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아직은 투병 및 간병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고 반찬값도 벌어야 해서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수업 노동을 하는 중이기도 하다. 글을 쓸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 그리고 이어질 글이 엄청 후질 수 있다는 변명이기도 하다.

 

독립서점 때문에 인스타를 하던 중 최초딩 님을 팔로우 하게 되었다. 초딩님의 절절한 간병기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이 글을 쓰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더 주무시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쪽잠보다는 때로는 그런 토로가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지.

 

힘들던 어느 날 나 역시 전원기라는 긴 글을 썼다. 누군가에게 보일 기회가 있어서 보여드리고 혹독한 평?(이런 류의 글은 너무나 흔하다)을 받기도 했지만, 적막한 서재에 먼지를 떠는 기분으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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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기 1

 

 

어릴 때 즐겨보던 전원 일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전원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한가로운 자연을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엄마가 자주 그리고 오래 편찮으시게 된 이후로는 전원(병원을 옮김)’은 나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낱말이 되었다.

    

 

2월 말 평안한 주말 저녁 엄마가 계시는 요양병원에서 다급하게 보호자를 찾았다. 스마트폰 스피커폰 너머로 익숙한 담당 간호사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으며 모든 생체 징후 수치들이 좋지 않다면서 대형 병원으로 응급실로 급히 옮겨야 한다고 하셨다. 코로나 19가 점차 팬데믹화되며 맹렬히 세를 확장하던 때로 요양병원에서도 면회를 금지하여 근 한 달을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부평구에 사는 여동생이 엄마를 구로구의 요양병원에서 부천성모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겼다. 경기도 광주도 아닌 광주광역시에 사는 우리 가족은 급히 야밤에 고속도로를 탔다. 임종을 못 지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만 그저 흘렀다.

 

병원에 도착하자 보호자 1인 외에 다른 가족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여동생과 우리아이들, 남편을 돌려보내고 나홀로 응급실에 남았다. 응급실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환자들이 코로나 19 검사를 받아야 해서 기도삽관을 한 채 고통스러워 하는 엄마와 응급실에 남았다.

 

급하게 따뜻한 남쪽에서 추운 윗지방으로 온 것이라 그런지 2월 말 응급실은 춥고 적막했다. 응급의학과 교수님이 계속 엄마만 주시하셨고 전광판에 위중한 환자임을 알리는 표식이 되어 있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잘 지내는 편이시라는 이야기만 들어서 마르고 욕창이 생긴데다 이렇게 급성 폐색전증으로 기도삽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계속 눈물이 흐르고 심장이 조이는 듯 아파왔다. 간만에 본 엄마는 몹시 마르고 온 피부가 버짐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 기도삽관의 고통이 엄청나 계속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온몸을 뒤틀고 계셨다. 그간 여러 힘든 모습을 보아왔지만 단연코 이번이 제일 고통스러워보였다.

 

다음날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코로나 음성이라는 결과가 나와 엄마는 중환자실로 가시게 되었다. 사실 2년 전에도 중환자실에 며칠 계셨던 터라 이번에도 꼭 회복하실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어머니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내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도 부끄럽지만 밝혀본다. 

 

그 기간에 나는 최근에 상을 치른 친구들에게 전화해 장례식장은 어떻게 알아보고 부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무심한 친구였던 내게 어릴 적 친구였던 남사친들은 친절하고 상세하게 자신들의 부모님의 투병기와 장례절차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성당 친구들이지만 장례는 일반 식장에서 했고, 장례식장 메뉴 중에 뺄 것이 많다는 팁을 주었다. 특히 전이나 떡이 많이 남아 버리니 많이 하지 말라고 했다. 수량 체크 잘하라는 것은 기본. 장례 절차를 적어둔 블로그를 열어 노잣돈 많이 넣어봐야 중간에 슬쩍 사라지니 부모님 노잣돈이나 금붙이를 함께 묻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글까지 읽고 있었다.

