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을 마치고 희망도서가 도착되었다고 해서 빌려왔다. 올해는 진짜 책을 덜 사고 특히 굿즈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번거롭지만 달마다 희망도서를 신청하기로 했다.

 

1월 초에 신청해 이제야 처리가 되어 받아본 <내 어머니 이야기>

 

잡지에서 단편을 보거나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연이어 보니 역시 놀랍다. 

 

백석의 섬세한 시어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토지나 혼불 같은 장대한 서사도 느껴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어제 저녁과 오늘 새벽에 걸쳐서 다 읽었다.

 

이북 출신으로 혈혈단신? 남한에 내려와 고생고생하시다가 자손들이 편히 모실 즈음 되어 거동이 불편해진 채로 오래 투병하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도 난다. 대학에 들어가 김기찬 사진집 시리즈에서 외할머니를 발견하고 서둘러 사진집을 덮었던 기억도 난다. 특별히 내 기원이나 뿌리에 관심을 둔 적도 없고 언제나 가난한 그들이 막연하게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구나.

 

작품의 완성도 의미 있지만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어머니와 딸에게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관심을 두고, 끝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정없는 손녀였던 나는 실향민 외할머니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드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계를 책임진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가 우리 자매와 외삼촌 자녀들 총 넷을 힘겹게 돌보셨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는 친손주만 예뻐한다고 여겼던 나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밖으로만 나돌았다.

 

가끔 할머니 부업을 돕다가 예전에 할머니가 이북에서 얼마나 잘 사셨는지 공산당이 얼마나 웃긴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때면 그냥 흘려들었다.

 

그 중 강하게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는 할머니집 개가 토한 것을 어떤 가난한 집에서 받아가 씻어서 끓여먹었다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

 

누구집 며느리가 어떻게 해서 소박 맞고 어떤 집은 아들이 몇인데 어떻게 죽고 어떻게 망하고 그런 이야기들.

 

일본 순사는 진짜 무섭고 피난길이 어찌나 춥고 무서운지 하는 이야기들이 신기하기보다는 지루했다. 빨리 이 방에서 나가 놀아야겠다는 생각뿐.

 

대강 듣는 척하는 사이 미취학이었던 사총동생들이 큰방 난로에 개미들을 올려두고 죽어가는 걸 보던 기억이 난다. 아주 작은 집개미가 까만 점이 되도록 죽어가는데도 별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나날들.

 

한번은 할머니가 손주들 영화를 보여주려고 테이프를 돌렸는데 외삼촌이 빌려다둔 변강쇠 시리즈여서 모두가 어어어 이게 뭐야 전설의 고향이 아니네 하기도 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사촌동생들에게 레고나 게임기도 있어서 같이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저 그렇게 마구잡이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시절이었다. 

 

할머니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아껴 살고 허황한 마음 품지 말고 도둑질 빼고는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업을 도와드리면 천 원씩 주셔서 그거 모아서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올 때 책상도 샀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밖으로 나도는 나와 달리 동생이 착실히 모은 액수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내 어머니 이야기>가 진짜 신기한 게 갑자기 통성기도같이 어린시절의 기억이 터져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고 보깁고 그리웁고 그렇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할머니표 이북 녹두부침개나 많이 해서 둔 탓에 그득그득 남아 곰팡이가 슨 떡으로 무지 맵게 해서 먹었던 겔포스맛? 나는 떡국떡 떡볶이도 기억난다. 손자 손녀들이 맛이 이상하다 투정하고 숟가락을 놓기 시작하면 부잣집 개가 토한 것도 먹고 살던 어려운 시절도 있는데 이건 너무 멀쩡한 거라며 홀로 잘 드셨다. 당시 지독한 굶주림을 겪은 어른들이 다 그러하듯 음식 버리는 걸 죄로 생각하시던 분이니 그렇다.  

 

외할머니 간병 문제로 외가 형제들 사이가 어느 정도 벌어지고 나서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2009년 둘째 낳고 이틀인가 되어서 돌아가셔서 장례식에도 못 가봐서 지금까지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외할머니도 외할머니이지만

엄마에 대한 감정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내 어머니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휴 한숨이 나는구나.

 

 

 

*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에게 살갑지 못하고 멀찍이 있어서 그런지 작가님이 어머님을 염려하고 일상을 잘 돌보는 모습에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할머니를 간병하며 겪었던 그 힘겨움,  노인과 함께하는 삶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기에 안타깝고 애잔하고 그렇다. 언젠가는 작가님이 훌훌 다 털어버리고 마음 편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실 수 있기를......

 

 

*

 

오늘 내가 사는 광주에는

장마같은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받아둔 희망도서가 그득그득하고

수업도 없는 날이라

한갓지고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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