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디무빙 - 소설가 김중혁의 몸 에세이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요새 서울 가느라 혼자 기차를 타는 일이 잦은데 옆자리 할아버지가 앉으실 때부터 약간 자리 침범해 앉으시고 해서 잘 앉아 달라 부탁드렸다. 그런데도 자꾸 들썩거리다 엉덩이 닿으려 해서 각자 칸에 잘 앉아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그랬더니 내가 언제 닿기라도 했냐 이상한 여자다 소리소리 지르고.
창피해서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시라 하고 벨도 진동을 못하셔서 자꾸 울리는 것 같길래 바꾸어드렸다. 어르신, 부탁드린 거니 흥분하지 마세요, 하며. 흠. 나도 이젠 차분해져서 다행이야. 진짜 성적인 느낌보다는 불편해서였는데 A로 말해도 B로 듣게 되는 상황이니. 다음에는 애초에 승무원에게 조용히 말해서 자리를 바꾸어가야겠다.
참으로 난감하고 화나는 상황이지만 이 산문집을 읽고 있어서 진정할 수 있었다.
1부 이 몸으로 말하자면
이 부위를 개발하여 면적을 넓힌 사람에게는 '어깨 깡패'라는 별칭을 부여하며, 다른 폭력은 쓰지도 않은 채 이 부위만으로 사람을 겁주는 부류의 사람들을 '어깨'라고 부른다.
신체의 중요한 부위이지만,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사람들이 '머리 어깨 무릎 발'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머리와 무릎과 발은 정확하게 지칭하는 반면 어깨는 대충 훑고 지나가는 일이 잦다. p.73
소설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겨울잠을 자야 할 처지였다. 왼쪽 어깨는 화강암처럼 굳어 있어서 곧바로 잘라 내 비석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p. 82
어깨 깡패, 쩍벌남 님이 나이 들면 저렇게 된다. 그 난리를 겪고도 내가 미소 지으며 책을 보니 아까 어깨 할아버님은 책 제목이 알고 싶어 들썩들썩.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한 아재 개그, 아재 감성이 계속 이어진다.
종아리
무릎과 발목 사이의 다리 뒤쪽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포유류인 인간의 몸에 유일하게 알이 꽉 차는 부위이기도 하다....종아리 뒤쪽의 살이 볼록한 부분을 장딴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좋은 단지'라는 뜻으로 조상들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처럼 생긴 우리의 다리를 단지에 담긴 무에 비유함으로써, 무처럼 생긴 다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준다. p.75
턱
턱 돌아가는 수가 있다는 것은 '너의 아랫니를 모두 뽑히게 만들어서 너의 턱을 유아기 상태로 돌아가게 만들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p.77
처음에 작가님이 수영을 배우러 가서 벗은 몸에 익숙해지는 것도 힘든데 벗은 몸을 움직이기까지 해야했다, 에서 뿜기 시작해서 자주 들썩거렸다.
간단한 문제다.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면 오른손이 왼손을 믿게 되고 물에 뜰 수 있게 된다......수영이 잘 늘지 않을 때마다 저 말을 생각했다. 오른손이 왼손을 믿도록,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그 말을 생각하면 몸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p. 22-23
나도 요즘 자주 어깨에 힘이 들어가 생활이 뻣뻣해진듯하다. 유연성을 잃고 매사 너무 심각해졌다.
스트레칭을 하면 몸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많은 부분들로 연결되어 있는지, 얼마나 뻣뻣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인간은 어쩌면 부드러운 존재로 태어나 점차 딱딱해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p. 84-85
원래 이 부분은 삽화가 멋지다. 몸에 대한 설명에도 삽화가 곁들여 있는데 웹툰 작가하셔도 좋을 만큼 글과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다.
