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 [미니어처리스트]

어린 시절 인형의 집 꾸미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소녀는 몇 없을 것이다.
한 손에 꼭 쥐어지는 인형의 몸에 예쁜 옷을 입히고 빗으로 기다란 금빛머리를 빗겨서 머리 모양을 만들어 꾸며준다. 자세를 바로 해서
의자에 앉혀 주거나 침대에 눕혀보기도 하고 인형의 몸을 이리저리 뒤뚱뒤뚱 거리게 해서 걷는 시늉도 해 본다.
작고 귀여운 그 세계를 내 손으로 만들고 이야기를 불어넣어 친구나 동생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인형이 나인듯, 내가
인형인듯~
그렇게 작은 세계 속에 나를 욱여넣어서라도 유치원 가고, 숙제하고, 심부름하는 현실과는 다른 곳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나 보다.
아이들이 동경하는 '놀이'란 그런 거였나 보다.
요즘은 키덜트 바람이 불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며 마냥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어린아이와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른이 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인형 놀이를 해도 거하게~ 고가의 것들을 골라 사모으면서 새로운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인데
어른이 인형 놀이 세트를 진심, 제대로 마련한다면 아마
17세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어느 부유층의 집에 재현된 미니어처 세트의 모습이 될까?
열여덟의 소녀 넬라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년간 숙녀가 되는 훈련을 하고 엄마의 노력 덕에 요하너스라는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을 만나
결혼을 한다.
교회 명부에 이름을 적고 넬라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절차를 마친 후 남편은 베네치아에 일을 보러 떠나고 넬라는 혼자 암스테르담에
있는 남편의 집으로 떠난다.
아내가 된다, 여자가 된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넬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뚝뚝한 남편의 여동생 마린과 레제키, 드하나라 불리는 개들
뿐이다. 밤이면 문 밖에서 주인의 기척을 엿듣는 하녀 코르넬리아와 검은 피부의 하인 오토는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는 낯선 존재다.
삐딱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남편은 베네치아에서 돌아와 넬라가 기다리던 따스한 말 한 마디, 다정한 포옹을 하는 대신 거북 등딱지로
만든 외관을 자랑하는 호화로운 캐비닛 집을 선물한다.
실제 집을 반으로 잘라 내부를 드러낸 것 같은 이 캐비닛 집은 아홉 칸의 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완벽한
복제품이다.
백랍이 마치 금속 혈관처럼 목재에 퍼져 있다. 캐비닛이 표면 전체에, 심지어 다리까지 섬세하게 물 흐르듯 박혀 있다. 나무와
등껍질 속에 묘한 전율이 있다. 심지어 벨벳 커튼의 감촉에서도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66
남편이 앞으로도 넬라를 혼자 내버려둘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시누이 마린은 넬라에게 어음과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장인과 사업가의
명부인 '스밋 명부'를 주면서 캐비닛을 채우라고 한다. 과거로부터 이별하고 멀리 나아가고 싶었던 넬라에게 돈의 존재는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캐비닛은 여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마린과 요하너스가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고 생각한 넬라는 일단 미니어처리스트에게 캐비닛 집을 채울
미니어처들을 몇 개 주문한다. 줄이 달린 류트 한 개, 색종이가 가득 담긴 약혼 기념 컵 한 개, 마지팬 한 상자...
하지만 그녀에게 도착한 것은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라는 글귀. 그리고 주문한 적 없는 물건들이 더해져 있었다.
의자와 요람, 레제키와 드하나를 꼭 닮은 한 쌍의 미니어처 개.
그 이후로도 넬라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미니어처가 배달되어 오는데...
앞일에 대한 경고인 듯 함께 전해지는 짤막한 쪽지와 미니어처에게 없던 표시가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는 기이한 현상은 불안감을 조장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넬라의 삶을 미니어처 들여다보듯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그녀의 삶에 불운이 드리울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넬라는 왠지 불안해진다.
과거 마린이 누군가에게서 받았던 연애편지를 훔쳐보게 된 넬라는 그 대상이 누구일까 궁금해 할 때, 독자는 그 누군가가 혹시 오빠인
요하너스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기묘하게 얽힌 남녀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될 때에는 이미 충격이 온몸을 휩쓸고 난 뒤다.
요하너스의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린의 비밀이 드러나고...
미니어처 집처럼 완벽하게만 보였던 암스테르담 부호의 집안에는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마냥 어린아이같았던 넬라의 눈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이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
앞일을 예견하는 것 같은 미니어처리스트에게 의존하려던 넬라는 예전에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낸 글귀를 읊조리며 주먹을 불끈 쥔다.
소녀에서 작은 전사가 되어야만 하는 넬라.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나는 일어서기 위해
싸우리라.-275
처음엔 뭔가 으스스한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낯선 나라 네덜란드의 이국적인 지명,인명 들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곧 18 소녀에 불과한
넬라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팡팡 터지면서 넬라를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 미니어처리스트의 존재가 한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어 계속
신경쓰이긴 했지만~넬라의 눈부신 성장이 경이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독특한 소재인 미니어처가 우리삶의 축약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어 섬뜩한
면도 있었고 실제로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도 그러했지만~결국에는스스로의 길을 찾아낸 넬라가 대견하다.
여름의 더위를 스릴로 잊게 만드는
소설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 세밀한 미니어처들과 그것이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예언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한 소설!
반할 수밖에
없다. 매혹적인 남자와 풋풋한 소녀의 로맨스를 기대했지만 멋지게 빗나가고 말았어도 행복하다. 소녀의 성장, 소녀가 설계하는 건축을 감상하는
재미가 아주아주 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