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처음 써보는 아이는 설정한 패턴을 잃어버리고 백업 숫자로 복원한 후 다시 패턴을 설정하지 않는다. 귀찮다나. 그러더니 숫자마저도 해제해버렸다.

 

이렇듯 패턴이란 한번 설정되면 편하긴 하지만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나는 육아 10년간은 어떤 패턴을 찾으려고 끝없이 노력했다. 패턴을 설정하고 잃어버리고 하는 것의 연속이었던듯하다. 지금도 사실 그렇다. 아주 다행인 것은 수면패턴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다. 육퇴(육아퇴근)하고 놀고 싶은 것을 참아내고 10-10시 반 사이에 잠들어 4-5시 사이에 일어나기를 다행히 2주째 지속하고 있다.

 

 

 

 

 

 

 

 

 

 

 

 

 

 

 

 

악스트 <황정은> 작가 편 아껴 읽고 있다.

신기하게도 요즘 나의 화두인 내 삶의 패턴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인간 삶의 패턴

 

아니다. 한 사람이 20년, 30년, 40년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상황과 만난다는 이야기 아닌가. 계속 어떤 상황의 연속이고, 계속 어떤 선택을 하고. 그게 모여 그 사람의 패턴이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 자신은 그때그때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은 본인이 그동안 살아온 패턴을 따르는 것 같다. 성찰이 드문 삶에서는 그런 패턴에 따르기가 훨씬 쉬워지고 자기도 미처 모르는 자기 패턴에 따라 살게 되고. 그게 쉬우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별로 없거나 그런 기회가 별로 없는 삶을 살수록 패턴에 휩쓸리기 쉬운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 단편을 쓸 때.

 

작가가 생각하는 악

 

그게 나도 궁금하다. 거창한 악보다는 사소한 악에 관심이 더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비웃음, 천진함, 일상의 비열함, 일상적인 악 같은 거.            33쪽

 

"이 세계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낙담."

 

가족들?

 

지금 삶의 파트너들. 그런데 덧없다. 한 번뿐이니까. 롤랑 바르트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이 덧없음을 어떻게든 이야기로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방법인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 거다. 세계가. 그걸 절감한 것이 2014년 이후였고 노이로제 같은 걸 겪었다. 이 사람들이 내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될까봐. 안전하지 않고 너무 형편없는 세계에 대한 자각이 아주 뚜렷하게 왔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여기 있는데 내가 그 사람들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정적으로 계속. 바르트적인 낙담의 상태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단편과 중편 <웃는 남자>를 그런 상태에서 썼다.      36쪽  

 

어릴 때, 아마 한 10대 후반 20대 초 정도에는 내가 굉장히 도덕적이고 남보다 정의롭다고 여겼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 흥분했고 화가 났고 화를 쌓아두고 살았던 듯하다.

 

그런데 마흔이 넘고 보니 나는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다지 정의로운 편도 아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맞다.

 

어떤 힘든 상황이 연속적으로 다가오면 피해다니고 내게 감정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권력이나 거대 악에 주목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내 삶의 패턴에 주목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다만, 언제나 생존이 시급했다. 정은 작가가 가족들이 한때 자신을 XX년이라 여겼을 거라 해서 잠시 씁쓸하게 웃었는데 나 역시 우리 가족 중의 누군가에게는 그런 포지션. 

 

정은 작가(악스트에서 이렇게 부르는 게 맘에 든다)  소설을 읽다보면 <웃는 남자>도 내가 경험했던 어떤 상황이나 심정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해묵은 음반들. 너덜너덜하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뻣뻣해진 마분지 껍데기들. Georges Moustaki, Neil Young, 시나위, NKOTB, Boston Symphony Orchestra가 연주한 Shostakovich, VIvaldi, Michael Jackson. 고르지 않은 취향. 그보다는, 취향이 되기 전에 중단된 취향.

 

<웃는 남자>, 61쪽

 

친정에 가면 내가 모은 씨디나 테이프들이 아직 두꺼운 감귤상자에 가득 담겨 있다. 세 살 터울인 여동생은 영문도 모르고 내가 듣는 건 따라 들었을 것이다. 가정 내 자원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언제나 맏이가 더 우위를 갖는다. 내 취향의 책이나 음반으로 도배된 작은 방. 이게 아직 친정에 남아 있어 늘 부채감에 시달린다.

 

아이를 키우면서 누구나 욱한다고는 하지만, 그 원인과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한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떨 때 공통적으로 욱하는지 적어본다. 어떤 일이 나를 유독 욱하게 하는지 파악했다면, 그때부터는 나의 삶과 연결을 시켜 봐야 한다. 그래서 그 상황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한다. 293쪽

 

내가 일상에서 유독 욱하는 상황들을 적어 보았다면, 이제는 그 상황에 내가 보이는 공통된 반응들, 같은 패턴의 반응들을 써 봐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일상에 습관화하면 나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이 자체만으로도 욱하는 감정이 많이 줄어든다. 294쪽

 

<못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육아서는 한동안 읽지 않다가 인기도서가 우연히 들어온 게 신기해 읽었다. 전에 지역 강연도 들은 적이 있어 그 내용 그대로이긴 하지만 역시 '패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옮겨본다.

