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가족과 함평에 다녀왔다. 아이들이 저학년 때 열광했던 파충류생태관에 들렀고 근처에 있는 임시정부 국무의원 김철기념관에도 가보았다.

 

아이들이 고학년이라 그런지 이제 생물들을 봐도 호들갑 없이 역시 파충류라 다들 낮에 자네, 이런 감상이 전부였다.  파충류 생태관이 이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졸업하고 찾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한없이 작아보이듯이 아이들이 크고 다시 가본 그곳은 기대와 달랐다.

 

그래도 집에서는 거의 방에 박혀 있는 아들에게 학교생활의 한 조각을 전해들었다. 생물들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반에도 뭔가 웃지 않고 무표정으로 있을 때 억울하게 생긴 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아이스크림 먹다가 뿜을 뻔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아들의 독창적 표현이 아닌 요즘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인가보다. '억울하게 생긴'은 뭔가 시무룩크하고 찐따 같은? 그런 느낌)

 

 

김철기념관은 있다는 것만 알다 이번에 가보았는데 외진 곳인데 나름대로 규모는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한 곳이어서 김구 집무실, 임정의 부엌, 화장실, 독립투사의 방 등이 있었다. 3층 규모인데 계단이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이라 유아들에게는 위험해 보였다. 아이들을 오래 기르다 보니 이런 쪽으로만 생각이 풀가동. 

 

 

둘째줄 왼쪽 끝이 임정 국무위원 김철

 

@독립투사의 방 

 

 

잘 보고 나서 광주 근교 일몰로 유명한 함평 돌머리 해변을 가려고 했더니 이눔의 초딩이들 런닝맨 할 시간이라고 난리여서 돌아왔다. 미사 다녀와 밥도 집에서 먹고 고작 네 시간 외출했나보다. 그래도 입 나온 아이들 데리고 일몰을 봐야 아무 의미도 없기에 그냥 집으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어딘가를 가다보면 이런 식이어서 며칠 후 아이들 보내고 수업도 없는 날에 홀로 전주를 가보기로 했다. 강원권에 살 때도 아이들 보내고 강릉이나 원주를 가기도 했다. 진짜 가끔이지만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행선지를 정하고 그 순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가 있다는 건 전담육아로 인한 부담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숨통을 틔워 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 전주행 목적지는 겹벚꽃으로 유명한 전주 완산동산, 그리고 독립서점 에이커북스토어였다. 아이들이 가고 빨리 버스를 탄다고 탔지만 여기저기 이동시간이 있어 11시 반 정도에나 전주에 도착해 택시를 탔다. 여행자임을 알아보고 왜 혼자 다니냐, 하시더니 전주에 대해서 거의 문화해설사 수준으로 이야기해주셨다. 원래는 택시를 타면 거의 말을 안 하는 편인데 나 역시 들떠서 그런지 아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듯하다. 맨스플레인과 오지랖의 어딘가였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기사님은 끈적거림?이 없는 고등학교 수학선생님 분위기로 전주 토박이만의 알짜 정보를 알려준다는 자부심에 차서 완산동산으로 가는 가장 평탄한 길 앞에 내려주셨다. 전에 검색했던 그 길이었다.

 

아가씨들 인스타에 자주 보이는 길.

역시 맞게 찾아왔구나.

 

흐린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엄청 많았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한데 사람이 별로 없이 호젓하고 경치까지 좋은 곳은 대한민국 아니 이 세상에 별로 없기에 이 정도로 만족한다. 겹벚꽃 길이 펼쳐져 있었고 마침 철쭉까지 같이 피어서 관용구대로 화사한 꽃대궐이었다.

 

 

 

 

 

 

 

 

흐리고 사진 기술이 별로라 꽃의 화사함이 잘 표현되지 않는 ㅜ.ㅠ

 

아가씨들은 주로 겹벚꽃 앞에서 가지를 살짝 부여잡거나 친구들과 약간 뒤돌아서서 손을 뻗거나 하며 사진을 찍었고 50-60대 어머님들은 철쭉 앞에서 소심한 손하트를 하고 무릎을 구부리며 사진을 찍고 계셨다. 어정쩡한 나는 그냥 무리에 휩쓸려가며 사람이 덜 보이는 각도에서 사진을 찍다 포기하고 이런저런 꽃과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다. 

 

꽃은 이렇게나 고운데

아 이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같으니라구.

 

가지가 휘어지게 흐드러진 그 앞에서 그냥 찍어도 되는데 자기 머리에 화관처럼 드리운다고 막 가지를 당기는 사람, 펜스 안으로 들어가 꽃에 파묻히려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사진이 뭔지 참.

