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 신학연구위원회 지음 / 영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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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바다에 빠져 살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교회에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웨민'을 칭함) 강의를 수강해 끝마쳤다. 강의와 더불어 웨민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 정요석 박사와 스프로울 박사의 해설서를 각 3독씩 병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웨민이 얼마나 풍성하고 엄밀하며 유기적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스프로울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 더 꼼꼼하고, 더 정확하고, 더 철저하고 그리고 더 포괄적인 신앙고백서는 없다.

18개월 동안 웨민의 바다에 빠져 살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강의 프린트와 병독(倂讀)한 해설서마다 번역이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웨민은 밀도 있고 엄밀한 문장을 담고 있어 일부 절을 통째로 외우는 게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해설서마다 번역이 조금씩 달라 어떤 번역본에 방점을 찍을지 고민스러웠다. 같은 교단(예장합신) 안에서 출간된 텍스트가 안정적일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성호 목사(수원 선목교회 담임)가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주로 참조하곤 했다.

교회 웨민 강의를 끝마칠 때쯤 개인이 아닌 총회(예장합신) 차원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음사에서 출간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가 번역을 주도해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까지 웨스트민스터 5개 문서를 모두 담았다. 교단 내에 목사나 교수 차원의 개인적 번역은 많았으나 교단 차원의 공적 번역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략히 책의 몇 구절을 훑어봤는데 번역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긴 문장을 짧고 명료한 단문장으로 변환시킨 게 아주 좋았다.

이 책의 탁월함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신학적 엄밀성을 현대적 번역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앞서 만났던 여러 번역본의 부딪힌 긴 문장, 어색한 표현, 애매한 문장 구조, 비문 등을 없애고 명료한 문장으로 가다듬었다. 불필요한 접속사로 연결해 비대한 문장이 되었던 것을 명료한 단문장으로 나눠서 처리했다. 의미 부여를 위해 쉼표를 적극 활용한 부분도 돋보인다. 특히 기존에 고착된 한자의 신학용어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게 평이한 단어로 바꾼 것은 인상적이다. 가령 '칭의(稱義)'를 '의롭다 하심'으로, '승귀(昇貴)'를 '높아지심'으로 번역했다. 특히 소요리문답은 교회 아이들의 교리 공부에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쉬운 문장으로 번역했다.

이번 번역 작업은 무려 7년에 걸쳐 연인원 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영어 원문뿐 아니라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번역본을 병행 참조했고 조사와 대명사의 사용 적절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문장을 다듬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번역위원으로 참여한 이남규 교수는 나와 같은 교회를 다녔고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역자와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삶과 신학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이 교수는 내 주변 최고의 모범이다. 정요석 목사는 일면식은 없지만 명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를 통해 호감을 가진 바 있다. 내가 지금껏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정 목사의 책은 단연 최고다.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벨탑 사건 이래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번역 작업의 엄존함은 실로 무겁다. 번역은 사람의 작업이기에 흠과 오류가 불가피하다. 이 세상 텍스트 중 하나님에게 직접 영감된 성경 원어(히브리어 구약, 그리스어 신약)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류와 한계가 있다. 또한 시대마다 언어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로교회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을 시대에 맞게 주기적으로 개정·번역하는 작업은 긴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속한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적 번역한 것은 상당한 자부심이라 할만하다. 이 거룩한 자부심 위에 신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놓여 있다.

근자에 장로교회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내세우면서도 성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캠프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강단(하나님의 말씀)보다 '어와나(Awana)'의 시행 여부로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보다 인간의 기호에 목회적 스탠스를 두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단언컨대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반드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신학자 신원군 교수의 말대로 성경과 교리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비루한 시대적 맥락을 직시할 때 예장합신 신학연구위원회의 헌신적 수고로 쓰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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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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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배우 차인표의 첫 창작소설 데뷔작이다. 15년 전 발표한 소설 『잘가요 언덕』을 제목을 바꿔 재출간했다. 차인표는 97년 여름 고국을 떠나 70년 만에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된 훈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며 슬픔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훈 할머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로 끌려갔다. 소설은 그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담았다.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도 양심과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극복해가는 잔잔한 인간상을 그렸다. 올해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의 아시아중동학부 한국학 필수 교재로 지정되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모 예능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하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잡았다. 당시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ㅡ그것도 장편ㅡ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를 써내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당시 연예인들이 이런저런 에세이를 쏟아내는 풍토가 있었다. 이에 책을 읽기 전 차인표 부부의 잉꼬 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간과하기로 했다. 오직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고자 했다. 결론은, 참 잘 쓴 소설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독자의 시공간을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 백호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이다. 세 인물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며 소설은 절정을 이룬다.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소설은 따뜻한 문체로 쓰인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가즈오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깊이 고뇌하고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이다. 소설 전체의 서사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 용이의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이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상징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위에서 서사를 조망해 내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는가 하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작품 속 개입일 수도 있으리라. 소설 말미에 70년 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가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작가 차인표의 또 다른 분신이지 않을까.

