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처럼 검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3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강렬하고 짜릿하게 재탄생한 백설공주 [흑단처럼 검다]

 

 

 

북유럽에서 구전되어 세계로 퍼져나간 <백설공주> 이야기가 핀란드 작가에 의해 멋지게 재탄생했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 1,2,3 권이 그것인데,

[피처럼 붉다], [눈처럼 희다]에 이어 마지막 3권 [흑단처럼 검다]까지 총 세권으로 완결되었다.

눈처럼 새하얀 살결, 흑단처럼 검은 머리, 그리고 피처럼 붉은 입술의 백설공주가 현대에서는 독립적이고 강단 있으며 호기심 많은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년 12월 1권이 나온 이래 계속해서 기다린 보람이 있다.

1권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졌으면 어떡하나, 다시 1권을 읽고 시작해야 하나하는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3권에서는 앞의 내용이 짧게 요약되어 나와 생생한 기억을 되살린다.

시리즈물이 대세인 일본의 만화같은 데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인물이나 상황, 주요 문장 등을 짧고 간략하게 브리핑하듯이 초반에 다시 띄워주는 것 말이다. ^^

어쨌든 그 덕분에 1권의 내용을 무리 없이 되살릴 수 있었고,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었던 주인공 '루미키'가 게임을 리셋하자마자 튀어나오는 주인공처럼

종이를 찢고 툭, 튀어 나왔다.

 

2권에서 프라하로 여행을 떠났던 루미키는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언니"라며 다가온 일을 계기로 집단 자살을 시도하는 컬트 종교 집단 일에 엮이고 말았다. 그 일은 최대의 불상사를 막으며 처리되었고, '언니'라던 젤렌카도 혈연관계가 아님이 밝혀졌다. 하지만 루미키의 기억 속 '언니'에 관한 봉인이 해제되면서 3권은 시작된다.

 

루미키는 학교에서 공연하는 연극 <검은 사과>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다. 동명의 주인공 "백설공주"는 그러나 완전히 재해석된 이야기로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함축된 작품이지만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작품 속 백설공주는 왕자와 결혼한 뒤 왕비가 되어 황금의 성에 가서 자유를 뺏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사냥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날카로운 은빗으로 왕자를 찔러 죽인 후 어둠과 그림자와 짐승들이 기다리는 숲으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다. 고결하고 도덕적인 인물들이 나오지 않는, 완전 새로운 백설공주의 탄생. 독자로서 새로운 백설공주에 너무나 몰입한 루미키가 위험스러워 보인다는 판단이 설 때쯤, 루미키에게 스토커의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는 루미키가 애써 기억해내려 하는 언니에 관한 기억 속  죄책감과 붉은 피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루미키를 조종한다.

성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앞두고 루미키에게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연인 블레이즈와 새 연인 삼프사 사이의 삼각대결도 루미키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스토커의 편지 속 단서들로 찾아낸 열쇠는 루미키를 나무 상자에게로 이끌었고, 그 속에는 회색 눈을 가진 금발 소녀, 로사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루미키의 손에 묻어 있는 진득한 피의 기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로사는 어째서 루미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것일까?

그것보다, 루미키를 언제 어디서든 감시하는 스토커는 누구이며 왜 루미키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일까?

 

모든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루미키는 누구의 손도 기꺼이 잡지 않았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끝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루미키가 출연한 연극 <검은 사과>의 백설공주가 모든 것을 뿌리치고 숲으로 기꺼이 돌아갔듯,

현실의 루미키 또한 의지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연인에게 기대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것은 "나"라는 자아 찾기.

크고 작은 충돌은 루미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루미키가 간직한 원석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백설공주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판에 박힌 듯한 나레이션으로 끝나지 않았기에, 루미키가 찾은 자유는 "진짜"라는 느낌이 강력하게 전해진다.

 

흥미진진한 사건은 그냐말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강하게 독자를 밀어붙인다.

술술술 책장을 넘기자, 그대로 사건 종결!

