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통 - 죽음을 보는 눈
구사카베 요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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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음을 보는 눈 [무통]

 

 

 

한여름에도 오싹 소름돋게 하는 책이 있어 다행이라고 할까요~~

역시 여름에 읽기에 제격인 스릴러!! [무통]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통증을 느낄 수 없는 기이한 인간이 나옵니다.

현직 의사인 작가가 쓴 것이라 그런지 뼈와 살과 피가 튀는 장면 묘사에 있어서 자비란 느낄 수 없군요.

엄청 후덜덜한 내용을 쓱~ 해치워 버립니다.

작가의 거침없는 장면전개가 압권이라고 할까요.

사전연재편을 읽고 너무너무 섬뜩했으면서도 뒷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지는 것은...

제 속에도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악마적인 면모가 들어 있다는 뜻일까요?

인간이기에 모두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작가가 잘 긁어서 일으켜세운 것일까요?

 

어쨌든...

처음 사건은 정말 잔혹하기 그지 없군요.

고베 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위에 있는 집.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집에서 4명의 일가족이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모두 둔기로 살해당했지만 아내와 남편의 얼굴은 테이프로 빙빙 감겨있고 아이들의 얼굴은 살해 당시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네요.

가족 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어머니를 기준으로 가족이 한 군데 모여 있는 모습...

아마도 범인은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피해의 처참함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나.

범인은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깨부쉈다. 마치 종이 상자라도 밟아 짓뭉개는 것처럼.

해부를 담당한 법의학 교수는 범인에게 정성결여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소견을 보였다.-20

 

S 사이즈 모자와 XL사이즈의 신발, 그리고 흉기로 쓰인 망치가 현장 증거로 남았지만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어려워 수사는 난항을 거듭합니다.

이 때...열네 살의 자폐소녀를 용의자라 말하는 한 통의 제보가 접수됩니다.

 

엄청난 범인의 존재를 암시한 사건 현장에서 느낀 무시무시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곧이어 묻지마 살인의 장면이 이어집니다. 한낮의 거리에서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릎을 높게 쳐들고 이리저리 부딪치며 걷던 한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무차별 살인을 감행합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의사 다메요리는 그의 미간에서 꿈틀거리듯 부풀어 오른 주름을 보고는 자신의 지갑을 찾아준 모자를 대피시켜 살인마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 주죠. 마흔일곱의 독신 의사인 다메요리는 사실, 사람을 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병을 알아내는 천재의사입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의사는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천재의사간의 대결을 작정이라도 한 듯, 똑같은 능력을 가진 의사가 한 명 더 나옵니다.

허름한 의원에서 진료하는 다메요리와는 달리 시라가미는 첫인상은 온화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목적을 위해 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지요.

시라가미 메디컬 센터 원장으로, 통증 없는 치료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이바라라는 선천성 무통증, 무모증, 첨두증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바라는 어쩐 일인지 시라가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데요~

무통증인 결함을 가진 이바라는 다행스럽게도 후각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시라가미의 온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선생님이 변하고 있다. 이바라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303

 

천재의사의 대결도 대결이지만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맞붙게 되는 걸까요?

이들의 접점은 맨 처음 나온 일가족 살해 사건의 범인과 또 한 명의 여인, 바로 다메요리의 지갑을 찾아준 인연으로 만나게 된 나미코 입니다.

 

형법 제 39조.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이를 벌하지 않는다. 심신박약자의 행위는, 그 형을 경감한다.

-20

 

들쑥날쑥하게 벌여져 있는 것만 같던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고 맨 처음 용의자가 심신상실 상태인 열네 살 소녀였다는 것에서 제기되는 의문도 슬슬 해답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즈음...

진짜 범인이 짠~ 하고 나타납니다.

천재의사간의 선악의 대결도 흥미진진하고 일본 형법의 모순과 불합리함에 고민하는 형사가 던지는 질문도 가볍지는 않네요.

초반 장면이 섬뜩하고 잔혹하기는 했지만 사회파 범죄소설의 요소를 갖춘 멋진 스릴러소설인 것 같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드한 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덕분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를 책을 읽으며 거뜬히 셀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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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칼럼 - 남무성, 볼륨 줄이고 세상과 소통하기
남무성 글.그림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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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음악 한 잔, 인생 한 잔 [한잔의 칼럼]

 

 

 

[Paint it rock]으로 만난 적 있는 작가 남무성의 책이다.

