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사회 모델 동문선 현대신서 98
쥐스탱 바이스 지음, 김종명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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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국가는 어떤 식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여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그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읽혀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천국

지배 국가

헤게모니 국가

악의 축

이상향 등등

 

미국은 사람들에 따라서 각자의 입맛에 맞게 읽혀지고 있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질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하나의 신기루도 허상도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되어 있든 무언가로 구성된 하나의 실체이고, 쥐스탱 바이스는 그런 방식으로 미국의 존재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짧은 분량인 ‘미국식 사회 모델’은 프랑스 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이고, 프랑스와 미국이 어떤 차이를 갖고 있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떤 구성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간략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밀함은 부족하겠지만 반대로 대략적인 윤곽으로 이해하기에는 썩 괜찮은 내용이다. 물론, 출판이 된지가 좀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바라보던 모습과는 미국의 모습이 조금은 변화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변화되었다는 의견에 대해서 바이스 본인은 당연히 수긍할 것이다. 그도 내용 중에 언급했듯이 하나의 모델은 시간의 흐름과 정치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쥐스탱 바이스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하나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문화적인 분석보다는 경제, 정치행위, 의회의 구성, 정당과 법체계, 국가기구의 구성 등 사회 체제의 뼈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논의를 한정시키고 있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게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언급하고 있고, 그렇게 하나의 구조적인 측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조금은 기능적 혹은 형태적 측면으로 미국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이데올로기로서 혹은 문화나 기타 세부적인 방식으로 미국을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기는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분량이 짧고 대체적인 흐름과 형태를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단한 입문서나 상식 수준의 지식으로 생각하며 읽어나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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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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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스럽게 읽혀지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최근에 발표한 미국 문학 작품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가장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코맥 매카시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은데, 성서에 비견될 정도로 호평일색이라 조금은 의무감으로 읽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인지 썩 괜찮게 읽혀지면서도 생각 이상의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그저 ‘과연 9/11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와 ‘미국의 정신적 공항상태가 꽤 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작품의 배경은 아마도 핵전쟁 이후의 세계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지만 코맥 매카시는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고, 명확한 설명은 해주지 않고 있다. 그저 그곳은

 

모든 것이 어둡고,

춥고,

자주 비가 내리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곳이고

 

그 고통만이 남겨진 공간을 그리고 희망이 없는 공간을 남자와 소년이 끊임없이 걷(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코맥 매카시의 글은 대화와 설명의 구분을 두지 않고 있고,

시점은 엉켜있으며,

현실과 환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남자와 소년은 있지만 어째서 여자는 없는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진 않고 있다. 추측을 하도록 하고 있고, 남자와 소년 그리고 그들의 고난에 많은 은유와 의미 부여가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한 의도를 부여하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절망과 고통, 희망 등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다.

 

간간히 남자는 회상에 잠기고 있기는 하지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회상이기 보다는 지독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혹은 과거는 지금의 현실과 얼마나 다른 풍경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의 참혹함을 보다 더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어둡기만 한 세계 속을 그들은 끝없이 걷고 있을 뿐이고,

그들은 잠시 안락함을 누리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불안감을 수반하고 있을 뿐인 안정일 뿐이고, 다시 그들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불을 운반’한다는 목적으로 그들은 이동하고 있지만 그저 조금 더 안락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느낌만이 들게 될 뿐이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그 불이라는 것이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르고,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은 약간의 설명을 해주고 있으면서도 그 설명에 큰 설득력을 갖도록 노력하지는 않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는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의 그들은 하나의 고정된 혹은 정지된 공간에서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이동하고 있을 뿐인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동일한 공간 속에서 새로운 상황들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뜻인데 아마도 이는 고통스러운 여정만이 있을 뿐인 그들의 여행으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피로 때문인 것 같다.

 

묘사는 때로는 매우 세밀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흐릿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재를 머금은 비로인해 눈이 젖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듯이 책장 속 모든 것들은 뚜렷하기 보다는 어둡고 흐릿하다.

 

번역자도 언급했듯이 ‘코카콜라’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명칭이 언급되지 않고 있고, 소년과 남자의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저 두려움, 고통과 같은 어두운 감정과 기분에 작품은 집중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괴로움을 말함으로써 삶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작품일 것이고, 희망이 없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을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코맥 매카시는 그 절망과 고통을 더욱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묘사를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희망을 보다 더 희망있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지루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조한 글을 담아내고 있고,

간략한 대사들과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묘사는 회색 빛 풍경을 보다 진하게 선사하고 있다.