 

오은영 박사가 나왔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패턴. 

저 좁은 집에 장난감, 책은 왜 이리 많으며 힘든데 왜 자꾸 마트나 놀이공원 같은 데를 꾸역꾸역 나가 애를 잡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남에게는 뻔히 보이는 패턴을 부모만 못 보고 힘들어하고 박사님한테 아이도 혼나고 엄마도 넋이 나가 허둥대다 방송국 지원 받고 손잡고 나들이하며 마무리.

 

하. 그러나 내가 애엄마가 되고 나니 별다를 것도 없더라.

 

스무 번 중에 열아홉 번은 친절한 엄마인데 한 번은 광분한다면, 차라리 그 열아홉 번을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 한 번을 안 하는 것이 낫다. 그것이 아이한테는 훨씬 더 이롭다. 열아홉 번 애쓴 것이 다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애를 쓰는 것보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한 번을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41쪽

 

내가 바로 스무번 중에 열다섯 번은 친절하고 다섯 번은 버럭하는 엄마다. 일단은 체력이 약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좋아한다. 그런데 또 의무감, 책임감은 무지 강하고 어린시절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뭔가 내 아이에게만은 엄청 잘하고 싶어한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게 되는 반응에 일정한 패턴이 있거나 늘 어떤 상황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이다. 제3자가 보기에는 “뭐 그런 일 가지고 그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는 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된다면, 자신을 천천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문제의 원인이 보이고 답도 찾을 수 있다. 296쪽

 

내가 욱하는 상황들이 다 어린시절과 연관되어 있고 아이들의 실수와는 무관했다.

 

사회에는 괜찮은 사람과 아주 좋은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과 형편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 비율은 언제나 비슷하다. (중략) 내가 옳고 선량하게 살면 좋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살지 않는다고 과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사람이 “그렇군요. 제가 잘못 살았군요”하고 굴복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300쪽

 

“당신의 기준은 이론적으로 정답에 가까워요. 당신이 사는 방식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아니면 조폭 같은 사람들한테 적용하면 통하겠습니까? 사람의 감을 봐야지요?” 295쪽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가면 공중질서 어기고 하는 무개념인 사람들에 광분했다. 애들도 나처럼 그런 상황에 기분이 상하는 편이다. 새치기 하는 사람에 나들이 기분을 망치기도 하고 식당에 떠드는 사람 있으면 불편해했다.

 

어느새 아들도 나를 따라 깐깐하게 굴고 입바른 소리를 하려고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러

아, 이러다가는 사소한 시비에 말려 큰일을 겪겠구나, 싶어 적당히 넘기는 법도 배우게 하자고 느꼈다.

 

상대가 욱할 때 가장 좋은 대처는 사실 능청스러움, 유머와 위트다. “뭐 그렇게 화를 내실 것까지야” “고정하세요. 건강에 해로워요”하는 것이다. 301쪽

 

이 정도면 족하다.

도서관도 개관하자마자 가서 애들 많아지기 시작하는 11시 넘어 나오면 화낼 일이 줄어든다.

 

새치기를 당하면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부드럽게 알려준다. 만약 새치기한 사람이 연쇄살인마라면 싸이코패스라면 으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ㅋ

 

그보다는 사람이 몰려들 시간을 가급적 피한다. 다행히 애들 아빠가 가끔은 평일에 쉴 수도 있어 평일 여행이 제일 좋았다. 아, 역시 여유롭게 평일 여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화낼 일이 줄어드는구나 싶었다. 

 

*

어제는 주부의 특권 중 하나를 행사 

조조로 <택시 운전사>를 보았다. 애들 방학에 개봉해 못 보다가 이제야 내려가기 직전에 보았다.

최상의 관람 환경이었다. 혼자 오신 분들 서너 명.

 

평범한 소시민 택시기사 만섭이 광주의 참상을 목도하고 자신의 삶의 패턴을 깨버리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특히 피터와 만섭이 마지막 검문에 걸렸을 때 서울택시 번호판을 눈감아준 군인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이 사람 역시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거대 악에 맞서 순간순간의 선한 결정과 자기 희생이 모여 여기까지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대했던 류배우는 서툰 영어발음 연기로 웃음을 주었고 최후의 순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부분도 좋았다. 정말 그 시대에 살았던 전대 철학과(영화에 그렇다고 나오진 않지만)일 것 같은 '구재식'이였다.

 

단발머리, 제3한강교가 투쟁가같이 구슬프게 들리도록 불러준 송강호 씨가 참 대단하다.

대학 때 봤던 초록물고기의 넘버3가 저렇게 대배우가 될 줄이야.

 

미생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최귀화 님의 사복조장 연기도 실감났다.

 

다만, 마지막에 보안사와 택시기사분들 레이싱이 좀 핍진성이 떨어진다.

 

그래도 오일팔 정신을 크게 훼손하지는 않는 잘 만든 상업영화였다.

 

*

그러고 보니 여기서 또 패턴

 

뭔가 비오는 새벽에 글을 이렇게 길게 쓰게 된다.

 

마무리를 어떻게 하지

 

패턴을 설정하려면 간단하고 신중하게

혼동을 주는 잘못된 패턴이 되지 않게 언제나 생각하며 살기.

무엇보다 여유를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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