 

내가 대학 1학년 때 목놓아 불렀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진짜 아닙니다요.

 

꽃은 진상 꽃이 없고 다른 빛깔도 어우러지면 더더욱 아름답지만 사람은 어우러지면 가끔은 참 보기 싫게 각양각색.

그저 상춘객의 예의는 좀 지켰으면 한다.

 

*

 

안내문도 읽다보니 흥미로웠다.

 

김영섭 씨가 부인과 싸워가며 가꾸기는 했지만(월급의 대부분을 꽃에 써서 갈등이 있었다고 함)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소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어느 표지판에는 이 지역 조폭의 횡포를 보다 못해 학교 일진들이 조직이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현재도 여러 꽃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 겹벚꽃파와 철쭉파.

 

어머님들은 주로 색이 선명한 철쭉 앞에서 찍는 편이었고 아가씨들은 하늘거리는 긴원피스에 스니커즈를 신고 살짝 뒤돌아서서 겹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나이대는 철쭉으로 가고 있으나 아직은 겹벚꽃 앞에 서고 싶은 그런 마음.   

 

점심 시간이 지나니 근처 회사원들도 하산하기 시작했고 나도 충분히 보았기에 내려와 남부시장에서 콩나물국밥을 한 그릇 먹기로 했다. 가게는 많았는데 결국은 방송이 고른곳에 들어가 먹었다. 미식가가 아니라 그런지 익히 아는 맛이었다. 전국의 콩나물국밥집 체인들이 다 낼 수 있는 맛이었지만 내려오니 마침 비가 내렸고 간만에 많이 걸어서였는지 맛있게 먹었다. 

 

남부시장을 나와 익히 아는 그 한옥마을 먹거리길, 전동 성당에 접어들어들었다. 비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진짜 한산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아 경기전에 들어섰다.

사실 몇 번이나 아이들과 와서 따로 볼 건 없었지만, 비오는 날 경기전의 풀내음은 혼자 여행왔을 때나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산책하는 양인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니 나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이렇게 한가할 때 경기전 걸어보시니 다행이네요.

날좋은 주말에 이 거리는 먹거리장터이자 코스프레 행사장이거든요.

 

비오는 경기전 마당이 왜 이렇게 좋은지 생각해보니

비오는 날의 서울 고궁들과 비슷해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아이들과 하는 여행은 그 지역 풍광을 즐기고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그 풍광 속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아이들의 반응에만 집중하게 되어 나중에는 어디를 다녀왔는지조차 희미해진다는 게 가장 아쉬운 점이다.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부모들 생각 ? 착각 ? 이고 아직 취향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고역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면 아이가 신체적으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고 취향이 어느 정도 생겼을 때가 바람직한듯하다. 이런 것도 물론 다 겪어봐야 드는 생각이고 어릴 때는 그저 많이만 데리고 다니고 싶어서 눈물 바람도 많이한듯하다.      

 

 

경기전 마당에 좀더 있고 싶었지만 진짜 아이들 저녁을 해줄 시간이 되어서 터미널로 향했다. 목적했던 독립서점 에이커북에는 못 가고 전주숙헤어에서 유숙헤어로 넘어갈 시간이 되어 터미널 영풍문고를 잠시 둘러보았다.

 

집에 와 늦은 저녁을 차리기 전에 딸이 <스페인 하숙>을 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보기로 보라고 했다.

 

예능을 가능하면 안 보려고 했지만, 차선수와 유해진 조합이 유쾌해 보기로 했다. 유해진이 이런저런 걸 만들고 DIY 가구 이케요, 라고 하는데 매번 웃고 있는 난 뼛속깊이 아재다, 그냥.

 

농담을 듣고 모두가 썰렁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게 부장님의 웃음 포인트.

책으로 말하자면 베를린일기 같은 거.

 

<스페인 하숙>을 보다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이 진짜 궁금해졌다. 국토 종단? 횡단?도 많은데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걷기만 하는데 하는 못난 생각도 잠시 한 적이 있다. 그냥 꼭 그 길이어야 할 자신만의 이유가 있으면 가는 거다.

 

난 물론 내 재력이나 체력의 문제로 아마 국내 둘레길 정도만 걷게 될 테지만 사람은 다 상황이 다르니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은 멀리 걸어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도 아직 읽지 못했다.

오정희 신간 알림에 떠서 보게 되었다.

 

많은 석학들이나 작가들이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기보다는

내 시간이 되는 어느 날에 자주 떠나주어야겠다.

 

 

완주 천호성지,

도로공사수목원,

덕진공원 연꽃

선암사

 

 

메모장 목록을 작성해서

짬이 날 때

부지런히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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