작가는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끈다. 만약 존어체가 아니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엇비슷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문체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번민하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깨어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겸손한 문체는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작가적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외적 기능이 된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인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차인표의 첫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성공한 소설의 전형을 두루 갖추었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고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 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언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결국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 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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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 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정요석 지음 / 크리스천르네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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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신앙서적을 만났다.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Ⅰ·Ⅱ』는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후 '웨민'으로 칭함)를 주해한 해설서다. 웨민 해설서는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다. 로버트 쇼나 R. C. 스프로울의 책을 필두로 국내 출간된 해설서만 수십여 권에 이른다. 단언컨대 지금껏 내가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최고다. 깊고 풍성하고 은혜롭다. 사역자와 평신도, 학생과 성인 모두를 아우를만큼 폭넓은 수준으로 쓰였다. 웨민을 딱딱한 교리적 관점을 넘어 우리의 삶까지 적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런 귀한 책을 왜 이제서야 만났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주지하다시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1647년 영국에서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경건과 학식을 겸비한 121명의 목사와 신학자, 귀족과 하원의원 등 159명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minster Assembly, 이하 WA)가 5년 8개월간 기도와 금식을 동반한 마라톤 회의와 충분한 숙려 끝에 완성했다. 문장 하나하나 매우 신중하게 다듬고 수정하여 처음부터 아예 논쟁을 배태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게 현대 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미국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표준 문서로 지금까지 채택되어오고 있다.

교회에 새롭게 부임한 담임목사님 주관으로 웨민 교리 공부를 하던 중에 보다 깊은 흐름을 통찰하고 싶었다. 웨민 신앙고백과 소요리 문답은 이미 오래전 수차례 훑어본 교리서라 색다를 건 없었으나 무언가 '깊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령 삼위일체와 예정론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평소 내 삶과 언어에 어떻게 녹여내는가에 대한 방법적·언어적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즉 뜬구름 잡는 신학 교리가 아닌 삶과 신앙의 실제적인 적용을 원했다. 이런 내 갈증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는 적확했고 탁월했다.

2권으로 구성된 책은 웨민 33장을 매우 자세히 살핀다. 1권은 '14장 - 구원하는 믿음'까지 다루고 2권은 이후 33장 끝까지 다룬다. 각 항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떼어내 깔끔한 개혁주의적 해석과 일반 신자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와 설명으로 주해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신앙고백의 문장 독해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웨민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인성)을 다룰 때에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연합되었다"는 문장의 주석 외에도 테스토리우스의 두 인격과 유티케스의 단성론의 문제점, 그리고 교리 논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함께 다룬다. 그럼으로써 '칼케돈 공의회(451)'의 교회사적 유의미성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이 책의 또 다른 탁월함은 각 장을 다룰 때 연관성 있는 다른 장·항을 수시로 인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설명 방식은 웨민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유기적이고 통일성 있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해당 장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기술적 장치가 된다. 예컨대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론의 논리적 서정을 다루면서 '3장 - 하나님의 작정'과 '8장 -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 항들을 수시로 인용·반복하는 것이다. 독자는 전체에서 부분을 들여다보는 '전체 성경적' 안목을 고양할 수 있고, 매장마다 수시로 소환되는 앞선 장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교리 공부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근거 성경 구절을 직접 수록해 성경을 찾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은 덤이다.

