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청소년도서관이 개관했다. 내 걸음으로 7분, 아이들 데리고 10분 거리이다. 7월 말부터 아이들이랑 거의 매일 가다시피했다. 도서관은 단층 규모로 열람실이 없다! 오옷 그래서 수험생은 자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들어서서 오른편에는 어린이 열람실이 있고 왼편에는 청소년자료실이 있다. 자료실 규모로는 부족하지만 일단 집앞 도서관에 비해서 장점은 어린이실과 자료실이 한 층에 있어 애들 살피기가 좋다.

 

초등 2, 4학년이라 거의 두면 책만 보지만, 작은 생활의 불편을 처리해줘야 할 때가 있어 같이 있으니 좋다.

 

어제는 아이들 개학하고 층고가 높은 그곳에서 5시간이나 머물렀다. 고시원에 살며 밥값도 부족한 세대인 요즘 20-30대가 카페에 자주 가는 건 공간을 향유하기 위해서라고 한 걸 읽은 기억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특히 층고가 높은, 적당히 높은 그곳이 마음에 든다. 가는길에 저렴하게 아메리카노를 파는 작은 동네 찻집도 많다. 매일 가는 길 말고 단지들 사이 여기저기로 빠지며 이런저런 가게를 구경한다.

 

한동안 뜨겁게 사랑받았던 박준 시인의 산문집.

뭐 별다를 것 있겠어, 가볍게 보자하다가 서표(書標)로 덮어버렸다.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11쪽

 

 

표지도 서늘하고 첫 장부터 강력하다. 83년생이라는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최근에 내가 초본 세 장이 꽉 찰 정도로 이사다녔다는 걸 알게 되었다.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서울 언저리에서 보낸 사람들, 특히 평균보다 많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 가난이라 해도 정서의 결은 다르다. 전부터 속으로만 부모가 도시 빈민 출신인 사람과 빈농 출신인 사람의 정서는 어쩐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이 시인과 다른 시인을 비교하고픈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사지 않고 빌려봤는데 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손수건도 준다. 이런, 알라딘.

 

  보노보노 전권을 사서 읽고 말지, 개탄하며 역시 빌려본 책.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작가가  자신의 삶과 보노보노를 담담하게 연결짓는 부분.

 

  아, 이런 컷도 있었나 싶어 다시 보노보노를 들추어보게 된다.

 

  울 아들과 딸이 방학 내내 요즘도 보노보노를 닳토록 읽고 있다.

 

  이상한 포즈도 따라하고 너부리의 다리 조르기도 가끔 밤에 한다.

 

초4인 아들한테 다리 조르기 당하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다.

 

역시나 비어컵이 탐난다. 이런, 알라딘.

 

  역시나 빨강머리 앤을 보고 말지,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옮겨둔 화면, 대사들이 다 기억이 난다. 그건 내가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육아로 지친 시기에 다운받아둔 앤을 멍때리며  봐서 그런가봉가. (아빠 어디가 할 시기인가)

 

 작가가 나이들수록 마릴라 아줌마도 이해된다는 부분도 대공감.

 

 어려서는 앤에 푹 빠졌지만 아이 낳고 나서는 매튜와 마릴라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해보게 된다.

 

 

생물학적 엄마, 아빠가 아닌 핏줄로 얽히지 않은 양육자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엉뚱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앤을 어떻게 감당한 건지. 게다가 마릴라는 편두통을 앓고 있기도 한데.

 

둘리의 고길동이 이해되면 어른이 되기 시작한 거라고 하지. 앤을 좋아하지만 엄격하게 대한 마릴라 아줌마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딸이 2학년이라 언제 봐야지 했는데 <플랜더스의 개> 보고 펑펑 울며 힘들어하던 기억이 나서 어떨까 싶다. 맘이 여리고 요즘 부쩍 고아되면 어쩌나 불안에 가득 차 있어서.

 

<언어의 온도>가 대출중이라 읽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돌아볼 구절이 많았다.

 

읽는 동안 내가 얼마나 잘 경청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정자에서 어르신들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서로 자기 얘기만 하신다. 안 그러신 분도 많지만.

 

잘 듣고 오래 생각해서 이야기해야겠다.

 

너무 가볍다, 뻔하다 식상하다는 평이 있는데 바른 말은 원래 그렇게 들리는 법이다.

 

 

유행하는 에세이들을 보니 우리?가 얼마나 지쳐 있나 알 수 있었다. 품격 없는 말에 쉽게 상처 입고 어린시절 향수로 남아 있는 애니로부터 위안을 구한다. 마흔이 넘어서도 앳된 얼굴의 군인을 굳이 군인 아저씨라고 하고 ㅜ.ㅠ 엄마, 왜 군인 아저씨야. 엄마가 더 늙었는데 (안다. 너무나 진실한 딸아)

 

먼 지역에서 근무를 마치고 온 애들아빠는 집에 오면 별말없이 컴퓨터 방에 박혀서 영화를 보거나 예능을 보거나 바둑채널을 본다.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다.

 

가벼우면 어떤가, 에세이면 어떤가.

 

오히려 요즘은 책 보는 것보다  예능 보는 게 더 무겁고 버겁다.

 

평균이 누릴 수 없는 삶이 끝없이 펼쳐진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토크쇼에 나와 저마다 특별한 친분을 과시한다.

 

또 너무나 귀엽긴 하지만 키우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남의 아이들이 예능을 점령했다.

 

 

*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빌려보고 사서도 보고 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쉬어야겠다.

 

도서관 가는 길에

 

그리고 층고가 높고 안락한 의자가 많은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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