볼륨을 줄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의 글들은 지난 몇 년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칼럼에다 새로 쓴 몇 편을 골라 보탠 것이라 한다.

칼럼이라는 장르의 글을 관심 있게 읽지 않아서 어색하면 어쩌나..했는데 그냥 쓰윽 읽기에 편하다.

특히나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인 음악에 관한 내용을 버무려 놓아서

지루하지도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소주잔 하나에 들어가 있는 한 장 분량의 글.

그림이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작가가 전하려는 생각이라고 한다.

딱 소주잔만 한 정도 크기의 생각에 한잔 술로 털어버리면 될 이야기들을 담은 것이라며 겸양하는데...

자꾸 곱씹어 읽어보게 된다.

긴 글이 아니라도 사유를 담아내는 데에는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 끄적인 메모에

깨달음을 담아 내는 일,

참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한 글자라도 써보려고 하면 막히고 만다.

이 어려운 걸 해낸 작가에게 새삼 감탄하면서

그림과 글을 즐겁게 감상한다.

 

(재즈 월간지를 만들고 공연기획도 하고 음반 프로듀서도 하고 만화도 그리고 영화도 만들고..

정말 많은 것을 해낸 이 사람을 뭐라 불러야 하나...

스스로는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니 "작가"라 불러달라고 말한다. )

 

에릭 클랩튼의 '레일라'를 라디오에서 들으며 DJ가 주절주절 얘기했던 것이 칼럼 한 꼭지 덕에 기억이 난다.

에릭 클랩튼의 러브 스토리 운운하는 것이었는데, 작가의 글로 보니 확실히 떠오른다. 친구, 그것도 대단히 유명한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레일라'라는 명곡 덕에 막장 드라마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책에 음악을 담은 하루키의 재즈 사랑은 유명하다. 막연한 동경을 품으며 책에 나오는 음악들을 찾아서라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는데, 그런데...

하루키가 소개하는 음악 모두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한 작가 덕에

눈에 씌인 콩깍지가 핑~ 날아가버린다.

다수가 좋아한다고 햐여 무조건 따르는 것은 좋지 않다. ^^

 

 

 

음악 인생에 한 잔, 어제와 오늘에 한 잔, 전원생활에 한 잔.

딱 소주잔 하나만큼에 깃들일 만한 이야기들이라 부담없이 읽고 즐길 수 있다.

중간 중간에 곁들여지는 한잔의 만화는

그러니까, '덤'이라 생각한다.

못 말리는 재즈 인생 류복성에 대한 기억도

말 많은 용순이형에 대한 추억도

웃음 한 번 속시원히 터뜨리며 마음 속을 비우게 해준다.

마지막에 실린

"나도 조영남처럼 살고 싶었다."는

조영남에 대한 가벼운 터치였지만 살짝 속이 시원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어서 어렵게만 풀어낼 줄 알았던 인생이

소주 한 잔만큼 단순하다.

행복이 멀리 있나?

그저 눈 앞에 있는 삶에 충실하고 열심히 나아가는 게 행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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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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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모두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 [미니어처리스트]

 

 

 

어린 시절 인형의 집 꾸미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소녀는 몇 없을 것이다.

한 손에 꼭 쥐어지는 인형의 몸에 예쁜 옷을 입히고 빗으로 기다란 금빛머리를 빗겨서 머리 모양을 만들어 꾸며준다.  자세를 바로 해서 의자에 앉혀 주거나 침대에 눕혀보기도 하고 인형의 몸을 이리저리 뒤뚱뒤뚱 거리게 해서 걷는 시늉도 해 본다.

작고 귀여운 그 세계를 내 손으로 만들고 이야기를 불어넣어 친구나 동생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인형이 나인듯, 내가 인형인듯~

그렇게 작은 세계 속에 나를 욱여넣어서라도 유치원 가고, 숙제하고, 심부름하는 현실과는 다른 곳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나 보다.

아이들이 동경하는 '놀이'란 그런 거였나 보다.

요즘은 키덜트 바람이 불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며 마냥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어린아이와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른이 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인형 놀이를 해도 거하게~ 고가의 것들을 골라 사모으면서 새로운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인데

어른이 인형 놀이 세트를 진심, 제대로 마련한다면 아마

17세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어느 부유층의 집에 재현된 미니어처 세트의 모습이 될까?

