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유로 세대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알레산드로 리마싸 지음, 김효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6304450

 

 

 

2007년에 발표되어 한국 사회에 큰 화제를 뿌렸고 영향을 끼쳤던,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데 큰 생각과 시각의 틀을 제공했던 ‘88만원 세대’라는 책과 신조어가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좀 더 이른 시기에 유럽에서도 이와 유사한 ‘천 유로 세대’라는 신조어가 얘기되기 시작했고, 둘은 차이점 보다는 유사점이 큰 용어였고 둘 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20 - 30대 비정규직 젊은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소모품처럼 다뤄지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소속될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슬픈 낙인이었다. 비참하고 서글프기만 한 의미를 갖고 있는 ‘88만원 세대’와 ‘천 유로 세대’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해결 방안은 도출되지 않고 있고, 누구나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더 깊어지고 그렇게 깊어져만 가는 문제가 언제 터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은 그저 문제가 커지기만 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대를 위한 많은 말들과 의견, 더 지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하기만 할 뿐인 ‘담론’들이 들리기는 하지만 실제 그 세대들이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그들을 분석하고 파악하려는 이들에 의해서만 그들은 다뤄지고 논의되고만 있을 뿐이었었다.

 

이런 좌절의 세대에 대한 책들 중에서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와 알레산드로 리마싸의 ‘천 유로 세대’는 그렇기 때문에 보다 의미를 갖고 다뤄져야 하는 책일 것이고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담일 것이다.

 

네명의 천 유로 세대 젊은이들의 내용으로 담겨져 있고, 그들의 애환과 고달픔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경쾌함을 잃지 않고 있는 내용을 담은 ‘천 유로 세대’는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매달을 근근히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겨우 삶을 꾸려나가는 와중에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 사이에서 항상 계산하고 선택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네명의 젊은이 중 중심인물인 클라우디오를 통해서 이들의 일상과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고난을 엿보게 하고 있고, 그들의 생활과 삶을 통해서 지금을 살아가는 젊음과 좌절만 갖고 있는 좌절의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그들보다 더 좋지 않은 형편에 놓인 노숙자 노인을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고, 지금의 현실에 안주할 수 밖에 없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좀 더 진취적이고 주눅이 들어 좌절만이 남은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한 시대의 중심 세대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세대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청춘소설과 같은 글쓰기를 통해서 보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다가가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얘기했듯이 좌절할 권리는 없는 자신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지기를 꿈꾸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저 좌절하기만 했을 뿐인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더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한 자신들의 삶을 그들은 조금은 즐기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가 놓쳤던 그리고 잃었던 것들을 잠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재미난 대중소설이면서,

지금 세대를 잠시 생각해보기도 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어떤 대중소설이 있는지 혹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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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나남신서 42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한승완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이미 읽었던 책이기도 하고,

처음 읽었을 때도 다시금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던 책이었는데,

요즘 하도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글들과 말들을 자주 접하게 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말하는 이들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고, 역시나 잘 모르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며 읽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불만만 쌓이게 되고,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도 역시나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 것에 관심을 갖게 되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불만을 듣고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각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첫 번째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공론장...’은 쉽게 지나칠만한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 혹은 부르주아 사회의 공론장의 특성에 관해 논의하며 이전 사회와 어떤 차이와 특성을 갖고 있는지와 함께 그 특이점이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야기하게 되었는지와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며 앞으로의 사회에서 공론장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논하며 사회의 변화와 긍정성을 모색하고 있고, 이런 ‘무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의견을 제시한다’는 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의사소통...’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관심이 단순히 잠시 갖게 되었던 관심이 아니라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첫 번째 저작인 ‘공론장...’에 대해서 다시금 관심과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과거 근대 이전의 중세 시대의 공론장 혹은 공공성을 간략하게 다루며 이후의 근대 사회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고, 이 공공성 그리고 공론장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문화와 관련된 내용이 주로 논의되던 공론장의 어떻게 정치적인 논의까지 이뤄지게 되었는지와 읽기 능력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를 통해 커피하우스, 살롱 등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토론이 이뤄지게 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관심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이후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충분히 변화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으리라고 하버마스는 판단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의미와 정치적 기능을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 이후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마르크스)의 시각을 통해서 그 의미와 이념 / 이데올로기와 한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계를 파악함으로써 변증법 적인 극복이 가능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긍정성과 함께 그 한계 그리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으로 인해서 변질되는 공론장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는 자본주의와 대중문화, 복지국가로의 변화가 공론장의 변화에 가장 큰 중심을 이루고 있고, 이런 변화가 공론장의 긍정적인 기능을 붕괴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의 긍정적인 시각이 조금은 섣부른 시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개선되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점점 더 악화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기능을 저해하게 되는 요인으로 꼽은 요소들이 더욱 커져만 가고 있고, 이로 인해서 공론장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게 된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의 예측은 많이 빗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공론장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되는 ‘소셜 네트워크’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리라 생각되기 보다는 수없이 다양한 의견들이 엇갈리고, 연결되고, 논의되기 보다는 서로 자신의 생각을 떠드는 것에 급급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앞서기만 하고 더 빨리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만을 하게 된다.

