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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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157쪽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항상 내처질 때 고아라고 느낀다.

 

혈연지연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일정 부분 고아가 아닐까?

 

아니다. 이것조차 사치스러운 소리다. 정말로 '보육원'에서 나와 자립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실로 눈물겨웠다. 같이 울어줄 이가 없는 아이들. 그래서 더 마음 아팠다.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11쪽

 

가열차게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자고 세상밖으로 나선다. 학교에 진학하고 취업을 하고 돈을 모아 보금자리를 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런 걸 모두 평범한 삶이라 하지만 모두에게 허용된 삶은 아니다. 아등바등하는 동안 그늘은 깊어만 간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에서 '밝은'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밝아야 할 시절인데 마냥 그럴 수만 없는 청춘이 많다.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사실 국민 대다수가 밝을 수 없는 '불친절한 노동'에 장시간 시달렸다. 작가의 아버지도  고물상, 메리야쓰 공장 노동자, 구청기능직 공무원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오죽하면 아들에게 대학가지 말라고 했을까. 대학 가서 졸업하고 취직해서 아이 낳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불행의 끈을 자르라고, 출가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단다.

 

막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는 자식에게 너무 가혹한 말이라 할 수도 있다.

 

아니다. 이렇게 살아왔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한번은 미아리 극장에 <푸른 하늘 은하수>라고 최무룡 씨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갔어. 너 최무룡씨 알지? 몰라? 그 때 극장들은 로비에 벤처스ventures류의 경음악을 크게 틀어놓았거든. 아, 신나지. 그리고 대형 거울도 있었어. 그 때 어디 가정집에서 거울을 들이고 살았나? 극장이나 가야 거울이 있지. 극장 로비에 앉아 거울을 보는데 구석에 어떤 거지가 앉아 있더라고. 거지도 영화를 보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보니 그게 내 모습이었어. 그 때가 양복점 일하기 전에 창동으로 고물 주우러 다닐 때니까 행색이 말이 아니었지.(울먹이시다 끝내 오열. 겨우 그치고) 그 영화 줄거리가 꼭 내 이야기 같았어. 주인공이 고아인데 나랑 처지가 비슷하더라고. 영화 끝나고도 집에 갈 때까지 울었어. 당시 홀아비로 살던 네 할아버지가 나보고 왜 우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푸른 하늘 은하수> 보고 오는 길이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먼저 그 영화를 봤나봐, 그러더니 나더러 더 울라고......(다시 오열)" 164쪽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고 아들은

 

"그리고 나중에 내가 고아가 되면 <푸른 하늘 은하수>도 구해봐야지. 그때는 내가 아버지처럼 엉엉 울게. 그래. 끊어요. 그말 울고, 아버지" 

 

라고 한다. 아버지의 말은 절절한 한편의 시 같다. 시인과 아버지는 실로 대한민국에서 드문 부자관계 아닌가. 맘껏 울고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이라니.

 

시인은 아버지 뻘인 문인들과도 친분이 있는 편이라 자주 술자리에 동석한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한 문장 정도의 말을 기억하려 애쓰는 버릇이 있다. “뜨거운 물 좀 떠와라”는 외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고 “그때 만났던 청요릿집에서 곧 보세”는 평소 좋아하던 원로 소설가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죄송스럽게도 두 분의 임종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말들은 두 분이 내게 남긴 유언이 되었다. 18쪽 (중략)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19쪽

 

 

70-80대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면 일상적인 한 마디 대화가 그대로 유언이 되어버린다. 우리 외할머니의 경우 '목마르다'였나. 그것도 남에게 전해들었다. 시아버님이 내게 남기신 유언은 정말로 유언다웠다.

 

"너는 말이 없지만 그래도 믿을 만해"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젊다고 해도, 친구라 해도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 마지막으로 서로 주고받은 말이 유언이 된 경우도 많다. 한 친구는 내게 "아이 다 키우면 그래도 그때는 볼 수 있겠지'라고 했다. 아이가 아직 다 크지 않아서 10년이 지나도록 못 보고 있다. 한때는 애인보다 소중했던 친구였는데. 가끔 그애 남편 블로그를 들여다보다 그마저도 열없어 관두었다. 잘 지내고 있으면 된 거지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도 이제 들지 않는다.

 

*

시인은 서울 태생인데 이게 참 시인에게는 득이 될 게 없다. 그저 군대에 갔을 때 '서울 깍쟁이'라는 이미지를 심을 정도이다. 나도 유년을 서울 언저리에 보냈고 별 의미는 없다. 그냥 여의도에서 자전거 타고 중고등 시기에 시험이 끝나면 명동에 가고 그 정도이지 수도 서울에 살아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문화적인 것을 맘껏 누린 것도 아니었다.

 

작가, 시인이라면 순천, 보성, 통영, 남해, 강릉 출생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과도 비슷하다. 시인은 서울 태생의 한계를 지우려 남도로 봄마중도 가고 여러 곳을 여행다녔다. 나도 5년 전 광주에 온 이후로 남도의 여러 곳을 기회가 날 때마다 다녀보았다. 도시에서 벗어나 한 두시간만 가면 경치 좋고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남도다. 

 

해남에서 온 편지

 

배추는 먼저 올려보냈어.

겨울 지나면 너 한번 내려와라.

내가 줄 것은 없고

만나면 한번 안아줄게. 69쪽 

 

봄이 오려고 하면 정말 해남에 가게 된다. 아이들은 두꺼운 겉옷을 입고 나섰다 대흥사 경내로 들어서 달음박질치며 옷을 벗는다.

 

올해 초에 통영 거제에도 가보았다. 알쓸신잡으로 더 유명해지기 전에도 통영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도다리쑥국'을 먹었다. 비린 걸 즐기지 않는 나도 한그릇 잘 비웠고 어쩐지 어른이 된듯한 느낌도 들었다.

 

*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려면(아니 한곳에 붙박혀 생활하기만 해도) 당연히 돈이 필요할 것이다. 전업 시인은 그래서 힘들고 시인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문인들이 창작을 통해 벌어들이는 평균 연봉은 214만원이라 한다. 월급이 아닌 연봉이 214만원.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63쪽

 

밥벌이와 꿈이 일치하지 않는 신산한 삶을 오래 살아와 그런지 시인은 빨리 늙어버렸고 이런 선배 문인의 이야기에 위안받나보다. 

 

시인의 시는 사실 오래 전에 유명한 드라마에서 제목만 보았고 산문도 처음이다. 그런데 어느 장이 시이고 어디가 산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고 자꾸 돌아가서 다시 읽고 싶은 장이 생긴다. 경험의 장이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서울 변두리에서 유년을 난 사람들의 정서라고나 할까.

 

시인이 남도로 여행다니며 쓴 시와 글이 따스해서 좋다. 산문집도 잘 되고(이미 잘 되셨지만) 앞으로 시집들도 잘 읽혀서 오래오래 쓰셨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중략)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은 답서를 할 것이다. 우리의 편지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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