 

 

열여덟의 소녀 넬라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년간 숙녀가 되는 훈련을 하고 엄마의 노력 덕에 요하너스라는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을 만나 결혼을 한다.

교회 명부에 이름을 적고 넬라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절차를 마친 후 남편은 베네치아에 일을 보러 떠나고 넬라는 혼자 암스테르담에 있는 남편의 집으로 떠난다.

아내가 된다, 여자가 된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넬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뚝뚝한 남편의 여동생 마린과 레제키, 드하나라 불리는 개들 뿐이다. 밤이면 문 밖에서 주인의 기척을 엿듣는 하녀 코르넬리아와 검은 피부의 하인 오토는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는 낯선 존재다.

삐딱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남편은 베네치아에서 돌아와 넬라가 기다리던 따스한 말 한 마디, 다정한 포옹을 하는 대신 거북 등딱지로 만든 외관을 자랑하는 호화로운 캐비닛 집을 선물한다.

실제 집을 반으로 잘라 내부를 드러낸 것 같은 이 캐비닛 집은 아홉 칸의 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완벽한 복제품이다.

 

백랍이 마치 금속 혈관처럼 목재에 퍼져 있다. 캐비닛이 표면 전체에, 심지어 다리까지 섬세하게 물 흐르듯 박혀 있다. 나무와 등껍질 속에 묘한 전율이 있다. 심지어 벨벳 커튼의 감촉에서도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66

 

남편이 앞으로도 넬라를 혼자 내버려둘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시누이 마린은 넬라에게 어음과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장인과 사업가의 명부인 '스밋 명부'를 주면서 캐비닛을 채우라고 한다. 과거로부터 이별하고 멀리 나아가고 싶었던 넬라에게 돈의 존재는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캐비닛은 여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마린과 요하너스가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고 생각한 넬라는 일단 미니어처리스트에게 캐비닛 집을 채울 미니어처들을 몇 개 주문한다. 줄이 달린 류트 한 개, 색종이가 가득 담긴 약혼 기념 컵 한 개, 마지팬 한 상자...

하지만 그녀에게 도착한 것은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라는 글귀. 그리고 주문한 적 없는 물건들이 더해져 있었다.

의자와 요람, 레제키와 드하나를 꼭 닮은 한 쌍의 미니어처 개.

그 이후로도 넬라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미니어처가 배달되어 오는데...

앞일에 대한 경고인 듯 함께 전해지는 짤막한 쪽지와 미니어처에게 없던 표시가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는 기이한 현상은 불안감을 조장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넬라의 삶을 미니어처 들여다보듯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그녀의 삶에 불운이 드리울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넬라는 왠지 불안해진다.

과거 마린이 누군가에게서 받았던 연애편지를 훔쳐보게 된 넬라는 그 대상이 누구일까 궁금해 할 때, 독자는 그 누군가가 혹시 오빠인 요하너스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기묘하게 얽힌 남녀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될 때에는 이미 충격이 온몸을 휩쓸고 난 뒤다.

요하너스의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린의 비밀이 드러나고...

미니어처 집처럼 완벽하게만 보였던 암스테르담 부호의 집안에는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마냥 어린아이같았던 넬라의 눈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이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

앞일을 예견하는 것 같은 미니어처리스트에게 의존하려던 넬라는 예전에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낸 글귀를 읊조리며 주먹을 불끈 쥔다.

소녀에서 작은 전사가 되어야만 하는 넬라.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나는 일어서기 위해 싸우리라.-275

 

 

처음엔 뭔가 으스스한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낯선 나라 네덜란드의 이국적인 지명,인명 들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곧 18  소녀에 불과한 넬라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팡팡 터지면서 넬라를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 미니어처리스트의 존재가 한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어 계속 신경쓰이긴 했지만~넬라의  눈부신 성장이 경이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독특한 소재인 미니어처가 우리삶의 축약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어 섬뜩한 면도 있었고 실제로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도 그러했지만~결국에는스스로의 길을 찾아낸 넬라가 대견하다.
여름의 더위를 스릴로  잊게 만드는 소설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 세밀한 미니어처들과 그것이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예언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한 소설!
반할 수밖에 없다. 매혹적인 남자와 풋풋한 소녀의 로맨스를 기대했지만 멋지게 빗나가고 말았어도 행복하다. 소녀의 성장, 소녀가 설계하는 건축을 감상하는 재미가 아주아주 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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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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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여름, 이 책과 함께라면~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뜨거운 여름을 이 책과 함께 나게 되었습니다.