머릿속에 남는 것은, 왕관을 쓰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왕자의 품에 안겨 있는 백설공주가 아니라

위험한 분위기가 감도는 허름하면서도 검은 옷을 입고 강렬한 눈빛을 내뿜으며 앞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검은 숲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가는 루미키의 모습이다.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아무도 옆에 끼지 않은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의 루미키 !

다만, 흑단처럼 검은 머리와 새하얀 피부, 핏빛같은 붉은 입술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설공주에 대한 단 하나의 로망은 남겨두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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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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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어 유창성의 비밀 [플루언트]

 

나는 아직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재미있게 외국인과 대화하며 알고자 하는 정보를 풍부한 자원의 바다에서 영어로 길어올릴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우리 때에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놀다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알파벳을 배웠다.

영어라는 과목이 있기에 공부했고 시험치기 위해 외우고 입력했다. 외우기에 재능이 없었던 터라 대화 시간이 주어지면 외운 말들을 순서대로 실수 없이 말해야 한다는 게 무서워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으~ 영어 시간은 손에 땀이나고 긴장감이 흐르는, 무서운 시간이었다.

토익은 또 어떤가. 실제로 말하기에 많이 도움이 되지도 않았건만 리딩, 리스닝을 무작정 해야만 한다, 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결론적으로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 마비' 상태에 빠져 등과 머리에 땀을 줄줄 흘리는, TV 속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사람들과 하나 다르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만은, 내가 꿈꾸는 영어 사용 로망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접하게 하고 두려움 없이 쓰 수 있도록 노력한다.

 

요즘 아이들은 너도나도 '영재'급이어서 알파벳은 '놀이' 수준에서 미리 다 떼고 영어책을 원서로 줄줄 읽는다.

모두 다 천재 아냐? 그건 아닐 텐데...영어를 접하는 마인드와 환경의 변화가 이런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 낸다.

영어 유치원, 조기 유학 열풍이 불면서 아이들은 '영어'로 꿈을 꾸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정작 그렇게 해서 얻은 '영어'라는 도구를 즐기며 사용하는 이가 몇 없다는 것이 슬프다.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을 위해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표 없이 '시험'만을 위해 공부하는 영어는 재미도 없고 잘 늘지도 않는다.

영어를 어떻게 대하고 접하며 공부해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고 스트레스 없이 잘 부려 쓸 수 있을까?

20년간 5개 국어를 마스터한 언어천재 조승연에게서 그 비법을 얻고 싶었다.

21세기의 새로운 영어 공부법을 제시한다는 그의 책에서 사실, 영어를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스킬을 배우려는 마음이 컸다.

저자는 [플루언트] 에서 영어 공부의 스킬에 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언어란 암기 과목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에서 우러나오는 탐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줄 뿐이라며 이 느낌이 바로 영어 유창성의 진짜 비법이라 설명한다.

우리가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도 영어 습득에 실패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영어의 역사를 짚으며 영어의 발전 과정을 따라 가다 보면 영어에 표준어가 없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더 나아가 문법은 말의 규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법'이라는 쇠사슬에서 놓여 나는 순간, 언어를 이해하는 새로운 길이 반짝 하고 열린다.

영어를 '언어'의 하나로 놓고 보면 영어 공부의 맥락이 잡힌다고나 할까.

미국의 외교관 양성 기관에서는 학습 난이도에 따라 모든 외국어를 5개 레벨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려 2,200시간의 수업이 필요한 언어로서 광둥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아랍어가 5레벨에 속한다고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한국어가 어렵다면, 바꿔 말해 한국인에게도 영어는 5레벨의 습득하기 어려운 언어라는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데 있어 우리가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인가?

 

첫째, 한국인과 미국인은 생각의 순서가 반대다. 미국인은 작은 것에서 큰 것 순으로, 한국인은 큰 것에서 작은 것 순으로 생각한다.

둘째, 한국어에 비해서 영어는 빌트인 된 뉘앙스 숫자가 너무나 적어서 단어를 꼬아 모자라는 표현을 보충한다.

셋째, 한국어 단어는 직관적이고 영어 단어는 추상적이다.

넷째, 영어는 주어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동사가 방향을 결정한다.

