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상 평전
고은 지음 / 향연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약 한 봉지와 물 한 보시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하듯이 망하렵니다. - '슬픈이야기' 중에서 -
점심 후 졸여 깜박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밖은 어둡고 봄비가 쏜살같이 내린다. 곧 밤이 올듯 사방은 어둡다. 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은 불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다. 떨어진 벚꽃잎이 도로위를 구르다 이내 젖어 바닥에 붙는다. 지난 눈싸리기와 낙엽은 봄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 양림동에 가자. 근대의 시간이 머문 거리로. 유년의 젖냄새와 지금도 살아 있을 '해경'을 만나겠지.
세상의 수 많은 일 또는 스토리 중, 그 일부를 크로즈업 시켜보면 단순하면서도 어리석다. 한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무심히 그의 곁을 지나다 맞은 편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분명히 들어나게 했다. 혹시 XX고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하려고 머뭇거리는 순간을 앞질러, XX이 아니냐? 그는 당황했다. 내 몸을 그의 곁으로 돌리면서, 나도 XX고 졸업했는데, 반갑다. 그의 얼굴은 면도를 몇 일 않은 듯 덥수룩 했다.
그는 35년전 '해경'이었다. 술은 그의 몸속에서 향수같이 피여났다. 그는 항상 현실과 상식으로부터 유리되어 살았다. "해경"은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을 비하시키며 그곳으로부터 무책임하게 의식의 상위에 떨어진 자신의 사고 테크닉에 몰입되어 있었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 폐쇄되었다. - '권태' 중에서 - 1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