두꺼운 책을 정독하면서 "교리가 이토록 은혜로울 수 있구나" 하는 감동과 도전이 적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은혜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교리 학습은 앎의 영역을 넘어 실천의 차원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조차도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걸 알려주기에 주변에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을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나를 올려놓는다. 모든 게 예정되어 있어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한 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래서 나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각성시킨다. 자만과 교만은 줄어들고 겸손과 섬김이 증가한다. 교리가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근자에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고집하는 장로교회에서도 신자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 학교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교회는 양적 부흥을 위해서라면 일단 온갖 이벤트를 다하고 본다. 하지만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더욱이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항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신앙)은 성경->신조->신학->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장로교 신자 중에서도 '이중예정'이나 '제한속죄'와 같은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분들이 꽤 있다. 가령 제한속죄는 도르트 신조가 결의한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하나로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과 함께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교리다. 이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간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가해한 신정론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민은 신론(2~5장)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방식(2장)을 다루고 그 후에 작정과 섭리(3~5장)로 넘어간다. 웨민은 그만큼 성경의 완벽함과 신자의 부족함 사이를 잘 가늠한다.

신천지나 알미니안이 요동치고 있는 혼탁한 시대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존재는 귀하다. 나는 목사, 장로, 집사뿐 아니라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 모두, 즉 구역장과 교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순종할 것에 선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고약한 사조가 교회 안까지 침범해 참된 진리를 허물어뜨리려 하는 세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이럴 때 성경을 붙잡고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그 거룩한 컨택의 건강한 안내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풍성한 강해서로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가 놓여 있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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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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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인 줄 모르고 구독했다. 원래 책을 읽기 전에 사전 검색을 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 작가의 에세이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저 그렇고 그런 소소한 이야기 모음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 예루살렘에 간다고. 아차 싶었다. 그제야 책 표지가 보였다. 황량한 사막 위에 솟은 성스러운 교회 사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굉장히 감동적인 에세이다. 공 작가가 이렇게 산문을 잘 썼나. 오래전부터 작가의 팬이었지만 나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왔다. 조금은 냉정하다고나 할까. 소설가로서 공지영은 인정해도 산문가로서 공지영은 쉽게 인정 못했다. 픽션과 논픽션을 풀어내는 작가의 '글결'이 다르다고 봤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 에세이는, 너무 좋았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공지영의 예루살렘 순례기이다. 작가는 수년 전 모든 sns 활동을 접고 서울을 떠나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 정착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 배경이 된 후 '문학의 성지'처럼 여기던 곳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작가로서의 존재론적 균열에 빠진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던 어느 날 한 후배의 부고를 접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동경해온 예루살렘 순례 길을 결심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작가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기에 가능했지만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작가는 요르단 암만을 시작으로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쿰란, 나자렛, 베들레헴, 예루살렘 등을 차례로 순례한다.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죽음, 부활의 역사를 훑는다. 국경을 이동할 때마다 예수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쟁 지역의 삼엄함을 목격한다. 여러 성소를 방문해 걷는 동안 성경을 묵상하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포갠다. 작가에게 예루살렘의 글라라 수녀원은 특별한 곳이다. 그곳은 안정된 수도자의 길을 버리고 오직 예수를 닮고자 했던 샤를 드 푸코 성인의 흔적이 담겼다. 작가는 푸코 성인의 삶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추적한다.

작가의 대표 에세이 『수도원 기원 Ⅰ·Ⅱ』의 계보를 잇는 듯하지만 결은 다르다. 두 책 모두 기독교(가톨릭) 신앙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다만 『수도원 기행』이 외부로부터 제안받아 기획되어 기행문 콘셉트가 강한 반면 이 책은 자전적 성찰에 더 방점을 두었다. 작가 스스로 그렇다 할 동기 없이 무심코 떠난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글쟁이로서의 존립 위기의 한가운데서 출발한 순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전보다 더 자유화한 작가적 고백과 성찰이 돋보인다. 미혹적 문장이 이끄는 울림이 대단하다. 완성형 에세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작가는 한없이 낮아지는 자아의 현존을 느낀다. 작가가 전 인생을 통틀어 깨달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예루살렘에서 더욱 명징하고 밀도 있게 받아들인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이 알고 믿은 것이 실상 거짓과 위선에 가려져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안 충격은 비단 작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 작가의 통찰을 재청한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믿음의 대상은 오직 신밖에 없다는 것을.

