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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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칠 정도로 인상적인 제목인 페터 한트케의 ‘페털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몇 번 들어보았을 제목일 것이고, 제목만 기억날 뿐이지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을 법한 책이기도 할 것이다.

 

제목도 인상적이고,

분량도 짧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펼쳐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짧은 분량임에도 쉽게 읽혀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글이 어렵게 읽히거나 번역이 잘못되지도 않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렵게 읽게 된 이유는 아마도 글 자체가 매우 갑갑한 기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페터 한트케는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로도 유명하고,

언어학자가 쓴 소설처럼 생각될 정도로 지속적으로 언어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고 있고, 끝없이 단어들로 내용이 구성되도록 만들어서 글을 읽는다는 기분이기 보다는 단어들을 모은 하나의 덩어리를 읽는 듯한 기분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그나마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보다 이야기 구성에 신경을 쓴 작품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에 읽어나갈 수 있었지 만약 그의 초기작을 읽었다면 혹은 이 작품이 초기작과 같은 글쓰기였다면 아마도 책을 읽기 보다는 집어던지려고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표정한 느낌으로 건조한 시작을 보이고 있고,

그 시작과 함께 내용은 작품의 끝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가끔은 단락을 구분하여 조금은 숨고르기를 했으면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주인공 블로흐를 비롯해서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건조한 느낌만 전달하고 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대화라고 말하기 보다는 혼잣말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고 있다. 내용에서 뚜렷한 끊어짐을 만들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도록 만들어놓고 있어서 읽는 동안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고, 벽으로만 가득한 미로와 같은 공간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상사의 눈짓을 통해서 해고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대로 사무실에서 나와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블로흐에 대한 3인칭 시점을 갖고 있는 소설이지만 블로흐의 심리에 대한 집요한 묘사를 통해서 이 작품이 과연 3인칭인지 블로흐 개인의 시각인지 헷갈리게 만들게 되기도 한다.

 

블로흐의 정서적인 불안과 언어적인 장애 또는 정신적인 문제를 드러내면서 그의 심리를 그리고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는 ‘페널티킥...’은 그의 불안한 여정을 쫓으면서 이야기는 혼란스럽게 흐르다가 갑작스럽게 살인이 일어나거나 시체를 발견하는 등 느닷없이 돌발적인 상황을 만듦으로써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엉뚱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블로흐가 극장으로 향하고 있고, 극장에 가서야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 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의 모습을 통해서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갑작스러운 사회의 변화 속에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전직 축구 선수라는 설정과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축구만 했던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도 결국 ‘독일의 재건’이라는 은유로 읽혀질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버림받게 되었다는 혹은 그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가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겉돌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번역자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있어서 이 작품은 생각보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블로흐는 지속적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혹은 만남을 위해서 전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고, 만남을 노력하지만 그는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작품은 끝을 맺는데, 작가는 이 과정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을 통해서 읽는 사람을 압박하고 있고, 그 압박에 누구라도 제대로 된 대응을 보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모든 사물을 뚜렷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대략적인 윤곽으로만 묘사를 하고 있고, 애매하게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몽환적이면서도 폐쇄적으로 느끼도록 만들고 있는데, 마치 열기가 넘치는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고 더운 여름에 낮잠을 자다 악몽을 꾸게 된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든다.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불규칙적이고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고 있고, 느닷없이 사건이 일어나거나 블로흐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거나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무시되거나 그가 다가가는 순간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부분적으로 카프카를 의식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러기에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언어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성격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페널티킥...’은 읽는 동안 질식할 것 같은 갑갑함만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더욱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뚜렷한 결론 없이 끝을 맺는 마무리로 인해서 읽은 다음에 들게 된 생각은 다시 한번 더 읽게 된다면 호흡곤란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만 들게 되지만 분명 의미심장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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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계속된다 동문선 문예신서 294
조르주 뒤비 지음, 백인호 외 옮김 / 동문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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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학계의 거장 중의 거장인 조르주 뒤비의 회고록 ‘역사는 계속된다’는 그의 학자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얼마나 광활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어떤 시각과 생각으로 연구에 임해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알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회고록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잊을 수 없는 추억들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들에 대한 감수성 어린 회고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온갖 별 것 아닌 경험들까지 산만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일반적인 회고록과는 달리 그와 같은 방식에 대해서는 조르주 뒤비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고, 그는 중세시대에 대한 탁월한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한명의 연구자로서 자신의 과거의 연구 과정과 성과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뒤돌아보고 있고, 그 회고와 재검토를 통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고록이기 보다 그동안의 연구 과정과 성과에 대한 에세이처럼 느껴지게 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연구자로서의 길을 회고하며 앞으로 어떤 영역에 집중을 해야 할지를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연구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던 부분들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르주 뒤비는 국내에서도 마르크 블로흐(또는 블로크), 페르낭 브로델, 자크 르 고프와 같은 아날 학파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연구 성과가 갖고 있는 탁월함과 함께 방대한 영역에 대한 그의 결과물로 인하여 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자신이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방대한 연구 영역 중 관심을 갖게 된 주제와 지도 교수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주제에 맞게 어떤 자료(그는 ‘자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했는지 알려주고 있고, 그 과정을 몇 년에 걸쳐서 지루할 정도로 하나씩 채워가며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한국 대학원 과정과는 확연한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본인으로서도 운이 좋았다고 자평하기도 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연구를 정진하였다는 점에서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이후의 내용에서는 교수 자격을 취득한 다음 어떤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의 연구를 진행시키게 되었는지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면서 보다 더 다양한 영역의 연구자들과 그리고 그들의 결과물들에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 주고받은 영향 속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에 대한 본인의 간략한 평가와 함께 어떤 영역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조르주 뒤비는 학자로서의 영역에 한해서만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과연 그런 모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조금은 실망스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연구 업적과 함께 그 과정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중세 시대의 고문서를 어떻게 해석했고 그 해석에 따라 어떤 분석을 해냈는지에 대한 사례까지 들려주는 그의 세심함에 감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미에서 앞으로 어떤 영역을 자신의 목표로 둘 것인지와 어째서 그런 목표를 갖게 되었는지를 들려주며 최근의 시대적 변화(컴퓨터의 등장, 대중매체의 활용에 대한 논의 등)에 어떤 식으로 활용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재의 프랑스 대학 교육과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함께 교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기본적으로 교수 사회가 갖고 있는 ‘봉건적’ 또는 ‘장인과 도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인데, 이 비판도 결국 과거의 영향에 따른 문제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구조가 지속성을 갖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와 그리고 아날 학파의 관점에서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르주 뒤비는 간결하게 자신의 그동안의 업적과 연구 과정을 들려주고 있으면서, 그에게 영향을 준 마르크 블로흐나 페르낭 브로델 등의 영향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 칭송을 조르주 뒤비 또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의 회고록을 읽게 된다면 이 의견에 대해서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리고 탁월한 연구자인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내용이다.