2부 발뒤꿈치를 아름다운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
최근엔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 영화를 통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많이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에 대한 강박이 복종적인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제시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발에 집착하는 남성들은 여성에게 굴복당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채찍을 들고 굽 놓은 부츠를 신고 발가벗은 남자 위에 군림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남자들은 흥분한다. p.98
작가님은 소심하게 하이힐에 찔리면 아프겠다는 생각을 하신다고 ㅋㅋ 남자의 팔 페티시를 유발하는 데 발냄새가 크게 작용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외에도 발 페티시가 있는 남자들은 구두 디자인과 여성의 성적 경험을 동일시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파인 구두를 통해 보이는 발가락 골이 여성의 가슴골을 닮았다니 참 그쪽으로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구나, 남자들은. 물론 일부겠지만.
그야말로 '알쓸신잡'이지만 소개된 영화나 책을 한번쯤은 보고 싶어졌다.
3부 아름답고 슬프고 경쾌하게 비틀거린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를 보고 하루에 그 날의 1초씩 찍어 1년치 영상을 만들어본다는 시도가 훌륭했다. 물론 하루의 1초를 선정하기도 쉽지 않고 매일 찍기도 힘들겠지만 그런 노력들이 우리를 좀더 능동적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하늘 높이 던진 야구공 같은 존재들이다. 끝도 없이 높이, 아주 높이 하늘로 올라가다 어느 순간 정점에서 잠시 머물곤 곧장 아래로 추락한다.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의 퍼트리샤 아퀘트는 아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내며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라고 소리지르며 운다. 추락을 앞둔 야구공의 고백이다.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누구나 뭔가 더 있을 줄 아니까 사는 거지. p.167
이 책에 많은 영화가 소개되지만 이 구절 때문에라도 <보이 후드>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인생을 좀더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될 듯하다.
4부 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4부에서 문신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장교는 죄인의 등에 죄목을 12시간 동안 바늘로 찔러가며 새긴다. 판결 내용을 알 수 없지 않냐고 하니 알려줘봐야 소용이 없고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아야 한다고! 영화 <와일드>에서도 남녀가 이혼 기념으로 문신을 새긴다. 철없는 시절에 '아모르 파티'를 새기고 싶었던 적이 잠시 있었는데 요새 노래 아모르 파티가 유행하는 걸 보고 하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이효리 영향으로 처자들이 문신을 아무래도 손목이나 발목에 새기는 경우가 많은데 가늘고 예쁘게 새기면 여리여리해 보여서가 아닐까?
아니면 가장 연약해 보이는 데이니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걸까?
손목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붙잡는 이유는 인체에서 가장 연약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손목을 붙잡는 것은 '내가 당신을 구하겠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 정작 남자들은 여자의 손목을 붙잡은 후에는 '맨스플레인'에 주력한다는 통계가 있다. 자살할 때에도 이 부위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손목이 신체 중에서 흉터를 감추기 가장 힘든 부위이므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p.271
물론 이치에는 닿지 않는 설명이지만 남자들의 심리를 잘 아는듯하다. 1부-4부 내내 이렇게 간간이 인체 사전이 등장하는데 '아재 감성'이지만 나도 옛날 사람이라 재미 있게 보았다.
<바디무빙> 역시 김중혁 작가님은 역시 산문이지, 라고 할 만큼 잡다하고 유익했다. 어떤 순간에 어느 페이지를 펴든 잠시 웃을 수 있다. 자려고 누웠다가 뜬금없이 <내숭고환 자위행위> 이 노래를 유튜브에 검색하기도 하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의 발목에 걸린 발찌를 보거나 할 때 발 페티쉬에 대한 주장이 생각나 웃기도 한다.
아직 인생의 비밀 같은 것은
전혀 모를 나이이고,
앞으로도 모를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지만,
죽을 때까지 팔다리를 흔들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버둥거리기보다
춤을 추며 살고 싶다.
춤을 추며 죽고 싶다.
어깨에 힘빼고 가볍게 살 것이다.
나 자신이나 타인의 몸에 대해, 접촉에 대해 좀더 관대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