아내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⑵ 인물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페스트를 최전선에서 치료하는 의사 리유(리외),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한 타루, 외지에서 건너와 페스트 종식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한 신문기자 랑베르, 소설의 서술자로부터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시의 하급 공무원 그랑, 페스트 확산 과정에서 가장 큰 내적 변화를 겪는 가톨릭 신부 파늘루, 전염병 사태를 즐기며 그 와중에 범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코타르 정도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되겠다. 소설은 서술자의 관점과 등장인물 타루의 기록을 주축으로 뻗어나가는데 소설 말미에 서술자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몇몇 인물에 대해 간략히 리뷰하고자 한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페스트』는 유독 다양한 인간상에 밑줄을 긋는다. 이 소설의 구조가 "무서운 질병으로 인한 참혹하고 극단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몇 가지 인간 군으로 그려낸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역경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사람(저항형), 역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방관하는 사람(방관·회피형), 신의 뜻으로 생각하며 절대자에 의지하는 사람(종교형), 범법을 자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악인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염병의 예기치 않은 심화과정을 통해 일부 인물은 큰 내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다.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은 단연 리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유의 경험과 생각이 소설의 주된 재료가 된다. 서술자는 유독 리유의 사유와 행동에 집중하는데 그 외의 인물들이 모두 리유를 중심으로 얽혀있기에 그렇다. 처음으로 죽은 쥐를 발견하고 감염자의 초기 증상을 검토하여 페스트의 발병을 최초로 짐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종일관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그의 열심과 사명의식은 기자 랑베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랑베르의 회심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랑베르는 "자신과 페스트는 본래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랑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굳건하게 감당하는 의사 리우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결국 랑베르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리유 일행과 함께 페스트와 싸우고 타인을 돕는다.

 

타루와 그랑도 리유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 명이 페스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사들, 소위 '저항형'의 대표자들이다. 타루는 아버지를 차장검사로 둔 금수저 출신인데 과거 아버지가 참여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 과정을 목격한 뒤 사형 반대론자가 되었다. 그는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하며 초반부터 불군의 투지를 표출한다. 리유와 두터운 우정과 신뢰의 관계를 쌓기도 하는데 페스트의 최절정기에 함께 바다에 입수해 수영하는 장면은 굉장히 감동적이다. 자신의 수첩에 일상의 기록을 남기고 그 메모를 소설의 서술자는 자주 인용한다. 서술자의 해설과 타루의 기록은 소설을 끌고 가는 두 개의 축이다. 하지만 타루는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서술자는 그랑을 매우 훌륭한 인간상으로 평가한다. '보건대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자'로 상찬해 마지않는데 선하고 모범적인 보편 시민을 상징하려는 것 같다. 하는 일이 소소하고 눈에 띄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랑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선의를 가지고 페스트와 싸워가는 인물이다. 극한의 대재앙 앞에서 한 명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랑은 잘 대표한다. 리유의 감사 표시에 대해 그랑이 한 다음 답변은 이 소설의 주제를 웅숭깊게 관통한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신부 파늘루는 종교성을 대표한다. 페스트 발현 초기에는 "페스트는 신의 재앙이지만 신이 원한 게 아니다. 세상이 악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발병을 초월적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며 신(하느님)에게 회개해야만 함을 촉구한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파늘루는 동요한다. 그 이후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부른 회중을 '우리는'으로 바꾸어 부른다. 설교자로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신문기자 랑베르와 함께 페스트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큰 심경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페스트를 초월적 관점으로 본 그도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파늘루의 변화와 그가 강조한 종교적(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⑶ 종교]편에서 구체적으로 후술하겠다.

 