해운대 해수욕장 피서에 웬 할머니 한 분과, 백수처녀 한 명을 모시고 가게 된 것인데요~~

묘하게 잘 어울리죠~잉?

제목은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로 무시무시한데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코믹 분위기가 물씬.

할머니와 손녀의 콤비가 쿵짝을 아주 잘 이룹니다.

 

"해가 똥구녕을 쳐들 때까지 자빠졌구먼."

이라는 말로 손녀 아침잠을 깨우는 팔순 노인 홍간난 여사는 삼수생인 백수 손녀 강무순을 들들 볶아 댄다.

할아버지 장례 치르러 왔다가 시골에 뚝 떨궈진 무순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다임개술'의 비밀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척 들어도 어린 시절 강무순이 써놓은 '타임캡슐'이라는 게 감이 오는데, 정작 주인공인 무순은 소설 중반에 가서야 그 말의 비밀을 알아챈다. 독자에게 '다임개술'의 비밀을 캐는 무순을 뒤따르게 해놓고는 짐짓 중요한 사건으로부터 주의를 흩뜨려 놓으려는 수작이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란 무엇이냐...

무순이 어린 시절 읽던 책 속에서 발견한 보물지도를 따라가 본 결과 만나게 된 (보물상자 안에서 나온 쓸모없는 것들은 빼고) 보물상자 속 '자전거와 소년' 목각 인형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인데.

마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유 씨네 종갓집 근처에서 보물상자를 캐내면서 만나게 된 종갓댁 입양 양자 유창희가 홍간난 할머니, 손녀 강무순과 함께 트리오로 탐정 행세를 하게 된다.

아홉 모랑이에 쭉 살아온  홍간난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15년 전, 마을 갑진 할머니의 백수 생일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온천욕을 가기로 했단다.

어른들이 거의 마을을 비웠던 그 날, 한마을에서 여자 아이 네 명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경찰이 출동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샅샅이 온 마을을 뒤져도 이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양반집 딸이었던 유씨네 종갓집 외동딸 유선희,

행실이 좀 그렇고 그랬다는 유미숙,

한마디로 불쌍한 애, 삼거리 대문 없는 집에 살던 황부영

목사 딸 조예은.

나이도 각기 달리 교차점이 없을 것 같던 이들이 한 날에 모두 사라졌으니 마을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다.

옛날 일을 잊고 살던 마을에 서울서 온 처자 강무순이 '자전거와 소년' 목각인형의 주인공인 '소년'을 찾는다고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자 거짓말같이 잊혀졌던 과거의 일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중간중간에 툭툭 끼어들어 있는, 누군가의 기억 한 마디가 기록된 <주마등>은 아마도...범인의 독백일 것이다.

탐정처럼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의 묻힌 기억과 숨겨진 비밀을 캐고 다니는 이 트리오의 활약은 과연 범인을 밝혀내기에 이를 것인가?

얼핏 유쾌하고 밝은 기운을 팍팍 내쏘는 엽기발랄한 말투가 빚어내는 화안한 분위기와는 달리 사건의 진실은 어둡고 축축하다.

허를 찌르는 반전에 속아도 배신감 운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활기찬 문체 때문이고

완벽한 은폐를 위한 이중삼중의 덫에 뭣도 모르고 홀라당 발을 들이민 내 자신 때문이다. ㅠㅠ

 

해운대 백사장에 홍간난 할머니와 삼수생 강무순을 데려다 뜨거운 맛 좀 보여주려고 했더니

되려 내가 작가의 입심에 넘어가 반전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말았다.

열대야의 뜨거운 지옥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지내려면

홍간난 할머니의 전설 따라 삼천리를 정신 놓고 들어주면 되고,

호박쌈, 머위쌈을 크게 한 쌈 싸서 함께 냠냠거리며 먹어주는 척 하면 되고,

곧 울음 터질 것 같은 쭈글쭈글한 입이 하품으로 변하는 순간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면 되고,

넓은 오지랖을 따라 멀미를 참고 참아가며 버스 몰래 따라타고 미행을 따라붙으면 된다.