 

장례 절차만 읽다가 이러다 진짜 이상해질 듯해서 폐색전증 치료와 예후에 대해 읽어보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생의 말기에 걸린 적이 있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누워만 계시다 혈전이 생겨 여기저기 혈관을 막기도 하는 병이라고 한다. 엄마의 경우 혈전이 폐로 가는 곳을 막아 폐색전증이 된 것이다. 치료가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재발이 잦다고 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아 막막했다. 정겹게 손을 잡고 이런저런 검사실 복도를 다니는 어르신들과 홀로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엄마가 대비되어 그저 눈물만 흘렀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항상 마스크를 쓰게 되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도 생각은 돌고돌아 이 시국에 진짜 가시면 엄마가 너무 쓸쓸하실 것 같다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관용구로 뼈에 사무칠 정도로 회한이 들었다. 진짜로 종아리 뒷편이 당기고 머리가 울렸다. 접수처며 검사실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잠을 못자고 울었으니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러다가 진짜 돌아가시면 책에 나오는 대로 하늘이 무너질듯하겠지. 하지만 곧 이어 천만 원이 넘는다는 장례비와 코로나도 오지 못할 조문객들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니 주치의 선생님이 나오셔서 엄마 상태를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2년 전과 달리 코로나로 가족도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면회할 수 없다며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하릴없이 동생 집에 가니 아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휴대폰을 보거나 아주 어린 이종사촌과 놀아주고 있었다. 꼬박 하룻밤을 응급실에서 지새운 탓인지 일찍 잠이 들어 새벽에 잠이 깨어 6시에 무작정 부천성모병원으로 향했다. 면회도 되지 않는 중환자실 앞에서 8시경이 되니 교수님과 회진을 도는 무리들이 보였다.

 

뒤이어 한 떼의 대가족이 손수건을 손에 들고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제 간신히 막아두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지면서 그 가족들 곁에서 먼 친척이라도 되는 양 함께 울게 되었다. 몇 분 후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진짜 임종하실 것 같다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때 중환자실 너머에 계시던 우리 엄마 담당 간호사님이 예외적으로 나도 잠시 엄마를 보고 가도 된다고 하셨다. 명부를 작성하고 손을 소독하고 엄마 병상으로 향했다. 기도에서 관을 제거한 상태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계셨고 이틀 전과는 달리 표정에도 한결 생기가 돌았다.

 

좀 어떠시냐는 나의 첫 질문에 우리 엄마의 첫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 성모 의사들이 핸섬하고 젠틀하잖아. 좋아.”

그 순간 안도하면서도 아득해졌다. 진짜 사고뭉치 우리 엄마로 돌아온 거 맞네.

 

밖에서 마음 졸일 가족들이 걱정되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진상짓을 나도 모르게 했지만 찍은 2초간의 영상을 삭제하지 않아도 되니(의료진은 엄마가 찍힌 자체를 모르고 계셨다. 급하게 제지하셨고 나도 사과를 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걱정하시는 이모님들과 여동생에게 전송하고 버스를 탔다.

 

환승하는 지점에 마침 버거킹이 있어 아이들에게 줄 햄버거와 음료를 사서 버스에 올랐다. 내릴 때 여러 짐을 허둥지둥 챙기다가 그만 콜라를 쏟아버렸다. 아저씨의 지청구를 뒤로 하고 내리면서 얼른 아이들 먹여서 진짜 우리집으로 다시 갈 궁리만 했다. ‘이제 얼른 버거를 먹이고 콜택시를 부르고 고속버스 뒷좌석을 앱으로 예매하면 10프로 싸니 얼른 해야 되겠지. 아차차. 마스크도 더 사야 하는데 신애한테 얻어야지

 

버거를 나누어주고 다 먹을 시간이 없어 밖으로 무작정 나왔다. 코로나 19로 고속도 하루에 두 번 다니고 콜택시 전화도 연결이 안 되어 간신히 차를 잡아타고 아슬아슬하게 세 식구가 고속버스에 올랐다. 두 번 다시 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이상하게 엄마가 편찮으셔서 친정동네에 오면 두 번 다시 집에 못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버스를 잡아타고 나니 맥이 풀렸다.

 

나의 며칠간의 행적을 더듬으니 한없이 창피해서 누군가에게 언젠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는 집에 와서 동생에게 마구 떠들어댔다. 내 수준이 이렇군, 하는 생각에 허탈해서 웃었다.

 

그렇지만 헛헛한 웃음도 오래가지 않았고 미간에 다시 주름을 만들게 되었다.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가실지 또 그곳에서는 어느 병원으로 옮길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상한 확신이 나를 감쌌다. 우리 엄마 아직은 그래도 가시지 않을 거야. 안도되면서 두려운 이 감정 누가 또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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