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로 떨어진 20세기 흑인 여성의 이야기 [킨]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녀의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를 읽고 나서 선뜻 장편에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길고 긴
흐름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탓이 크다.
[킨] 또한 놀라운 SF 장르 장편 소설일 거라 지레짐작했기에 책을 펼치기까지 엄청난 내면의 밀고당기기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미래가 펼쳐지면 어쩌나...
다행히도 첫 장면은 생각보다 그 충격이 세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순간 빚어진 마찰로 여주인공의 한족 팔이 뜯겨져 나갔다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으니까...
1976년 6월 9일 여주인공 다나의 생일날, 그녀는 뜻하지 않게도 머나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누군가가
휙 그녀를 낚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이 바로 그녀의 곁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19세기에 당도한다. 처음 그 시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강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년이었다. 다나가 인공호흡을 해서 살려낸 아이는 루퍼스 와일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다나의 기억 속 가족의 계보가 떠올랐다. 아마...이 루퍼스라는 소년은 다나의 머나먼 조상일 터였다. 그렇다면 다나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조상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헤이거 할머니가 성경책에 써놓은 계보를 떠올려보건대...루퍼스는 헤이거의 아버지여야 했다.
언제나 예고 없이 과거로 불려갔다가 자신이 죽음 직전의 위험 상황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나.
그녀는 자신이 왜 루퍼스에게 이끌려 과거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혈연관계 만으로 끌려왔다기 보다는 루퍼스와 자신 사이에 하나로 묶인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아마도 어머니 쪽 집안으로 연결된 루퍼스는 살아남아서 헤이거를 낳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첫 번째 시간 여행에서 루퍼스네 가족을 만난 다나는 그 곳의 시대상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흑인여성이라면 무조건 노예가 아니면
도망자라고 인식하던 그 시절, 다나는 "물건" 취급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녀는 백인우월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KKK단의 야만적인 행위를
목도하고, 루퍼스의 집 안에서조차 흑인들에게 행해지던 차별과 어처구니 없는 대접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백인 남편 케빈과 함께 혹은 홀로 과거로의 여행을 반복하던 그녀는 처음엔 "백인같은 검둥이"처럼 도도하고 분별 있게 처신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반박했다면 그들이 과연 내 말을 얼마나 믿었을까?그렇다 해도...왜 내가 자기 변호에 나서지 않았을까? 적어도 시도는
해보았어야 하지 않나. 나도 순종하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429
어린 소년에서부터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루퍼스를 겪는 동안 다나는 루퍼스에 대한 '애증'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묶인 두 사람 사이에 떠다니는 이해와 증오, 야릇한 긴장감..
옥타비아 버틀러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흑백갈등의 시기를 직접 밟아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구사해 나간다. 흑인 여성으로서
겪었던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투영된 것이기라도 한 걸까.
어찌되었건, 지옥같은 그 시절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루퍼스의 대가 끝나야 하는데 다나는 어떻게 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을까.
지금 유행하는 타임리프 SF물과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고 섬세한 문장과 탄탄한 구성면에서도 빼어난 이 작품은 흑백갈등이라는 무거운
주제까지도 제대로 소화해내고 있다.
작가가 세상을 향해 뱉어내고 싶었던 한 마디의 말은 아마도 이 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어. 나일 수도 있다고. 그 자리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개처럼 끌려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고!"
"나는 재산이 아니야, 케빈. 말이나 밀 포대가 아니야.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나아 보일 만큼이라도, 내가 내 삶을
통제하게 해줘야 해."-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