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 창조과학 A to Z 1318 시리즈
김재욱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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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나?

 

이에 관한 답은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창조론’과 신의 존재로서 답을 찾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는 ‘진화론’이 있을 것이고, 이 두 가지의 시각 중 어느 한 가지의 시각을 선택하거나 두 가지의 시각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윈으로부터 시작한 ‘진화론’의 시각을 받아들이고 있고, 일부 종교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인해서 ‘창조론’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창조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진화론’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동안 단순히 ‘신이 세상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에 적힌 글자 이상의 논의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던 ‘창조론’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최근 들어서 진화론의 이론적 난점들과 취약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영향력과 보다 과학적인(것 같은) 논리성을 갖고 있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라는 시각으로 창조론의 입장에 무게를 두려고 하고 있다.

 

이런 의도로 출판된 ‘1318 창조과학 a to z’는 최근의 ‘창조론’이 갖고 있는 시각이 어떤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일 것 같다. 아직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이런 책부터 읽게 되었다는 점이 읽어야 하는 순서가 많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는 뭔가 그럴 듯한 인상을 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이 인간을 그리고 모든 것들을 말 그대로 관장하고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입장과 크게 색다를 것은 없다.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랄까?

보다 ‘창조론’의 시각에 논리력을 부여하고 있고, ‘진화론’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신의 존재와 그 전능함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다.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자연과 인간 등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혹은 자연발생으로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신을 부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과학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성경의 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나 성경이 갖고 있는 부족한 설명을 보다 과학적인 논리를 갖도록 하고 있는 이런 입장이 미국의 보수적인 지역에서도 크게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시각이 한국에서도 보여진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의외인 기분이었다.

 

‘창조과학’의 입장이 자신들의 시각이 옳다는 신념을 넘어서 ‘진화론’과 그리고 그와 같은 ‘과학적인 입장’을 혹은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또는 신의 전지전능함에 의문할 수 있는 입장을 마귀와 악마의 간교로 말하고 있고 그들은 죽음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면 이들의 시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과학적이라고 하지만 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고 있는 과학만이 과학이라고 말하고 있고 나머지는 마귀들의 수작질로 바라보고 있다.

진화론의 몇몇 이론적 문제점을 파고들고 있지만,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에는 관심이 없고 다윈의 그리고 당시 시대의 관점만을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엉뚱한 느낌도 갖게 된다.

 

창조과학도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갖고 모든 것을 풀어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과학은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기독교가 얼마나 폐쇄적인 시각을 갖게 될 때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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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소중하다 - 한 뉴요커의 일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서동수 옮김 / 세미콜론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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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항상 뒤늦기 마련이다.

그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지나간 뒤에야 얼마나 감미로운 순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해서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욱 그 순간의 잔향은 남겨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잃게 된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진정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나는 무언가를 잊고 있을 것이고,

그 잊고 있음으로 인해서 잃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무언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서야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의 저자 대니 그레고리에게 닥친, 그리고 그의 아내 패티에게 닥친 불행은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 속에서 함께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만드는 사건이었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때까지와는 조금은 달라진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다시금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아가게 된다.

 

그들에게 놓여진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서

불행은 고민을 만들고,

고민은 좌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좌절은 깊은 번민에 빠지게 하지만

결국 그 번민을 받아들이게 되고,

익숙해지고,

그것은 일상이 된다.

그리고... 그건 그저 그런 일이 되어버린다.

 

저자 대니 그레고리는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그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게 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고, 그 시선으로 본 자신의 삶과 주변만이 아니라 뉴욕에 대한 풍경까지 담아내고 있다.

 

잘 그렸다고 말하기 보다는 개성 있게 그렸다고 말하게 되는 그림들과

가볍게 읽히지만 때로는 책장을 덮고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기게 되는 글들은 순식간에 읽혀지는 책이지만 좋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여운 속에서

난 내가 잃게 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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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재탄생
김상환.홍준기 엮음 / 창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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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라깡, 무의식의 시대를 열다

 

[제1부]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

[제1부]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 : 프로이트 · 라깡 정신분석학 : 이론과 임상

 

 

 