 

이것 또한 너무 이른 판단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변화를 바라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적절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책 한두권을 읽고는 무리일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보기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첫 시작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내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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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라며 퉁명스럽게 반문하게 되는 제목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국내에서도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첫 번째 작품이고 최근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의 글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첫 번째 작품부터 그다운 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 작품이다. 또한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 제목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해서 역시 알랭 드 보통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기도 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시작까지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고, 그렇게 담겨진 내용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의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관심들(여행, 건축,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 등)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마련이고, 많은 부분은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저 주인공의 독백과 대사 그리고 생각을 단상으로 적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고, 그 감정을 깊이 있게 음미하고 탐색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평가인 것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서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클로이라는 여성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 인해서 사랑을 느끼고, 그렇게 느끼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다양한 상념들, 그리고 깊어지는 사랑과 관계로 인해서 변해가는 감정과 행동, 주변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내밀하고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고, 그 깊이 들여봄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들도 그동안 겪었던 사랑들 속에서 우리도 그와 그녀처럼 느꼈지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느낌들을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금 환기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우연한 만남과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느껴지게 된 사랑

그렇게 다가온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들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다양한 비유와 은유 그리고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통찰력 까지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그와 관련된 그리고 그로 인한 수많은 것들을 이 작품은 정교하게 담고 있고, 그렇게 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뜨겁고 감미롭던 사랑이 얼마나 차갑고 고통과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하는지를 그 모든 것의 끝을 어떻게 향하게 되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기도 하고 있다.

 

아름답기만 하던 사랑이 점점 이전과 달라지고, 그 달라진 사랑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 함께 변해버린 사랑으로 인한 슬픔까지 따라가며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사랑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찾아가고 있는 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면서 사실적인 작품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건조하게 사랑을 분석하고 바라보고 있기도 한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냉소하기 보다는 충분히 옹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 솔직함과 정교함에 조금은 거부감을 갖게 되기도 하기 때문인지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선호하게 되지도 않고 매도하게 되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목적이 성공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경험했던 사랑이 좋은 결말을 맺었던, 그렇지 않던 사랑이든...

어쨌거나 사랑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랑일 뿐일 것이다.

 

모든 것에 관심이 시들어지는 요즘이기 때문인지 이렇게 사랑에 대해 충실한 분석을 하고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품의 재미보다는 지루함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루한 마음에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작품을 작품으로서 읽기 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보며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 보다는 잃은 것들을 읽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내용이고 흥미로운 글이라는 생각보다 짜증스럽게만 만드는 것 같다.

 

 

 

참고 : 알랭 드 보통이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고, 흔히 말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그 지식과 교양 중에서 유독 맑스(마르크스)에 대해서만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지나치게 혐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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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상형문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6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그동안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새로운 다짐, 이와 함께 도시와 공간 그리고 (항상 강조하는) 시대의 상형문자에 대한 김석철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의 상형문자’는 건축가 김석철이 보았을 때 한국만의 건축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루’와 ‘정’에 대해서 논의하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새로운 건축적 변화를 보이지 못한 한국 건축의 낙후성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새로운 건축에 대한 제안과 과거와 현재,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미래를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시각은 조금은 유럽적 결과물들에 많은 영향 아래에 놓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라보아야 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귀를 기울여 하는 의견이라는 생각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얼마 안 있어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느껴지는 허탈감과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조금은 더 뭔가를 이루고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여러 죽을 고비를 겪는 도중에 얻게 된 몸과 마음의 상처들이 그의 글을 통해서 느껴지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때로는 슬픈 감정을 그대로 써낸 글은 가볍게 써낸 것 같으면서도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해내고 싶은 것과 해낼 수 있는 것들의 간극을 줄이려고 하고 있고, 그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천년의 도시를 방문하고 도시의 건축들을 바라보며 하고 있다.

 

한국의 ‘루’와 ‘정’의 특색을 논하며 한국의 지식인과 지배층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고, 그 비판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논하기도 하고 새롭게 한국의 그리고 건축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이의 등장을 염원하기도 한다.

 

한국의 ‘루’와 ‘정’이 중국과 일본과의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 보다 세부적인 논의를 들려주기 보다는 간략한 제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의 건강 상태가 그런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하기에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루’와 ‘정’을 발전시킨 결과물에 대한 간단한 언급과 함께 그는 다시금 중세의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그리고 통찰력을 보이는 도시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고, 한국의 도시들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과 필요한 것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것을 고려해야 할지를 언급한다.

 

상세하게 논의하기 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로 인해서 간략하게만 언급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핵심적인 것들만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석철의 글은 건축가로서의 글이기 보다는 감수성 있는 문학도의 글과 같은 느낌으로 항상 자신의 글을 썼었고, 이번도 여전히 그의 냉정한 시선이기 보다는 감수성 높은 글로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 바라보도록 만들게 한다.