 

9/11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알고서야 조금은 더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희망 없음을 통해서 희망을 꿈꾸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단순하게 말해서 9/11 없이도 이 작품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 고통을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게 되는 것 같다. 고통이 없는 희망은 없고, 삶은 괴로움과 고통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희망은 희망으로서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삶이 희망을 하지 못하는 삶이 과연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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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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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43624

 

 

 

자주 얘기하지만 진중권의 글은 시사평론가로서의 글과 미학자로서의 글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각각의 성격에 따라 그의 글쓰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 조금씩 두 개의 영역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각각의 영역에 따라 관련된 독자들이 다르기 때문에 글쓰기 방식이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성공작이자 대표작으로 알려진 ‘미학 오디세이’는 제목부터 그의 미학자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는 되도록 일반인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간결하면서도 흥미를 갖도록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기존의 2권까지 발표가 되었던 ‘미학 오디세이’는 서구 유럽과 미국의 그리스 시대 미술부터 시작해서 중세와 근대 그리고 근대 이후의 현재까지의 ‘미’의 흐름을 들려주고 있고,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도판과 함께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로(때로는 유머 있고, 때로는 대화를 하듯이 그리고 때로는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관심을 놓지 않도록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보다는 미학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논의들을 토대로 그는 미학의 흐름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입문서로서로서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권과 2권으로 많은 독자를 갖게 된 이후에 발표한 3권은 2권의 말미에 다뤘었던 근대 이후의 예술에 내용을 집중하고 있고, ‘예술의 종언’을 말하는 지금 시대에서 도대체 무엇이 예술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논의를 위해서 그는 고전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디오게네스를 불러오고 있고, 그들의 입장의 차이와 함께 보르헤스와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하이데거, 보드리야르, 리오타르,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의 미학적 입장을 가져와서 원본과 복제 / 주관과 객관 /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등을 논의하며 결국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되어버렸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가 모호해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술이라는 것은 없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결론에 조금은 놀라움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이런 논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뤄졌던 논의들이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느끼기 보다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게 만들고 있다.

 

과연 앞으로도 ‘예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진중권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일정부분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해를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하지 말라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잡하거나 황당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현대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중권은 좋은 안내를 해주고 있고, 그의 안내에 따라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고 이해가 되지 않기만 하던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논의가 프랑스 / 독일의 철학적 흐름을 조금은 알고 있어야지만 더 이해가 쉽게 된다면 점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진중권은 어려운 것들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철학적 입장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쉽다는 뜻이 가볍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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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지음, 문지영 옮김 / 새물결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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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영역을 통해서 중세를 바라보고 있고, 근대를 되돌아보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자료로 취급하지도 않던 것들을 어떻게 하나의 시대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지 새로운 깨우침을 안겨주고 있는 저작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다시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아동의 탄생’은 단순히 중세에 대한 그리고 아동에 대한 역사책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인식의 변화, 심리의 변화와 체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분류가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는 ‘아동’이라는 존재가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아동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이전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아동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이상할 정도로 높아지게 되었으며, 그 이행을 통해 두 존재가 부각되어가는 변화를 보였다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이라는 존재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을 별도의 존재로 구분하지 않던 입장(중세)에서 특별한 존재로서 구분(근대)하고 어떻게 그들을 바라보고 양육하며 가족이라는 집단이 재구성되는지를 필립 아리에스는 수많은 사례들과 자료를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이의 말대로(아마도 폴 벤느가 아닌가 싶다) 아리에스의 분석은 미셸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과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데, 아리에스의 분석은 보다 역사적인 분석이고 정치적 성격이 적은 대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푸코는 굉장히 정치적인 성향이 짙기 때문에 보다 다방면에 걸쳐서 논쟁적인 여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둘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보다 더 자세히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쉽게 생각해서는 푸코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서 일종의 철학적 혹은 정치적 폭탄을 만들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면, 아리에스는 보다 학문적 입장에서만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정치적인 성향 보다는 죽음, 삶 등 철학적 혹은 하나의 삶의 태도에 보다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아리에스는 아동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

그들이 등장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새로운 분류체계와 구분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탐구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아동이라는 존재가 별도의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지에 대한 원인을 다루지는 않고 있다. 다만, 서문에서는 각 시대마다 특징적인 세대가 나타난다고 말을 하고 있고, 부르주아 계급의 부각과 함께 계급적 구분이 드러남에 따라 아동 및 기타 구성이 더욱 확연한 구분이 이뤄지고 있다는 식의 방식으로 얘기를 한다.