인문학 혹은 정신분석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끄 라깡 / 자크 라캉’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뿐이지 그의 이론과 논의에 접근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의 글도 어렵지만 그에 대한 글들도 지나칠 정도로 난해하게 설명을 하고 있고, 때로는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로 라깡과 관련된 글들은 ‘난해함과 어려움’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각각의 연구자와 소개자들이 용어도 제대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의 연구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깊이 있게 가져가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논의를 확장하고 있을 뿐인 것 같아서 더욱 어렵게 느껴지고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화려한 느낌이 들고, 흥미롭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읽고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머뭇거리게 되고, 정신분석인데도 실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 적용되기 보다는 지나치게 이론적으로만 혹은 정신분석 외적으로만 논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는데, 어쩐지 ‘멋지기만 할 뿐인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고 아마도 이런 기분은 그동안 ‘라깡의 논의’를 접하기 보다는 ‘라깡의 논의에 대한 논의’만 읽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오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라깡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최소한 어떤 순서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그의 논의를 파악해야 수월한지를 알려줄만한 연구자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관심을 말 그대로 관심으로 끝냈어야 했고, 한동안 관심을 갖다가 쉽게 잊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국내에 라깡에 대한 각종 참고서들은 많이 출판되었지만 그가 써낸 글이 번역된 것은 단 두 권뿐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한국의 인문학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혹은 폐쇄적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학자들과 각종 문화평론가들이 라깡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들게 되는 생각은 ‘이렇게 라깡에 대한 글들이 많은데 어째서 단 한권도 제대로 번역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뿐이라면 이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라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라깡의 재탄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쓸데없는 불평을 먼저 하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라깡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지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이고, 라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국내 연구자들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자신감을 갖고 펴냈다는 ‘라깡의 재탄생’을 읽으며 들게 되는 생각이 기쁨 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는 뜻이다. 그의 저서를 한국어로 접하지도 못하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그의 이름을 내건 학회까지 있으면서 말이다.

 

최근 들어서 수많은 분야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혹은 유사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비교하거나 연결하여 연구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으면서도 그의 주저라고 볼 수 있는 ‘에크리’조차 여전히 번역 중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조금은 우회하는 방법으로 라깡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누구도 제대로 라깡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라깡과 관련된 몇몇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개론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의 가장 뛰어난 해석가라고 볼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도 많이 출판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게 되는 것 같다.

 

라깡의 전반적인 논의를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라깡의 재탄생’에 수록된 홍준기의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 -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반가운 내용일 것이고, 라깡을 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놓치기 아쉬운 글이 될 것 같다. 라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라깡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는지 (그나마) 알기 쉽게 이해시켜주고 있고, 라깡에 대한 글들을(혹은 책들을) 접했던 사람들도 라깡의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을 (다시 한번) 이해할(재검토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어렵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라깡이 어떤 의도를 갖고 프로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딛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라깡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순서대로 알려주고 있고, 그가 어째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했는지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면서 그의 이론적 핵심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와 ‘언어학(기표와 기의)’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이론에 도입했는지 그리고 항상 강조하던 ‘욕망과 향유’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그동안 국내에서 지나치게 이론적인 부분에만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간과되었던 임상적인 부분까지 라깡의 논의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한때는 들뢰즈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온 사방에서 들뢰즈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그에 대한 논의가 쑥 들어가고 대신에 요즘에는 슬라보예 지젝과 (덩달아) 라깡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라깡의 ‘세미나’가 번역되기도 해서 라깡에 대해서 그리고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보다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라깡거리고 지젝거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라깡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혹은 관심을 갖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보다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좋은 연구서들이 그리고 번역서들이 출판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부탁이며, 요청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기 때문에 책의 제목인 ‘라깡의 재탄생’은 지극히 불만스러운 느낌을 갖게 만든다. 라깡은 한국에서는 탄생조차, 제대로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 : 1. 아직은 이해의 폭이 좁아서 2부와 3부에 대해서는 읽지 못했고, 아마도 한동안은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는 2부의 내용들과 같은 ‘라깡과 관련된 깊이 있는 논의들을’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래도 미정일 것 같다.

2.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라깡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글들을 읽은 다음에 그의 논의들을 접하는 방법이 가장 쉬운 방식일 것 같다.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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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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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준 사람은 신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경험을 했다고 말을 했고, 그 영적 체험으로 인해서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진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주었다.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신이 있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딱히 수긍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부탁이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선물로 건네받은 책을 그냥 묵혀둘 수는 없어서 건성으로 읽게 되었고, 부드럽게 들려주고는 있지만 전혀 동의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은 글이었지만 그래도 읽기는 읽었다.

동의를 하지 않는다고 모든 내용이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글들일 것이고, 건전한 삶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귀중한 말을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C.S.루이스는 국내에서는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판타지 소설가로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소설가를 넘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이고 흔히 말하는 ‘지성인’으로 불린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종교적인 성향의 글을 많이 발표했고, ‘순전한 기독교’도 그의 종교적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저작으로 알려졌다.