15년 전이다. 작가와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직접 만나 보니 '현실에 제법 화나 있는 여성 작가'란 아우라가 분명 있었다. 동시에 '작가라는 존재는 타자와 세계를 극히 세밀하게 바라보는구나' 하는 이미지도 강렬했다. 누구나 부조리를 안다. 비정의와 불공정을 목도한다. 못마땅하고 바꾸고 싶다. 하지만 들춰내기에 피곤하고 당장 이익이 되지 않기에 대부분은 그냥 넘어간다. 특별한 개입이나 혁명적 행동이 없는 한 이 세계ㅡ큰 사회이든 작은 조직이든ㅡ의 조악함과 비루함은 일반 사람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다르다. 작가는 독자보다 불편하고 예민하다. 조명하고 들춰낸다. 아니 들춰내고야 만다.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소설가 조정래의 말처럼 그들은 현실을 비틀어 더 생생한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때 나는 소설가 공지영에게서 그걸 생생히 느꼈다. 그리고 그해에 소설 『도가니』가 출간됐고 이듬해 그녀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의 제목을 생각한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얼핏 보면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책을 읽은 사람은 안다. 외로움이 부정적인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걸. 외로움은 독특한 상태다.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꼭 필요한 무언가이다.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어떤 내적 체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자유를 관통해야 하듯 신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히 외로움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이 외로움이 가진 거룩한 비밀이다. 참된 고독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공지영의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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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무선)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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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의 풍파를 이겨낸 검증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동화에도 고전이 있다. 『어린 왕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같은 책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특별한 동화가 한 권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을 당시 진지하게 탐독했던 것만큼은 선연히 기억한다. 이후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1972년에 출간되었다. 지난 50여 년간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이 팔려나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올해 나이 아흔둘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반전, 환경, 여성 운동을 아직까지도 열심히 하고 있는 행동주의 작가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한다면 폴러스는 그 가장 적확한 본보기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애벌레 기둥에서 만난 두 애벌레가 고치를 지나 나비에 이르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처음부터 두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길을 알았던 건 아니다. 애벌레 기둥에 올라섰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애벌레를 보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두 애벌레는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생각이 달랐고 가는 길이 달랐다. 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으로 향하고 노랑 애벌레는 홀로 남는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번데기)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걸 노랑 애벌레는 알게 된다. 결국 노랑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는 기둥 높은 곳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호랑 애벌레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나비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안내한다. 노랑나비의 인도에 따라 기둥을 내려간 호랑 애벌레는 노랑나비와 마찬가지로 고치의 과정을 통해 호랑나비가 된다. 둘은 함께 하늘을 훌훌 날아오른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그만 애벌레의 모습이 고단하고 남루한 우리네 삶의 현실을 오롯이 은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건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인간에게 효율과 경쟁만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일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시기다. 누군가를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나 정작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이기는 것에 결핍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경쟁은 세상을 윤택하게 하나 우리를 구원해 주진 못한다.

영업 경력 20년 차다. 지금 회사에서만 18년을 보냈다. 회사 인트라넷에 영업사원별 달성률이 전면에 배치된다. 치열히 경쟁했고 도전받았고 자극받았다. 경쟁과 실적은 나를 나 이상으로 만들었지만 때로는 나를 나 이하로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경쟁에 끝은 없다는 것을. 정상은 누군가를 밟고 이김으로써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라 도달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책 속에서 현자(賢者)와 같이 등장하는 애벌레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어요"라는 노랑 애벌레의 질문에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만큼 날기를 절실히 바랄 때 이루어진단다"라는 멋진 조언을 남긴 것이리라.

또 하나의 감상이 있다.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지만 정작 책에는 꽃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벌레에게 희망을'이나 '나비로 나아가는 희망을'이 맞는 제목 아닌가,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근데 지금은 그 꽃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즉 나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 속에서 약동하는 애벌레나 변이를 완성한 나비의 모습에 심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꽃이란 존재에 있다. 나비의 행복은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닌 꽃을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꼭대기의 무의미함이 아닌 꽃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에 인간 삶의 궁극이 있다. 우리가 꽃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단순한 이야기와 가벼운 스케치의 그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준다. 읽을 당시 나이에 맞는 느낌과 감동이 전달된다고나 할까.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렇다. 소년 때에는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자체에 환희했다. 청년 때에는 두 애벌레 사이의 사랑에 감격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나비가 되는 것의 본질을 궁구했다. 노년이 되어서는 또 어떻게 읽힐지 자못 기대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내가 이 짤막한 동화를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읽게 된 이유다.

유튜브 영상을 기획하는데 함께 일하는 정 PD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추천하자고 권했다. 어떤 책을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책장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책장을 연 순간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누군가에 의해 선물 받은 책이라는 것을. 정갈한 손 편지로 쓰인 문구가 당시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내 모습과 오버랩됐다. 이후 기나긴 고치의 과정을 겪었던 내 젊은 시절의 드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기분 좋은 기억의 복기가 책이 주는 감동과 혼합되어 내 눈가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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