그는 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지만 그 담백함 속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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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전예원세계문학선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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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셰익스피어는 명성에 비해서는 전반적인 작품세계가 다뤄지기 보다는 몇 개의 대표작만이 조명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실제로도 그의 4대 비극과 같은 작품들만 끝없이 출판되고 읽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외의 작품들의 경우는 번역되거나 찾게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는 한명의 작가에 대해서 대표작만을 보고 판단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지 전반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은 갖게 되지 못한다는(혹은 안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뭔가를 읽을 시간이 많이 부족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읽을 생각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잘나가는 것들만 번역해서 벌어보겠다는 생각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그의 전집이 이전에도 출판된 적이 있었고, 얼마 전에도 출판되었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이나 걸작으로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꽤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인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평소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작품이었지만 우연히 손에 들어와 순식간에 읽게 되었고, 생각보다는 괜찮은 내용이어 만족스러웠다.

그가 간간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역사적인 인물이자 당시로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떤 관계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서 ‘사랑’에 보다 집중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에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결과물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큰 인상은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접근이 이미 다양하게 이뤄지기도 했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아무리 셰익스피어라고 해도 드라마와 같은 그들의 삶을 더욱 드라마로 만들어 내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워낙 유명한 인물들이라 그들의 삶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어서인지 그들의 비극을 놀랍거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얼마나 사실에 입각했는지 혹은 어디까지가 사실일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조금은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고, 그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실제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창작의 한계 때문일 것 같다.

 

이 작품은 사람들에 따라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며 읽혀질지도 모를 것 같은데, 번역자의 해설대로 여러모로 큰 차이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연령대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관계가 일종의 불륜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같은 점에서 큰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를 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어쩌면 그런 차이 때문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비교를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의 사랑은 처음에는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결국 그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비극은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책무를 등한시하고 개인적인 감정에만 몰두했을 때 발생되는 비극일지도 모르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이 과연 사랑인지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집착하는 모습,

어쩐지 자신의 끝을 직감적으로 예감하고 그동안 함께했던 부하들에게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는 앤토니의 모습 등이 인상적이었고,

오해와 거짓말 그로 인한 엇갈리게 되는 운명과 죽음은 이전에 보았던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으면서도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실제 삶과 교묘하게 이어지게 만들어 놓는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에 감탄하면서 결과물 자체는 신통치 않지만 완성도에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사랑에 애틋함이 상대적으로 덜 느껴지기 때문에 흥미가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의 만남과 죽음까지의 방탕한 삶에 대해서 약간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는 쉽지는 않다.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은 모습을 그들은 보여주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랑이든...

결국 사랑이다.

그 사랑에 누구도 뭐라 말할 자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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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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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43718

 

 

‘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였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을 도와 혁명을 도모하고 있었고,

그 혁명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었다.