 

그의 글은 처음 접했고,

이런 성향의 글도 처음 접했기 때문에 특별한 비교를 할 수 없겠지만 읽다보면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과 쉬운 예를 들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를 떠나서 꽤 인상적인 글이었다.

 

C.S.루이스의 말대로 나와 같은 사람은 때때로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기만 할 뿐인 지극히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딱히 관심을 갖고 읽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글들이 있어서 읽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었다.

물론, 재미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논의는 대체적으로 믿음은 있지만 믿음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시각을 갖고 있거나,

하나님 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상투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젊잖게 대응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논리와 대응이라는 것이 조금은 핀잔을 주고 싶은 생각도 들게 만든다. 그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그 전제에 맞게 논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인 신이 존재하고 그건 이러저러한 비유를 통해서 혹은 몇 가지의 예를 들어서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한 다음에 신이 존재하고 있으니 어떤 삶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혹은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논의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너무 말끔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서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최대한) 보편적인 시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끔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시키고 있다.

 

각각의 종파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기독교도들이 대체로 수긍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시각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도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을 지식을 전달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그는 독려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글을 읽게 된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보다 자신감을 갖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나와 같은 사람은 그의 글을 읽어도 도통 믿음을 갖게 되지도 않고 있고,

아마도 계속 이렇게 지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일정부분 실패를 한 것 같다.

그가 이 글을 쓴 의도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 내부에서만 읽혀지지 않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갖도록 만들려는 것이 글을 쓴 목표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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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론 밀리터리 클래식 3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류제승 옮김 / 책세상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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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단지 정치적 교류의 일부에 불과하며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즉,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상이 높아지고,

그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책은 읽기가 쉽지는 않은 책이고 흥미로움보다는 어려움이 앞서게 되기는 하지만 읽으면서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더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책에 대해서 고전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고, 그렇게 부여된 많은 책들 중에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처음 출판된 이후 책에 대한 위상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고, 더 많은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

 

생각해 본다면 19세기의 독일은(아마도 당시의 명칭은 프로이센이었으리라) 무언가 정신적인 폭발이 이뤄진 시기였다. 클라우제비츠와 동시대를 살아간 헤겔은 철학을 통해서 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세계에 대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고,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는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분야인 전쟁이론을 통해서 이전 시대와 결별을 하고 있었다.

 

‘전쟁론’은 어떤 의미에서든 매우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에 갖고 있는, 그리고 지금도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우쳐주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그리고 정치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시대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도 제공하고 있다.

 

꽤나 난해한 내용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논의의 핵심은 전쟁이 단순히 국가 간의 혹은 집단 간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정치적 연장선에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그런 의미로서 전쟁의 본질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전략과 전술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근대사회로 되면서 이전 전쟁과는 확연하게 다른 국민 전체의 참여가 이뤄지며 전쟁의 양상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1장 ‘전쟁의 본질’과 8장 ‘전쟁계획’에서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군사관련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몸을 담고 있지 않다면 다른 부분은 건너뛴다고 해도 이 부분만큼은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 외의 장들에서는 실제 전투와 전쟁 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지식이 없다면 꽤 난해하게 다가올 것이고, 몇몇 부분들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글라우제비츠의 논의는 전쟁에 대한 그리고 정치에 대한 시각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고, 전쟁과 정치 그리고 전쟁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에 대한 가정 적절한 평가는 전쟁을 단순히 전쟁으로만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전쟁 외적인 부분을 전쟁에 대한 중요한 요소로서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일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내용이 매우 논리적인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논리력을 높이려는 사람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치밀한 구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면서 이론의 중요성과 그 이론이 어떤 시각을 담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꽤 의미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클라우제비츠의 통찰력 있는 시각과 그의 정치와 전쟁에 대한 풍부한 시각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지만, 19세기의 시대에 대해서도 무언가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급속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정치적인 근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인 변화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와 글과 같이 어떠한 것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시각이 갖고 있었던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거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것들을 숨이 막힐 정도로 세분화 시키고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고, 끝없이 정교하게(즉, 이론화시켜) 다듬으려고 노력하던 풍토에 대한 증거나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분야가 보다 발전하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이론화와 체계화로 생각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매우 체계적/논리적이면서도 하나의 이론을 혹은 시각을 갖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논의는 단순히 전쟁에 대한 이론만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그는 직접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이고,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라는 시기적인 구분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보다 관심을 갖고 그가 살아가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신적 풍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전쟁론’을 읽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고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클라우제비츠의 시각과 논의는 큰 흥미를 끌게 만든다.

 

참고 : 전쟁론에 대해서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책을 읽지도 않았거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문장만 관심을 갖고 논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논의를 그렇게 엉성하게 자신의 논의에 연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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