다섯째, 영어 단어는 같은 단어라 해도 그 모양이 여러 가지다. -111

 

이렇게 다섯 가지 걸림돌을 찾아낸 뒤, 영어 문장의 비밀을 벗겨보면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앞에서 강연을 듣는 듯한 생생한 전달력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묘하게 집중하게 되면서 우리가 영어 공부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난관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니 막힌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무조건 외워라, 책을 많이 읽어라 보다는 문화의 맥락에서 언어를 이해하고 배우려 한다면 좀 더 쉬운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문법은 생각외로 간단하나 실제 훈련에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어 유창성, 비밀의 문을 흔쾌히 열어 준 작가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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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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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홀린 듯 들었네, "노"와 나("루")의 이야기[길 위의 소녀]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 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세상의 용도 中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안착한 순간부터 흔들리는 여정에 몸을 싣는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발을 내딛으며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 서게 된다.

그 길은, 내가 평생을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내가 만들어가야 할 길이다.

길 위의 소녀들 또한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세상에 내던져졌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

꽃들은 저마다 기나긴 기다림을 거쳐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린다.

꽃들의 기다림 가운데에는 찬란하고 따사로운 햇살, 산새의 휘파람 같은 울음소리 뿐만 아니라  끈질기게 삶을 위협하는 모질고 거센 비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수줍은 눈망울을 들어 아득한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시린 듯 눈 깜박였던 순진하고 어여쁜 소녀들도 이 꽃과 같아서 쉼 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을 꼭꼭 씹고는 새까맣고 영민한 눈동자를 만들어낸다.

세상의 좋은 것, 나쁜 것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점점이 수놓인 까만 눈동자를...

 

성장 소설이 공통적으로 형성하는  동질감의  뼈대 위에 흐르는 듯 유려한 문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이 어우러진 [길 위의 소녀]는 꽃과 같은 소녀들의 이야기다.

나와 닮은 듯 다른 여정을 걸어온 소녀들의 이야기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나를 홀려버리고 말았다.

"들어줘, 들어줄 거지?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해 줄 거지?" 소녀들은 말한다.

곱디 고운 목소리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들어달라고 보챈다.

 

 

열 세 살 천재 소녀 루와 열 여덟 살 노숙자 소녀 노는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 세상의 길 위로 나선다.

아직 세상에 맞서 크게 소리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인 만큼 그들의 행동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지만 그들은 수수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모습으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속수무책, 마음의 빗장을 슬그머니 무장해제시킨 소녀들 앞에 앉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점점 홀리듯 빠져들어가는 수밖에.

 

열 세 살 소녀 루는 '지적 조숙아', 즉 천재 소녀로 고등학생과 수업을 같이 듣는다. 이성적으로는 하등 모자랄 것이 없지만 발표 시간은 이상하게도 무척 떨린다. 완전무결한 천재 소녀는 아닌 것이다. 마랭 선생님의 사회, 경제학 수업 시간에 '노숙자가 어떻게 해서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나'라는 주제로 발표하게 되어 무작정 거리로 찾아나선 루. 이름에서조차 부정적인 기운을 마구 뿜어대는 열 여덟 소녀 '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다.

노는 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루퉁하게 있다가 가끔 가혹한 말을 내뱉는다. 신경 꺼, 날 좀 내버려둬, 아니면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같은 말을 해서 루를 질리게도, 숨 쉬기 버겁게도 만든다.

노의 하루하루가 루에게 흘러들어오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애정이 생긴 것인지, 루는 발표가 무사히 끝난 뒤에 훌쩍 사라져 버린 노를 찾아다닌다.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니 찾아다니지 말라던 신문 파는 아줌마의 조언도 루의 귀에 닿지 않는다. 내내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던 루는 부모님을 설득해 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바로 우리의 세상이지만 너무나 괴상한 세상에서 살았던 노는 루의 집에 적응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잠만 자더니 점차 회복해 루의 엄마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살도 좀 올랐으며 심지어 예뻐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삶은 정물화 속 고요함만으로 가득한 것이 절대 아니기에 근원적으로 심어져 있던 불행들이 슬쩍슬쩍 튀어나온다.

