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다나스 영향으로 비가 퍼붓고 바람이 불던 지난 토요일, 광주에 편혜영 작가님이 오셨다.
전작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서늘한 글을 쓰시는데 표지 사진을 보면 엄청 단아하고 밝아 보여서 그 괴리감은 뭘까 항상 궁금했던 작가였다.
집에서 택시 기본 요금 정도의 거리라서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놀라운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스타벅스와 개인 카페를 혼합한 듯한 다양한 의자들이 있고 넓고 쾌적해서 신기했다. 사실 지역의 오래된 곳이라 별 기대는 없었는데 놀랍도록 달라져 있었다.
하도 일찍 와서 그런지 혹시 작가님 관계자냐고 행사 진행하시는 분이 물었다. ㅋ
10시쯤 작가님이 등장하셨는데 김애란 작가님이 <잊기 좋은 이름>에 묘사한 그대로였다. 실물이 훨씬 낫고 시종일관 미소.
작가의 인상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조연을 맡은 배우 이미지였다. 흰색 트위드 자켓과 잘 맞는 청바지 그리고 검정색 토오픈 슈즈 위로 단정하게 페디큐어를 받은 발가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행을 맡은 분은 아마도 작가님 에이전시나 출판사 관계자인 듯한데 팬심을 드러내면서 매끄럽게 진행하셨다.
일단 광주에서 진행하는 만큼 작가님 부모님의 고향이 화순이라는 것으로 친근함을 표했다. 화순에서 서울로 가셨다는데 아마 댐이 생겨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부모님이 예전 사시던 데 찾는다고 엄청 많은 가족을 이끌고 오셨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하시는데 살짝 그 풍경이 그려져 혼자 웃었다.
실물이 진짜 미인이시라는 것과 수상 이력을 강조하시는 데 작가님은 민망하지만 담담하고 당당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질문마다 적정한 답변을 내놓으셨다.
사전에 준비되어서 그런지 그간의 기사 인터뷰로 들어본 듯한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질병에 관한 이야기나 간병 에피소드를 실제로 거의 겪어보지 않으셨다는 데 놀랐다. 간접 경험만으로도 그렇게 치밀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것이 프로라는 것이겠지.
앞으로 쓰실 이야기는 치매, 기억을 잃어가는 이야기나 간병 살인 등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기사를 통해 짧게 드러나는 여러 사람의 인생의 이면에는 어떤 서사가 있을지 나도 궁금하기는 하다.
내 옆에 소년 이로의 표지색과 비슷한 인디핑크 티를 입은 문청이 한 분 계셨는데 작가님에게 어른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귀엽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했다.
작가님의 답이 명쾌했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미 어른이시잖아요? 라고 가볍게 토스하셨다.
이 반응이 매력적이라 그 이후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두운 이야기를 쓰면 힘들지 않냐, 고 하는데 소설 쓰기의 몰입과 배우의 몰입은 다르다는 것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셨다.
아, 그렇지 이야기일 뿐이지.
작가님과 사회자의 대담을 듣고 질문 몇 개를 듣고 나니 한 시간 사십분여가 훌쩍 지나갔고 작가님은 마지막 마무리도 깔끔하셨다.
필리핀에서 제출한 이름인 이번 태풍 명칭 다나스는 경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님에게 이번 강연이 좋은 경험이었고 외롭게 소설을 쓸 때 이곳에 모인 구체적인 독자들의 모습을 기억하겠다는 말씀으로 끝을 내셨다.
강연이 끝나고 도시락을 먹고 다음 프로그램을 했다.
원래 딸은 같은 층에서 하는 아이들 행사인 이현 작가님과의 캠프를 하려고 했는데 막판에 딸이 싫다고 해서 혼자 온 것이었다.
해서 오래전 예능 짝과 같이 혼자 도시락을 먹는 굴욕을 ㅜ.ㅠ
본깨적 독서법에 따라 <당신이 옳다>를 함께 읽어가는 시간이었다.
각 모둠의 강사님들은 전에 양재나비라는 독서포럼의 지역 분과인 빛고을나비 분들이었다. 우리 모둠은 행사를 진행하는 요원인 청년 세 명, 강사님, 30-40대이시고 초등 자녀를 둔 분, 60대? 교수님 그리고 나 이렇게 구성이 다양했다.
본.깨.적 독서법에서
본 것은 저자의 주장이나 자신이 알고 있던 것
깨달은 것은 책을 읽으며 내가 알게 된 것
적용할 것은 나의 삶에서 앞으로 실천할 부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에 교과교수법에서 배운 KWL 읽기 전략을 변용한 듯하여 아주 새롭지는 않았고, 나비 모임은 주로 자기계발서나 건강도서를 많이 읽는 모임이라고 하셨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중년이 되고 보니 읽을 필요가 있는 책들은 가끔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임에서 열광하는 책들이 난 아직은 낯설다.
<당신이 옳다>는
이런 캠프용으로 무난하게 잘 선택된 도서 같다.
*
<당신이 옳다>를 참여자 모두 가져온 것이 아니어서 청년들은 다른 책을 보고 발표했다.
청년들의 픽 !
재미있어 보여 나중에 읽어볼 생각이다.
원래 저녁 여섯 시까지 진행되는 행사이지만 아이들끼리만 너무 오래 있어
발표는 못 하고 일찍 일어섰다.
교수님이 발표를 이 '어머님'이 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40대인 나보다 훨씬 더 연장자인 분이 어머님이라 하시는 게 거북했지만
그냥 있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약속 있어 가실 때
나도 그 '어머님'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밥 해주러 가야 해서 (행사 온다고 아이들 피자로 때움)
묻어서 함께 막간의 시간에 행사장을 나왔다.
명찰에 이름도 있는데
아이를 기른다고 말하는 순간 누구에게나 어머님이 되어버리는 현실.
풋.
진짜 마트나 은행에서는 고객님 혹은 000 님
모임에서는 이름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고 싶다.
어머님이나 여사님 듣는 순간 소오름.
60대-80대 분들도 여사님 어머님 어르신
진짜 싫어하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바뀌질 않네
택시를 잡았는데 다행히 말이 없는 분이셨고
집에 도착하니 집안 꼴은 내가 익히 상상한 그 꼴이었지만
안락했다.
비가 와서 장도 못 보고 해서 집에 있는 자투리 채소를 모아 짜장밥을 해주고
<밤이 지나간다>를 읽었다.
이미 읽은 단편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는데
작가님을 보고 나니 역시 몰입이 안 된다.
그런데도 행사가 있으면 가게 된다.
*
나름대로 긴장을 했는지 간만에 숙면을 했다.
읽고 쓰는 소수의 사람들을 그래도 가끔은 만나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된다.
그 경험으로 인한 긍정적, 부정적 감정 모두가 나를 만들어간다.
어제의 나와는 다른 그 어떤 존재로.
*
좀더 음식을 잘 챙겨먹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더 잘 듣자.
내가 가보지 않은 길, 읽지 않은 책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월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