 

푸코와 같이 ‘권력’이라는 추상적 대상 혹은 전략에 의해서 그러한 구분들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타고난 역사가일 것이고, 하나의 사실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고, 그 사실을 통해서 그의 통찰력을 논의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푸코는 거기에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제시한다. 그것이 둘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어쩌면 필립 아리에스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 자체와 그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 그 과정에서의 원인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나 노베르트 엘리아스 식의 사회적 구별짓기[아비투스(Habitus)]에 대한 생각도 특별히 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하고 있었다고 해도 언급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언뜻 그런 생각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아리에스는 다양한 자료와 분석을 토대로 아동의 등장 자체를 다각도로 분석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세대로서의 아동과 삶에 대한 시기적 구분

복장 변화를 통해서 바라보는 아동 등장

아동에 대한 지칭 또는 명칭의 등장을 통한 인식의 변화

다양한 놀이에 대한 시대적 분류와 그 놀이를 즐기는 집단으로서의 아동의 등장

귀여워하기의 대상으로서의 아동

도덕성 주입 대상으로서의 아동

학교의 등장과 세분화 그리고 그런 분절화에서의 아동

규율을 통한 규제와 도덕성 통제 그리고 그 대상으로서의 아동

매너의 등장으로 인한 아동에 대한 사회적 / 문화적 제재 및 교육의 등장

 

아리에스는 말 그대로 온갖 것들을 토대로 아동의 등장과 가족의 탄생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있고, 그 분석을 통해서 중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아리에스의 아동에 대한 이와 같은 풍부한 분석은 동시대의 그리고 이후 세대의 학자들에게 수많은 영향을 주고 있고, 그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논의가 없었다면 과연 아날 학파는 지금보다 더 풍부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필립 아리에스 없이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있었을까?

 

물론, 완전무결한 분석은 없듯이 아리에스의 아동에 대한 분석도 아날 학파와 기타 비판자들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아리에스의 반박도 정당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비판의 중심인 실제로 과거에는 아동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가에 대한 논의) 아동에 대한 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떠나서 관심이 근대로 이행되며 얼마나 더 높아졌고 집중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아동의 탄생만이 아니라 언어, 체계, 구분, 분류, 교육, 예절, 가족 등 하나의 특정 대상의 등장이 그로 인해서 관련된 수많은 것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탁월한 저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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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ire of the Sun (Paperback)
Ballard, J. G. / Simon & Schuster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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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같은 제목의 영화만 많이 알려졌지만 J.G.발라드의 원작 또한 발표 당시에 많은 화제를 모았었고,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니 국내에 그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고 있어서 관심만 갖고 있던 중 (아마도)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번역되었던 것 같은 ‘태양의 제국’을 우연히 구하게 되어서 읽게 되었다.

 

J.G.발라드의 작품 중 가장 그의 작품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되도록 다른 작품을 읽고 싶었지만 (원서가 아닌 번역서로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이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무기력하게 읽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과 일정부분 유사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작품과 함께 두 작품 모두 글을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글이 어렵지도 않고, 내용의 구성도 복잡하지도 않은데도 읽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두 작품이 들려주는 정서와 풍경에 전혀 몰입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거나, 두 작품 모두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되도록 후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내 자신이 두 작품의 소년들의 경험들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경험적으로 그들의 심정에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지침과 정서적인 피폐해짐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반응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건성으로 읽게 된 것 같다.

문학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간접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은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체험 자체가 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서를 읽지 않았을 것이고,

과거에 출판된 번역본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원작은 영화와는 다르게 어떤 구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은데, 원작은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구성을 갖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이 달라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원작은 스필버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감상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있고, 주인공의 시각을 때로는 주관적으로 때로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가끔은 회상하고 어떨 때는 현재의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독특한 시각적 구성을 갖고 있다. 혹은 번역의 잘못일 것이다.

 

이와 함께, 소년의 눈을 통해서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 직후의 상하이의 혼란과 도망침 속에서 겪는 고독과 상실감에 집중을 하고 있고, 수용소로 향하는 과정과 수용소에서의 삶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J.G.발라드는 인간에 대한 씁쓸한 시선을 던져주고 있다.

 

소년은 수용소에서의 삶을 통해서 많은 성장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점점 더 망가져가게 된다. 그 과정을 J.G.발라드는 우울함과 허무함을 짙게 풍기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고, 소년은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서 점점 더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물고 있고, 비관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감수성에 집중을 하고 있다면,

소설은 정서의 붕괴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운명’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겪게 되는 경험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과 혼란(주인공의 혼란과 함께 주인공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의 소년의 시선과 정서적 변화들을 J.G.발라드는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고, 작품의 끝에서 보여주는 깊은 허무는 다른 성장 소설에서 맛볼 수 없는 분위기일 것이다.

 

너무 건성으로 읽어서 많은 것들을 놓치기는 했지만,

J.G.발라드의 이례적인 작품인 ‘태양의 제국’은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전쟁이 만들어낸 공허와 혼란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대표적인 소설들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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