루는 천재소녀이지만 어린 시절 겪은 불행으로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을 내내 마음 속에 담고 있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진짜 어른처럼 생각하지도 못하는 꼬마 천재 소녀의 아픔이 구정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부풀어있다가 무심코 꾹꾹 누르면 울컥 쏟아져 나온다. 노는 어떤가. 나쁜 남자"들"에게 당해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된 노의 엄마는 노를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간다. 이리저리 맡겨지다 결국 길거리에 나앉게 된 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툴툴대고 강한 척해도 나약한 어린아이가 남아 있어 알콜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그렇지?"

루가 노를 길들이고 언제까지나 함께인 세상을 꿈꾸는 데 마음이 쏠려 고개를 끄덕이면

나도 유토피아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각 가정에서 노숙자 한 명씩만 책임져도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는, 어른의 눈으로 보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발상을 하는 루를 향해 차마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젓지는 못하겠다.

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강해지고 싶고,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루의 싸움이 비록 무모할지라도 소리쳐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겨우 함께 길을 걷고 싶은 친구를 만났는데.

루는 프랑스 국기의 레드,화이트,블루가 상징하는 자유,평등, 박애를 순결한 마음으로 실천하고 싶어하는데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모습의 유령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방해하는 짓궂은 부조리함이 넘쳐난다.

엄마가 딸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서 친밀함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 무언의 폭력, 노숙자에게 던지는 차가운 눈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력, 조금 다른 것에 대한 무자비한 선긋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자에 대한 쓸데없는 우월감, 보호받을 길 없는 약자에 대한 무배려 등이 결국에는 노로 하여금 루의 손을 놓게 만든다.

'쓰러져도 포기는 못해' 식의 강한 마음을 붙잡고 잔다르크처럼 용감하게 앞장서 나간 루의 마음을 노는 알아주나 싶었지만 결국 노는 루를 버렸다. 루를 두고 떠났다.

 

너무 가득 담겨 찰랑거리는 슬픔은 격한 쓰나미처럼 몰려오기보다 미세한 떨림으로 전달된다.

두 소녀의 섬세한 감정을 우리는 온몸의 촉수를 동원하여 더듬으며 알아챈다.

타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일조차, 현대인의 바쁜 삶 속에서는 감정의 사치가 되어버린 요즘,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순수함과 배려의 결정체인 소녀 루의 따스함이 낯설게 느껴진다.

소설 속 화자가 "나"(루)이기에 루의 비중에 비해 또 다른 중요한 주인공인 노의 속마음이 세심하게 그려지지 않은 점이 유감스럽다. 길 위에 선 소녀들의 선택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될 터.

예측불허의 인생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조금씩 더 단단해 질 거다.

홀린 듯 가만히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크고 작은 떨림을 전해주며 이미 어른인 나를 '소녀'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냉정한 어른이자 이 시대 대표격인 "어른"의 입장을 대변하는 마랭 선생님의 나지막한 격려가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

"베르티냐크 양? 포기하지 마요,"-299

루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조금은 다른 세상, 지금보다 나아진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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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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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게 어울리는 건, 흙묻은 지저분한 신발 [영국 양치기의 편지]

 

이따금씩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떠오를 때가 있다.

희뿌연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를 시각적으로 접하고 내가 저런 곳에서 산단 말인가...할 때와,

간만에 마주 앉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조차 회사 일과 동료들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채우는 남편을 볼 때이다.

도시 생활은 여간 팍팍한 게 아니구나.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눈앞에 쌓인 피로만 크게 부각되어 사람의 영혼이 쪼그라드는구나...하고 한숨을 폭 내쉬게 된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면 비슷한 처지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데도 말의 중심에 "내"가 있지 않고 "남"이 놓인다. 누구는 이번에 어딜 여행 다녀오고, 누구네 애는 학교에서 무슨 상을 탔고, 누구는 무슨 상표의 옷과 백을 들었으며...등등.

내가 오늘 점심 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고 무얼 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놓이기보다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에 움츠러들고 외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나를 잃어간다.

