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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알쓸신잡 2 에서 유시민 작가님이 추사의 말년 글씨체를 보여주고 이전 글씨도 보이며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준 적이 있다.
아, 글씨도 늙을 수 있구나.
늙었을 때의 글씨도 나름대로 멋이 있구나.
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여도 초등학생 때 쓴 글씨와 고등학생 때 쓴 글씨가 당연히 다르고, 이십 대에 쓴 글씨와 사십 대에 쓴 글씨도 다르다. 칠십 대, 팔십 대가 되면 더욱 그렇다. 십 대 때는 동그란 글씨만 썼던 소녀도 할머니가 되면 자연히 그런 글씨를 쓰지 않게 된다. 글씨도 나이와 함께 변화한다. 182쪽
동생이 시집을 가게 되어 집을 정리하면서 편지 뭉치들을 많이 발견하고는 버려도 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무심히, 어, 했다가 아니 그래도 가서 좀 볼게, 했다.
그렇다. 나도 아직은 어딘가 좀 낡은 인간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얼마 전에는 친정도 아니고 우리집에서 대학 때 전공노트, 대학원 때 노트도 발견했다. 확실히 글씨가 미세하게 변했다. 특히 요즘 필사를 가끔 하는데 글씨가 참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낀다. 많이 길쭉하고 허술해졌다.
여고생 땐 밤톨같이 단단한 글씨체였는데.
뚜유폰트로 제작한다면 제작할 수도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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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문화인 편지와 대필업에 얽힌 이야기이다.
선대(할머니)의 문구점과 대필업을 이어받은 주인공 포포는 선대와 풀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선대의 유업인 대필업은 성실히 수행한다.
손님들 각자의 사연을 주의 깊게 듣고 그 상황에 맞는 내용을 구사해 어울리는 글씨로 잘 적어보낸다. 물리적인 편지지나 우표, 봉투, 도장 등에도 세심하게 마음을 쓴다.
여러 가지 사연이 다 인상깊었지만 돈을 빌려달라는 걸 거부하는 편지나 '절연장'이 신선했다. 오래 사귄 연인끼리도 카톡 하나 없이 차단만으로 잠수 이별도 하는 세상에 부러 의뢰를 해서 인연을 잘 매듭 지으려 하는 것이 고풍스럽게 여겨진다.
촌스럽게 요즘 누가 '절교'씩이나 하는가, 그저 카톡 차단이나 SNS 친구 끊기로 해결되는 세상인데.
사람들이 많이 강해지고 독해진 듯하나 이런 식의 인연 맺음은 자아가 많이 허약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흔해진듯하다.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마무리가 중한데 그 마무리에 드는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기 싫고 두렵기도 해서 잠수를 택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보낸 즐거운 시간, 정말 고마워.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이제 서로 거짓말하는 것은 그만두지 않겠니?
나는 너와의 멋진 시간을 멋진 시간인 채,
가슴에 담아 두고 싶어.
이것은 나의 절연장이야.
이제 널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이유는 알겠지.
너 자신의 솔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렴. 256쪽
연인이 아닌 동성에게 보내는 익명 씨의 절연장이다.
이걸 받으면 상대는 순간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강하게 묶어두었던 우정이라는 끈을 끊고 결국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차원 높은 배려라는 생각도 든다.
포포는 연락이 닿는 혈육은 없지만 바바라 부인, 빵티, 남작, 큐피라는 아이, 큐피의 아빠와 유사가족 관계를 맺고 소소하게 일상의 낙을 찾는다. 마지막에 좀 급작스럽게 큐피와 큐피의 아빠와 이어지는 것말고는 읽는 동안 평안했다.
언젠가 츠바키(동백나무) 문구점이 있을듯한 가마쿠라를 거닐어 보고 싶다. 지금은 그저 역자 후기에 가마쿠라 여행기가 실려 있어서 읽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뿐.
부록으로 포포가 쓴 듯한 그동안의 편지들이 실려 있다. 일본어 잘알못이라 필체가 어떤지까지 가늠할 수 없어 안타깝다.
요즘 좋은 연필들을 사모으고 있는데
아이들만 주지 말고 나도 부지런히 써야겠다.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긴 벗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도 써보고 싶다.
"평범한 편지도 써주십니까?"
소노다 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8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