거대한 재앙 앞에 선하고 사명감 있는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혼란과 공포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코타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상시에 자살을 기도할 만큼 무기력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가 혼돈에 빠졌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린다.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법을 일삼고 밀수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을 벌인다. 페스트가 수그러들고 도시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니 또다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결국 소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 카뮈가 코타르를 묘사함에 있어 상황과 인물에 대해서만 담담히 전할 뿐 절대로 선악의 가치판단을 독자에게 주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⑶ 종교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신부 파늘루의 설교 장면이다. 파늘루의 설교는 소설에서 총 두 번 소개되는데 첫 설교와 다음 설교 사이에 묘한 온도차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첫 번째 설교는 거침없이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2부 중반에 자리한 파늘루의 첫 설교는 꽤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는 "페스트는 인간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과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마땅한 설교였다. 교회 내부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세상 어떤 것도 신의 의지 밖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 아담과 하와 이래 이 땅의 교회가 세상과 격렬히 씨름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와 씨름하다 죽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합해 있는데 파늘루는 "주님, 이 아이를 구해주소서!"라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는 죽는다. 혈청 주사 영향인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 모습을 보고 리유는 "페스트가 신이 원하지 않는 불행이었다면, 이 어린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파늘루에게 강변한다. 파늘루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다. 결국 그도 페스트로 죽는다. 사실 이런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이 있다. 교회 사제라는 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기독교를 공격해온 논리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후퇴하는 듯한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뮈가 분명한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딱 그것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선한 자가 고통을 받고 악한 자가 성공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의 죽음(부재/비존재)을 주장하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논거도 이 부분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포이어바흐가 그랬고 러셀이 그랬다.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이 부분은 코로나19로 인한 한국의 현재상과도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천지 집단감염 사태와 주일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끊이질 않는다. 절체절명의 대재앙 앞에서 종교(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신에게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문제 군상으로 묶어 조롱하는 형국이다. 신을 믿는 한 성도로서 서글프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 바깥에서 지적하는 '기독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안에서밖에 해결(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신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사이의 인식 괴리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인데, 신은 전염병과 전쟁 같은 재앙으로 인간을 심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기도 했다. 신의 섭리란 공의와 사랑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데 바로 이 부분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비극을 발생시킨다. 기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소화되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즉 안팎 간의 극한의 아이로니컬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현실 기독교인으로서 갖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도전임을 고백한다.

 

 기독교에 대한 카뮈의 부정적인 묘사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부조리의 문제를 종교가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앞서 묘사한 카뮈의 설정은 충분히 논리적이지만 기독교의 절반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른 관점이자 차원이다. 믿음(신앙)의 영역은 그 전제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닐까. 카뮈식 무신론에 대한 내 입장이다.

 

⑷ 카뮈와 부조리

카뮈의 작품세계를 흔히 '부조리 문학'이라고 부른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카뮈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데 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카뮈 전집을 가까이 두고 탐독할 만큼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지만 부조리에 대해 설명할 역량은 부족하다. 철학 전공자를 위시하여 주변의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과 밤을 새우며 깊은 대화를 나눠봐도 부조리를 명확하고 시원하게 해설하는 걸 보진 못했다. 의미의 외연 자체가 상당히 러프할 뿐만 아니라 용어를 사용하는 자의 의도된 모호성까지 추가하면 더없이 난해한 개념이다. '부조리'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소설 『페스트』를 통해 긍정을 다루고 싶었음을 밝힌다. 반면 『이방인』은 부정(否定)을 다룬 소설이며 『페스트』와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고 말한다. 『이방인』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오해」이며, 『페스트』의 편에 서있는 작품이 『반항적 인간』,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다. 카뮈는 부정은 먼저 말했고 그다음 긍정을 말했다. 이러한 시간 순서는 소설 『페스트』의 철학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그것은 외연적으로는 부정과 반항을 다루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명징한 긍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은 페스트의 세력이 약화되고 지옥 같던 오랑시가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는 모습은 카뮈가 말한 부정에서의 긍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맥락이다.

 

이 소설은 1947년에 발표됐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심히 전후 재건사업에 열을 올리는 시기였다. 동시에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지옥 같은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의성 측면에서 '페스트'는 하나의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 시기의 페스트는 곧 전쟁이었다. 6년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쓴 '전쟁 페스트'의 발병은 인류에게 가장 현실적인 지옥의 쓴맛을 맛보게 했다. 다양한 인간상이 있었고 여러 형태의 역설이 존재했다. 현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았다. 부조리했다. 카뮈의 말대로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항시 느끼는 건 그의 소설이 철학과 소설 사이의 적당한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완벽한 소설이면서 철학을 오롯이 담아내고, 하나의 철학서이면서 소설의 구조를 포용한다. 이 기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야말로 카뮈 문학이 가진 마력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뮈가 진정 위대한 것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극단적인 단정(결론)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데 있다. 올바른 철학자의 태도는 "내 말이 무조건 옳다"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 사르트르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카뮈는 이 중용적 지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당시 다수 지식인들이 혹했던 유행병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문체 얘기를 해보자. 카뮈의 문체는 역시 담담하다. 전염병 창궐의 재앙을 묘사하면서도 그 어떤 절규도 명령도 없다. 작가 스스로 서술자임을 거부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건네줄 정도로 객관적이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카뮈의 인물들은 작가와 완벽히 독립적이다. 카뮈 소설의 화자적 특징은 담담하고 묵묵하고 객관적이다. 사실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카뮈식 문체는 불필요한 감정과 비본질적인 사색을 제외한 채 담백하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 『페스트』가 극한의 상황을 그리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읽히는 이유다. 독자는 다른 정서적 낭비 없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페스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천착하게 된다.

