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모임에서 <유열의 음악앨범>을 보러 가자고 해서 별생각 없이 보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보다는 벌새가 보고 싶었지만, 따라가서 보게 되었다. 정지우 감독 영화인지도 처음에는 모르고 봤다.

 

실은 요즘 대세인 정해인 배우가 나오는 멜로 영화라길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김고은 배우가 나온다니 그건 좋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보면서 줄줄 울었다. 내가 이런 멜로?를 보며 울 줄이야.

 

옆에 앉은 분이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새 회원이라 무지 당황스러웠다. 이분만 아니었다면 오열을 했을 수도.

 

줄거리는 단순하다. 94년에 75년생인 미수와 현우가 처음 만나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이야기이다.  너무 우연에 기대어 개연성이 떨어지고 전개가 느슨하다, 통칭 노잼 영화라는 평이 난무하고 있다.

 

잘 봤다는 분들은 다 나처럼 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분들.

 

그 세대가 한 번은 들어본듯한 가요들과 통신 기기들이 등장한다. 노래를 듣고 각 시대의 메신저를 떠올리며 아, 나도 전에 저렇게 엇갈린 적이 있지 이런 상념에 젖게 된다.

 

삐삐를 차고 대학에 들어가 벽돌폰과 시티폰을 거쳐 폴더폰으로 가던 시기. 세기말 감수성으로 첨단 기기를 조작하며 살고 있지만 구제금융의 여파를 온몸으로 겪으며 가장 춥고 쓰라린 20대를 보내던 그때가 아련하기만 하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나오면서 이제는 박제가 된 듯 내 고유의 기억마저 희미해져 간다.

조금은 분명이 다른 구석이 있는데 왜 저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특히 뭔가 공동체 정서가 남아 있던 시기라고 묘사하는 부분들이 나는 많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 즈음 운동권이 쇠퇴하고 학부제가 도입되어 엄청 개인화 파편화되던 시기였는데 나만 빼고 다들 저렇게 즐겁게 대학에 다닌 것일까.

 

20대 초에 세상에 태어나 먹을 수 있는 김밥은 다 먹은듯하고 혼밥은 일상이었던 내 대학생활과 응답하라 시리즈를 대비해보면 너무나 다르다.

*

 

미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친가족처럼 지내는 빵집 언니와 잔잔한 일상을 이어나가던 중에 현우를 우연히 만나 활력을 얻는다. 이 정도일 뿐인데 후에 둘이 몇 년 만에 만나 갑자기 집에 초대하는 것이 많이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90년대는 그럴 수도 있다고 해두자.

 

삐삐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약속은 어긋나기 일쑤였고 우연히 어디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운명이라고 여기던 그런 세대였다.

 

미수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잠시 비쳤던 학관과 미수가 안정적으로 취직했다고 여기며 처음 들어섰던 사보 편집부의 낙후된 모습에 그때부터 줄줄 운 것 같다.

 

늘 내 기억 속에서는 서늘했던 모교의 오래된 여러 건물을 보니 반가웠고, 졸업 후 마주한 첫 직장이 <아들과 딸> 후남이 출판사와 분위기가 비슷해 크게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대와 다른 현실을 외면하려고 동호회를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시기이도 하다.

 

글자공장소녀나 무의탁이라는 익명을 쓰던 시기.

내가 후져도 이렇게 후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수는 현우가 전화를 받지 않아 약속이 깨지고 나니 지금은 후져서 만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한다. 좋아졌을 때 보자고 했던가.

 

나도 그때는 어긋나는 인연들을 그런 말로 위무하며 넘어간 듯하다. 지금은 내 형편이, 처지가 말이 아니니 다음에 좀더 나아졌을 때 마주치면 좋겠다고.

 

퇴근하고 나서 들렀던 종로의 어학원과 낙원 상가 등 옛날 서울 모습을 보니 반갑고 뭉클해서 한참 먹먹했다. 

 

 

그 시절의 영풍이나 종로 혹은 강남 교보에서 이런저런 약속을 했던 것이 전생의 기억 같다.

 

 

 

*

 

이들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때 유열의 음악앨범이 매개가 되는데 사실 오전시간대라 이 프로그램을 학생들이 진지하게 듣기는 힘들었다. 나만 해도 제대로 들은 기억이 없다. 대개는 밤 시간대 배유정의 영화음악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더 많을 듯.

 

이 영화 장르를 멜로라고 하는데 난 멜로보다는 성장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결말은 좀 많이 아쉽다. 

<봄날은 간다>와 같이 처리하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

 

해피엔딩 디엔에이 탑재한 뼛속 깊이 한국인인 나이지만 미수가 보이는 라디오 음악앨범 메모만 보고 다시 온 힘을 다해 현우에게 전력 질주하는 모습은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 

 

사장님 차를 뒤쫓으며 절절하게 따라왔던 현우에게 "뛰지마, 다쳐"라고 했던 미수가 그렇게 절절하게 다시 뛰어오는 게 너무나 이상했다.

 

다만 느끼한 사장님을 연기한 박해준 배우님의 연기가 좋았다. 미수가 현우와 헤어지는 모습까지 귀여워하며 바라보는 시선이 탁월했다.

 

미수가 현우를 다시 만나려고 대교를 달릴 때  아줌마 마음으로 그냥 다시 돌아가, 미수야, 별거없어. 베이커리를 지켜, 하기도. ㅋ 

 

 

 

*

 

어제는 너무나 보고 싶었던 <4등>을 겨우겨우 봤다.

 

<유열의....>에서 느끼한 사장님으로 분한 박해준 배우는 4등에서는 살벌한 폭력 교사로 등장한다. 천재 선수였지만 강압적인 지도와 매가 싫어 달아났던 그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매를 자연스럽게 든다.

 

대회에서 메달권이 아닌 4등만 하던 준호가 코치를 만나 맞으며 훈련을 강행하는 모습도 괴로웠지만 준호 엄마의 말투, 집착 하나하나가 끔찍하기만 했다. 매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싫다는 엄마. 맞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성적을 위해 외면하는 엄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시대에 아이를 키우며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준호 엄마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했다.

 

 

*

 

영화를 보고 나니 어찌 되었든 그 시절 나만의 배경음악을 만들어두고 듣게 된다.

 

음악이란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시절의 나로 잠시 데려가준다.

 

노이즈의 <상상 속의 그대>를 들으며 국철을 타고 학교로 갔던 여고생이 수십 년 후 어느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이 노래를 듣고는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히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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