이럴 때, 오직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양떼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푸른 초원 위에 하얗고 몽실몽실한 양들이 가끔씩 메에거리며 지나다니는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거나 누워 있는 나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좋은 장면을 상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에는

바로 그런 양떼들이 위안을 주는 곳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작가 제임스 리뱅크스의  집안 사람들은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작가 또한 고향의 목장에서 허드윅 품종을 키우며 살고 있다.

목가적이며 안정적인 목장 생활에 대해 지루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겠지, 그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면 안되겠다, 단단히 마음 먹고 책장을 넘겼다.

그가 평범한 양치기였다면, 그래, 아마도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목장과 양떼의 이야기로만 가득차 있을 수도 있겠다. 학교에서 조례 시간에 늙은 선생님의 훈계를 들으며 몸을 비비 꼬고 넘치는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해 교실 바닥에 깨진 현미경 조각, 포름알데히드에 절여진 개구리 시체, 찢어진 책이 가득하게 만든 학생의 모습이 그려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임스 리뱅크스는 '야생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풍경, 곳곳에 산과 호수가 펼쳐져 여가와 모험을 만끽할 수 있는 자연, 낯선 사람들도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19 페이지 중)가 시인, 산책자,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가들의 놀이터라도 되는 양 말하는 선생님의 관점을 듣고 심한 반감을 드러낸다. 남들이 바라보는 낭만적인 동네가 그에게는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자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생활의 터전이다. 언젠가는 이 지역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창이 될 만한 책을 쓰리라, 다짐했던 초등학생은 옥스퍼드에 진학하고 넓은 세상을 접하면서 그 꿈을 실현한다.

한 해의 사계절, 즉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치며 목장에서 하는 일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1970년대와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온 작가의 성장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레이크 디스트릭트 사람들의 이야기, 수백 년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뿌리 내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관점에서 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 책 속에 실려 있다.

한 가족과 한 목장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바쁜 도시에서 살며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헤프트'란 양들이 벗어나지 않고 풀을 뜯으며 지내는 고지대 방목지의 일정한 영역, 또는 그러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본능적인 학습이 수천 년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몸 깊숙이 새겨진 그 본능의 끈을 끊지 않고는 양을 팔 수가 없다.-41

 

마지막 녀석까지 분류를 마치고 나면 양치기들은 털 깎기를 위해 양들을 데리고 간다.

한동안 주변이 온통 소란하다.

양치기들의 고함 소리.

휘파람 소리.

크게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드는 모습.

새끼를 부르는 어미의 울음소리.

어미에게 대답하는 새끼의 소리.

개 짖는 소리...

사람들이 양 떼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산자락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처럼 유유히 평화롭게.-61

 

차를 몰고 그냥 풍경을 감상하며 지나는 사람은 그 풍경 뒤에 숨겨진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일들은 날마다 우리 일상 속에 쌓여 있다. 보이지 않는 소박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이곳의 삶과 풍경이 완성된다. -79

 

관광객의 눈으로 스치듯 보는 목장의 일상은 그 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수백 년간 전통을 지키며 이어내려온 사람들의 진짜 일상과 다르다. 깊은 유대감과 소속감을 가지고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진짜 영국 양치기'가 말하는 일상에는 삶과 죽음이 녹아들어 있다. 옥스포드를 졸업한 그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전문 고문위원'으로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관광산업이 해당 지역 사회에 이익과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양들이 있는 목장에서 일하는 것이 '본업'이고 '고문위원' 일은 '부업'인 셈이다. 흙 한 점 묻지 않은 신발이 오히려 어색하다는 그는 양치기의 규칙을 지키며 산다.

낡은 흑백사진 속 농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들판을 둘러 본다.

양치기의 첫 번째 규칙 : 내가 우선이 아니라 양과 땅이 우선이다.

두 번째 규칙 : 상황이 항상 내 뜻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규칙 " 그래도 군소리 말고 계속 일한다.

 

영국 양치기의 삶이 갑자기 부러워지거나 산 속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특유의 뚝심과 자부심이 느껴져 그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물 위에 떠있는 백조가 실은 죽을 힘을 다해 발을 저으며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 안락하고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삶일지라도 직접 그 자리에 있어보지 않는 한은 알지 못한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편, 양치기의 부지런한 삶을 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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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 길 위에서 마주한 찬란한 순간들
청춘유리 지음 / 상상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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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빛나는 청춘의 여행 에세이[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웃는 얼굴이 참 예쁜 26살의 청춘이다.