 

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소설 『페스트』는 영웅주의와 거리를 둔다. 카뮈 스스로 영웅이라면 질색을 했던 작가다. 주제와 묘사 방식도 거대한 역경을 헤치며 분투하는 인간상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고 인간 승리의 위대한 드라마도 없다. 그런 통쾌한 이야기를 원해서 이 소설을 들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 차단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적 사태에 맞서는 나름의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소설 『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소설의 서술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상으로 묘사한 그랑이라는 인물에게서 찾았다. 페스트에 대항해 그랑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서 늘어난 서류 작업과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전과 달라진 건 근무시간이 늘어나 야근한 것뿐이다.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인데 그 열심에 리유는 감복하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자기 위치에서 사명감을 갖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에 닥친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할 유일한 책무인 것이다.

 

그랑의 모습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오랑시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다.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혼란한 상황을 틈타 마스크를 불법 유통하려다 적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정치인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둔다. 기회주의가 흘러넘친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냉정히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교사는 교사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의사는 의사의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 아이를 살피고, 아이는 아이의 위치에서 부모의 통제를 받으면 된다. 영웅은 없다. 각자 본분을 잊지 말고 자기 일에 전심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올 가능성을 전제한다. 인간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나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궁극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반항하고 저항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반항마저도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 건 아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이다. 인간 한계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은 결국 겸손의 문제로 환원된다. 위기일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간성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페스트가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어 우리의 영혼을 좀먹기 때문이다. 이 경고야말로 카뮈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 에필로그 : 중소기업 영업사원이 맞이한 '코로나19'라는 페스트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오랜 연차의 중소기업 영업사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몇몇 일상을 기록한 글에 종종 내 직업과 이력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전산용품과 모바일 액세서리를 전문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중소기업이다. 거의 대부분의 품목을 중국으로부터 수입(OEM)한다. 할인점을 위시하여 다양한 채널에 공급 판매한다. 1/4분기는 전통적인 시장 성수기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오프라인 채널은 고객이 없어 매출이 급감했고, 중국에서 건너와야 할 품목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품절 대란이 지속됐다. 매출실적은 곤두박질쳤고 지난 3월에는 목표 대비 70%밖에 채우지 못했다. 편차야 있겠지만 당분간 이런 기조는 계속될 것이다. 실적이 곧 인격인 영업사원으로서 존재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일이다.

 

최근 팀장님 주관으로 매출목표 수정회의를 진행했다. 나를 비롯한 전 영업사원들은 원안을 고수하기로 했다. 전대미문의 국제적 전염병 사태를 맞이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매출 목표로 조정(인하)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카뮈의 말을 인용했듯이 현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비합리야말로 현실을 이끌어가는 코드다. 매출목표 조정회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던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부조리한 현 상황을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저항해보기로. 부조리한 내 현실의 '페스트' 앞에서 작정하고 반항할 것을 용단했다. 모험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현실은 항시 불합리와 섞여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그것을 인정하고 용기 내서 부딪혀보려는 것이다. 영업사원이라는 내 위치에서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도전한 것이다. 소설에서 리유와 그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결단이 비단 나만의 선언은 아닐 것이다. 수능 시험에 지장 있는 고3 수험생부터 학원업계 관계자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대표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 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힘을 내 이 난국을 잘 견디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모든 재앙은 결말이 있었다. 코로나19도 반드시 지나간다. 이를 견디는 힘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공감과 연대의식에 있다. 우리 모두 이 지독한 2020년의 '페스트'를 잘 견뎌내자! 바로 그것이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