 

비록 드러난 진실이 서글프거나 오싹하거나 많이 가슴 아프더라도 홍간난 할매와 할매 곁을 따라붙은 강무순과 종갓댁 꽃돌이 양자를 생각하며 끝내 웃어보기를...

 

참고로 박연선 작가는 <동갑내기 과외하기> 의 원작을  영화로 옮기는 각본 작업

일본 드라마 원작인 [연애시대]의 드라마 대본

[화이트 크리스마스][난폭한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 온 작가라고 합니다.

16년 7월, 드라마 <청춘시대>로 복귀했다고 하네요.

입에서 톡톡 튀는 별사탕 같은 글맛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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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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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로 떨어진 20세기 흑인 여성의 이야기 [킨]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녀의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를 읽고 나서 선뜻 장편에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길고 긴 흐름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탓이 크다.

[킨] 또한 놀라운 SF 장르 장편 소설일 거라 지레짐작했기에 책을 펼치기까지 엄청난 내면의 밀고당기기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미래가 펼쳐지면 어쩌나...

다행히도 첫 장면은 생각보다 그 충격이 세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순간 빚어진 마찰로 여주인공의 한족 팔이 뜯겨져 나갔다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으니까...

 

1976년 6월 9일 여주인공 다나의 생일날, 그녀는 뜻하지 않게도 머나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누군가가 휙 그녀를 낚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이 바로 그녀의 곁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19세기에 당도한다. 처음 그 시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강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년이었다. 다나가 인공호흡을 해서 살려낸 아이는 루퍼스 와일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다나의 기억 속 가족의 계보가 떠올랐다. 아마...이 루퍼스라는 소년은 다나의 머나먼 조상일 터였다. 그렇다면 다나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조상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헤이거 할머니가 성경책에 써놓은 계보를 떠올려보건대...루퍼스는 헤이거의 아버지여야 했다.

언제나 예고 없이 과거로 불려갔다가 자신이 죽음 직전의 위험 상황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나.

그녀는 자신이 왜 루퍼스에게 이끌려 과거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혈연관계 만으로 끌려왔다기 보다는 루퍼스와 자신 사이에 하나로 묶인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아마도 어머니 쪽 집안으로 연결된 루퍼스는 살아남아서 헤이거를 낳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첫 번째 시간 여행에서 루퍼스네 가족을 만난 다나는 그 곳의 시대상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흑인여성이라면 무조건 노예가 아니면 도망자라고 인식하던 그 시절, 다나는 "물건" 취급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녀는 백인우월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KKK단의 야만적인 행위를 목도하고, 루퍼스의 집 안에서조차 흑인들에게 행해지던 차별과 어처구니 없는 대접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백인 남편 케빈과 함께 혹은 홀로 과거로의 여행을 반복하던 그녀는 처음엔 "백인같은 검둥이"처럼 도도하고 분별 있게 처신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반박했다면 그들이 과연 내 말을 얼마나 믿었을까?그렇다 해도...왜 내가 자기 변호에 나서지 않았을까? 적어도 시도는 해보았어야 하지 않나. 나도 순종하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429

 

어린 소년에서부터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루퍼스를 겪는 동안 다나는 루퍼스에 대한 '애증'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묶인 두 사람 사이에 떠다니는 이해와 증오, 야릇한 긴장감..

옥타비아 버틀러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흑백갈등의 시기를 직접 밟아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구사해 나간다. 흑인 여성으로서 겪었던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투영된 것이기라도 한 걸까.

어찌되었건, 지옥같은 그 시절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루퍼스의 대가 끝나야 하는데 다나는 어떻게 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을까.

 

지금 유행하는 타임리프 SF물과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고  섬세한 문장과 탄탄한 구성면에서도 빼어난 이 작품은 흑백갈등이라는 무거운 주제까지도 제대로 소화해내고 있다.

 

작가가 세상을 향해 뱉어내고 싶었던 한 마디의 말은 아마도 이 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어. 나일 수도 있다고. 그 자리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개처럼 끌려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고!"

"나는 재산이 아니야, 케빈. 말이나 밀 포대가 아니야.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나아 보일 만큼이라도, 내가 내 삶을 통제하게 해줘야 해."-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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