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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평점 :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배우 차인표의 첫 창작소설 데뷔작이다. 15년 전 발표한 소설 『잘가요 언덕』을 제목을 바꿔 재출간했다. 차인표는 97년 여름 고국을 떠나 70년 만에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된 훈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며 슬픔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훈 할머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로 끌려갔다. 소설은 그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담았다.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도 양심과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극복해가는 잔잔한 인간상을 그렸다. 올해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의 아시아중동학부 한국학 필수 교재로 지정되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모 예능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하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잡았다. 당시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ㅡ그것도 장편ㅡ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를 써내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당시 연예인들이 이런저런 에세이를 쏟아내는 풍토가 있었다. 이에 책을 읽기 전 차인표 부부의 잉꼬 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간과하기로 했다. 오직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고자 했다. 결론은, 참 잘 쓴 소설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독자의 시공간을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 백호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이다. 세 인물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며 소설은 절정을 이룬다.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소설은 따뜻한 문체로 쓰인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가즈오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깊이 고뇌하고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이다. 소설 전체의 서사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 용이의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이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상징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위에서 서사를 조망해 내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는가 하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작품 속 개입일 수도 있으리라. 소설 말미에 70년 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가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작가 차인표의 또 다른 분신이지 않을까.
작가는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끈다. 만약 존어체가 아니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엇비슷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문체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번민하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깨어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겸손한 문체는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작가적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외적 기능이 된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인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차인표의 첫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성공한 소설의 전형을 두루 갖추었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고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 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언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결국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 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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