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영화관에 두 번이나 갔다.
새로 CGV지점이 생겨 시사회가 있어 아무 정보도 없이 <나의 소녀 시대>를 보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소녀 류의 영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엔 너무 병맛 코드여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다 보니 대만의 학교도 우리나라 80-90년대의 하위 문화가 그대로 있었다. 교편을 든 선생님, 행운의 편지 같은 것이 대만이나 한국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의 학교문화가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 그대로 이식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아무튼 그런 하위문화 속에서도 아이들의 풋사랑은 싹튼다.
갑돌이와 갑순이 같은 엇갈린 사랑 이야기.
청춘영화의 흔한 클리셰.
아들은 어디에선가 클리셰라는 말을 주워 듣고는 줄곧 시도때도 없이 써먹으려고 든다. 말을 안 들어 뭐라고 하면 요즘 애들 클리셰지, 이러고 동생이랑 하도 티격태격해서 뭐라고 해도 현실 남매의 클리셰지, 이런 식이다.
중고등 때 남들 거쳐가는 할리퀸도 안 보았는데 다늦게 이런 영화들을 분기별로 꼭 보게 된다.
그때 보고 설레고 풋사랑도 했어야 했나.
중고등 때는 연예인 좋아하고 또래 남자애들 좋아하는 친구들을 좀 딱하게 보았는데 실은 가장 가여운 건 나였나봐.
이십대 중반에서야 바로 그냥 현실 연애
뒤이어 바로 결혼해서 그런지 청춘물에 빠질 때가 있다. 청춘만이 품을 수 있게 허락된 그런 감정들이 부럽고 아련한 것이다.
응사나 응팔 같은 것도 그래서 봤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오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준열배우 덕질 할 때 몸서리치며 운빨로맨스까지 본 건 엄청난 흑역사.
하지만
청춘시대 같은 잘만든 작품도 있기에 청춘물을 아예 안 볼 수는 없을듯하다.
*
지난 토요일에 딸아이 자격증 시험이 있어 교통문화연수원에 갔다. 마침 그 옆이 남편의 모교인 살레시오여서 학부모 가득한 홀에서 기다리느니 간만에? 교정 산책이라도 하자고 했다.
처음에 남편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다가 막상 교정에 들어서니 아련 열매 먹은듯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건물을 쓰고 있는데 예전엔 고등학교가 여기고 기숙사가 어디고 도서관이 어디였는지 열심히 알려주렸다. 메타세콰이어 뻗은 길이 멋져서 여기를 걸었겠네, 하니 학교 다닐 때는 없었던 길이라고 한다.
천주교 재단 학교라서 곳곳에 성인과 성모상이 있어 나에게는 보기 좋았다. 그리고 오솔길, 숲길도 많이 조성되어 있어 좋아 보였다. 이십 년이 훌쩍 지나 가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는지 계속 이 위치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열심히 둘러보는데 지킴이 아저씨가 오셔서 어떻게 오셨냐고 하시길래 졸업생이어서 한번 둘러보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남편이 아주 정색을 하고 나를 보며 '이 사람은 졸업생 아닙니다' 하는 것이다.
아무렴, 아저씨가 그걸 모르실까. 나만 혼자 빵 터져서 돌아서서 웃었다. 요즘 남성호르몬 뿜뿜 넘치는 중년이지만 남자양복 같은 체크상의를 입긴 했지만, 남고를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알 정도인데.
나오면서 내가 이십 년 전에는 이 길을 부인이랑 나중에 걸어볼 거라고 생각해봤냐고 하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다. 참 한결같은 사람. 늘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로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이 오래 시간을 보낸 장소를 같이 찾아다니면 그 시절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아련한 부분이 있다. 까까머리 중학생을 갓 벗어나 이 길을 코피를 닦아내며 들어서서는(고등학생일 때 코피를 자주 흘렸다고 한다) 꽉 짜인 일정을 보내고 집이 아닌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청했겠지.
그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남편의 평소 생활은 그 시절과 비슷하다. 가족과 떨어져서 일을 하고 혼자 저녁밥을 먹고 관사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 일상이 안쓰럽기도 해서 쉬는날에 최대한 잘 지내려 하지만 순간순간 감정이 널을 뛴다. 오전 산책을 잘 마치고 아이들과 다같이 어벤저스를 보러가서였다. 딸이 실수로 음료를 극장 복도에 쏟았는데 남편이 무안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마 남편은 애들이 극장에서 무얼 안 먹었으면 해서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나도 안 먹었으면 하지만 이제 엄마가 못 먹게 한다고 안 먹을 나이도 아니니) 딸이 위축되는 걸 보니 답답했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인데 여러 일이 많아 들뜬 하루였나보다. 그리고 쏟는 건 어른들도 가끔은 하는 실수인데 남편은 유독 쏟는 것에 민감하다. 일단 딸을 안심시키고 부자를 극장에 들여보냈다.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나서 치운다고 대걸레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미안하게스리 치워주셨다. (화를 내고 들어가기보다 조심하라고 선선하게 일러주고 같이 치우면 좋았겠지만 안 될 것을 알기에 먼저 가라고 함)
아이들과 남편은 디씨니 마블이니 하며 모조리 섭렵했지만 히어로물에 관심이 없기에 알라딘에서 시간을 보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빠와 아들은 집으로 가고 딸과 남아서 광주 프린지(거리극)를 보았다. 광주 프린지 페스티벌은 꽤 오래된 행사인데 이번은 딸에게 말은 못했지만 익숙해진 건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래도 서커스디랩이라는 팀의 이준상 씨의 중국요요 공연은 즐겁게 보았다.
서커스도 멋있지만 재치있는 입담에 모두가 모자에 지폐를 줄줄이.
특히 꼬마 관객들이 열성적으로 지폐를 넣었다.
이때
얘들아, 꼭 색이 파랑일 필요는 없어
아저씨 다른 색도 좋아해.
이런 드립은 어떻게 얻는 감각일까 ㅋ
연예인 관련 불쾌한 뉴스가 많은 요즘 이렇게 몸으로 부딪혀 관객과 직접 만나는 이들을 보며
아 저런 청춘들이 아직도 많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했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