 

그가 거닐었던 도시들을 한번 돌아다녀보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가 보았던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식으로 바라보게 될지 궁금하게 되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아마도 그 어느 곳도 향하지 못할 것 같다.

 

말미에 그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발표한 취임 연설과 그의 20 - 30대 시절의 스케치들은 전체적인 분량이 적어 조금은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서 삽입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가장 영감어린 시절의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인문학자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글에서 어지간한 인문학자 이상의 통찰력과 시대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읽은 분발하게 만들기도 하고, 좌절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참고 : 개인적으로는 책의 ‘가격’에 대해서 불만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공간의 상형문자’는 예외로 해야 할 것 같다. 사진자료가 많고, 종이나 표지 등에 많은 신경을 썼으니 가격이 높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생각이면 이렇게 많은 오타가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한번이라도 세심하게 읽었다면 이정도로 많은 오타가 발견되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오타에 대해서 문의하기 위해 방문한 홈페이지는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글도 게재할 곳이 없어서 어디다 문의조차 할 수 없으니... 기분만 상하게 되는 것 같다.

 

오타와 누락된 부분에 대한 의견은 이곳에 남긴다.

 

초판 1쇄 발행(2009년 3월 1일)된 출판본임

 

1. 104페이지 위에서 11번째 줄 ‘5.17’은 ‘5.16’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함

2. 112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 ‘셰익스피어만 한 작가가...’에서 ‘셰익스피어만한 작가가...’ 로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생각함

3. 129페이지 밑에서 8번째 줄 ‘이스트 강와’는 ‘이스트 강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함

4. 120페이지 밑에서 5번째 줄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서 ‘건축가 찾아보기’에 그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는 표시가 있는데, ‘건축가 찾아보기’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음

5. 224페이지를 보면 인명 순서가 산소비노, 스카르파, 팔라디오, 스카모치 순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순서는 106페이지 산소비노, 팔라디오, 110페이지 스카르파, 115페이지 팔라디오 순서로 되어 있으니 순서에서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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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저명한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현존하는 문학비평가들 중 가장 탁월한 비평가이며 이론가로 알려졌고, 최근 국내에 방문하기도 해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 맑스(마르크스)주의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좌파 / 진보적인 입장의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고 그 외의 사람들도 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뛰어난 비평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명성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특별히 어떤 것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미루고 있다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저서 중에 속하는 ‘성스러운 테러’를 접하게 되었다.

 

번역자의 말대로 그의 이론적인 저작이 아니라 요동치는 최근의 정치 /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해석과 입장을 담은 글이기도 하고, ‘테러’라는 하나의 정치적인 그리고 죽음을 통해 삶을 만들어 내려는 절박한 행위에 대한 그의 급하게 써내려간 변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테러’라는 것이 고대부터 존재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이고, 그것이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복잡하고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논의로 시작하고 있고, 이 논의에 이어 곧장 고대 디오니소스에 대한 언급과 정신분석, 수많은 영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논의를 보다 다양하게 만들고 폭넓게 확장시킨다.

 

그는 이런 다양한 분석을 통해서 최근의 ‘테러’에 대한 이미지(복면, 이슬람, 자살, 비행기, 참수,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이라크, 폭탄, IRA, 아일랜드, 저격 등등등)가 일종의 오해이며 시대 순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테러’라는 것이 얼마나 절박함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테러가 마치 이성적이지 않고 야만적인 행위인 듯 논의되고 있는 최근의 분위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성과 광기 그리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구분이 확연한 것이 아닌 자의적인 구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부와 외부

죽음과 삶

이성과 광기

 

이와 같은 확연한 것들이 실제로는 모호한 구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우리들에게 그 구분의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경외감, 존중, 숭고 등 익히 접했던 논의들을 다시금 꺼내들어 우리가 어떤 것들을 잊었고 이와 같이 망각하게 된 것들을 다시금 기억해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서 테러의 폭력성을 말하기 이전에 서구 세계와 근대 자본주의가 보여주었던 폭력성을 우선 말해져야 한다고 하고 있고, 지금 보이고 있는 폭력성과 지배와 권력욕이 공허만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고 그 공허는 허무일 뿐이며 모든 것을 망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전제 속에서 숭고와 자유 그리고 순교, 허무주의, 자기희생에 대해서 논의하며 지배하려는 이들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결국 허무 속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과 죽음으로써 삶을 모색하는 이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와 그 선택이 갖고 있는 정치적 /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통해서 반복되기만 하고 있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테리 이클턴의 논의는 정교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연구자들의 논의들을 잘 빌려오고 있고, 기존의 자신의 논의를 연장시키기도 하고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고,

시대에 대한 그의 의견 표명이기도 한 것 같다.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어떠한 제안은 내놓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동조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의견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것들에 큰 오해가 있고,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보학적인 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그의 분석이었고, 시도였던 것 같다. 지나치게 논의를 복잡하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분석과 해석은 꽤나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의 다른 저작들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은 읽을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참고 : ‘염오’라는 말은 생소한 느낌이 든다. 별로 접하지 못한 단어인데, 다른 사람들은 자주 접했던 단어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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