저자 청춘유리는 고등학생 시절 처음 교환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간 것을 계기로

이곳저곳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다닌다.

거창하고 명분 넘치는 '여행'이 아니라 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여행으로의 발걸음이 가뿐하게 찍혀있다.

일기같기도, 시 같기도, 짧은 에세이같기도 한 글들이 편안한 질감의 사진과 어우러져 읽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땅의 청춘들은 참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가고 있는 것 같다.

학교와 학원의 울타이에 갇혀 지내다 더 큰 사회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는 세상에 대한 면역 없이 곧바로 부딪혀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단단한 이와 나약한 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따위에 연연하며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틀 따위 과감하게 부수어주겠어, 하며 당당하게 더 큰 걸음을 내딛는 이들도 있다.

세상에서 정해 놓은 길이 아니면 어떠랴.

마음에 품은 큰 뜻이 장애물을 하나하나 걷어내 줄 텐데.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좀 모으는가 싶으면 곧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하는 청춘유리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떠나는 과정을 즐기고 떠난 곳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집어오기도 잘한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말이다.

찬바람이 불면 겉옷을 주섬주섬 찾아 꿰어 입듯이, 내면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청춘유리의 삶을 풍요롭게 메꿔준다.

 

돈 50만원을 들고 무작정 DSLR 카메라를 찾아 서울로 '상경' 했을 때

그 눈빛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에

가게 아저씨도 기꺼이 가슴에서 우러난 충고를 던져준 것이 아닐까.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는 것' 이라고.

 

 

 

어딜 가도 똑같은 배경, 자랑하는 듯한 사진이 아니라

여행할 때 "나"의 기분, 그 때의 감정,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는 청춘유리.

그 말을 읽고 사진을 다시 보니

정말.

이 장면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하게 되고 공감하고 싶고 그렇다.

 

구도와 빛과 시각 같은 어려운 사진 이론이 전하려는 것 말고

진심이 담긴 사진을 여럿 볼 수 있다.

 

 

혼자 여행을 떠나 친구들을 만나고 자신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 하는 동안에도

홀로 끙끙 앓았던 기억은 아프게 와닿고

스스로 토닥토닥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와닿았다가 스며든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저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요.

 

욕심 내지 않고 여행이 안겨주는 선물 같은 일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참 좋다.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이던가.

계획하고 떠나도 어딘가 삐걱거리게 마련.

그 과정에서 인생은 퍼즐 같은 거야, 라는 어느 서양의 잠언 같은 진리를 깨우치게도 된다.

그림 같은 그리스 자킨토스 섬,  나바기오 해변. 아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세를 떨쳤던 곳이 아닌가 싶은데...

꿈의 섬이었다던 그 곳을 비수기라서, 파도 때문에 배를 타고 못 가게 되었지만 돌길을 차를 타고 달려서라도 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던가.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변의 모습도 환상적이다.

여기에 일반 배낭 여행자라면 꿈도 못 꿀 이야기를 하나 더 얹게 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인생은 퍼즐 같은 것이라는 카우치 서핑 호스트의 말에 또 한 번 오래오래 남을 기억을 보태게 되었겠지.

 

이 좋은 여행의 추억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엄마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나눈 따스한 마음도 좋았다.

요정이 산다는 '플리트 비체'를 함께 거닐고 이야기 나눈 것만으로도 딸과 엄마 사이는 더욱 돈독해 졌으리라.

인생 뭐 있나?

에서 인생 대신 '여행'을 끼워 넣으면,

'여행 뭐 있나?'가 된다.

오늘은 바람만 느낀다는 허허로운 마음으로 걷고 또 걷다 보면

이렇게 꽉 찬 여행기 한 권 만들어진다.

언제나 다른 모양의 구름이 그림처럼 피어나는 사진 덕분에 훨씬 마음이 가볍다.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을 닮은 청춘유리.

담담하게 빛나는 청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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