그와 같은 이상을 갖고 있었던,

그와 함께 이상을 쫓고 있었던,

혹은 그와는 다른 이상을 갖고 있었지만 그처럼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혹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노력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런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김산만이 님 웨일즈의 글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을 뿐이고, 그렇게 남겨진 그에 대한 글만이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일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은 어떤 의미에서든 소중한 작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의 정치적 한계와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김산과 같은 이들에 대한 많은 정보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리랑’은 점점 더 중요한 작품이 되어가는 것 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리랑’과 같은 수준의 당시 시대를 살아간 사람에 대한 글을 접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산과 같은 인물이 꽤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억될 수 있는 존재는 김산 단 한명 뿐이라는 사실에 어쩌면 김산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의 이상과 꿈이 제대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쁨 보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리랑’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김산의 모습은 흔히들 떠올리게 되는 혁명가의 모습 바로 그대로이고,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그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리랑’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과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이에 대한 기록으로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이상과 그 이상을 이루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겪게 되는 좌절과 희망 그리고 그 과정들 속에서 삶에 대한 하나의 입장을 그리고 생각을 전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이런 ‘아리랑’에 담기지 못하고 누락된 내용들과 님 웨일즈가 김산과 나눴던 대화들에 대한 부분적인 메모들 그리고 당시 시대에 대한 김산의 정세분석, 그리고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김산 본인만의 시각까지 모아져 있는 ‘아리랑 2 - 김산의 생애 및 한국에 관한 보충’은 조금은 산만하고 두서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리랑’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김산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아쉽게도 1980년대에 출판이 되었고,

이미 절판이 된지가 오래되어서 더 이상 접하기는 어렵기는 하겠지만 우연히 헌책방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며 반가움에 손이 가게 되는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를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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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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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그동안 다루지 않던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기존에 갖고 있었던 자신의 시각과 입장에서 쉽고 간결하게 써내려간다는 점에서 뛰어난 글쟁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다루지 않고 있었던 ‘건축’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행복의 건축’도 건축에 관한 그의 생각과 입장을 전문적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는 해도 포기하지는 않도록 만들며 전달하고 있다.

 

물론,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조금은 엉뚱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건축과 관련된 전문가들도 나름대로 그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공감할 것이고 그가 주장하듯이 건축이 무엇을 담아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에 일정부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알랭 드 보통은 난해한 건축 이론이나 어떤 건축이 가장 탁월한 건축인지와 같은 진부한 논의에 빠져들지 않고 있고, 건축이 갖고 있는 시각적, 공간적, 정신적, 철학적 측면에 대해서 논의를 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총론적인 입장일 것이고, 어떤 방향과 지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는 그런 측면과 함께 건축이 갖고 있는 역사적 혹은 시대에 대한 반영적인 측면에 대해서 파고들고 있는데, 그런 논의를 통해서 알랭 드 보통은 근대건축에 있어서 끝없이 논의되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에 대한 주장’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반박을 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건축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내용에 대한 변화를 설명하며 그 미학적 관심의 변화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가 그리고 교감이 이뤄지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고, 건축의 외적인 부분과 함께 그 내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안정감과 감수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논의를 통해서 알랭 드 보통은 아름다운 건축이란 그리고 행복의 건축이란 결국 건축을 통해서 시대가 그리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시각적 요소와 기능적 측면에 대한 절묘한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함몰되어 있을 뿐인 건축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고, 시각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건축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탁월함과 함께 지향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통찰력과 설득력은 뛰어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만들어내고자 하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한 입장이 고려되지 않고 있었던 과거의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는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근대건축가의 입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건축에 있어서 좋은 건축과 나쁜 건축의 구분이란 결국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들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채워주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고, 어떻게 주변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의 절충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건물이 갖고 있는 외양을 통해서 그리고 그 내부에서 행복이 담겨지게 되는 것이고, 그 행복의 채워짐(건축)은 사람들이 그동안 이뤄졌던 삶을 고려하며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기 보다는 절충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하나의 이론적 입장과 논리적 결론이 아닌 다양한 검토 속에서 이뤄진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알랭 드 보통의 글의 성격에서는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고, 소재가 ‘건축’이라는 이전에 비해서는 독특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작인 ‘불안’과 같이 현대 사회에서의 삶에서 보다 (정신적 / 육체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건축이 갖고 있는 외적이고 시각적인 부분과

내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부분에 대해서 별도의 구분 없이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고, 그 논의들에 대한 결론도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자기 자신의 문제의식과 글쓰기를 흔들리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노력도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문가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을 그는 놓치지 않고 얘기를 하고 있고,

그는 그 부분을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입장과 연관시켜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이런 일관성 덕분에 그의 다양한 관심이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참고 : ‘행복의 건축’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도 잠시 언급되는데,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무덤덤하게 느껴졌지만 책을 읽게 되니 조금은 그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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