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듯 들었네, "노"와 나("루")의 이야기[길 위의 소녀]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 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세상의 용도 中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안착한 순간부터 흔들리는 여정에 몸을 싣는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발을 내딛으며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 서게 된다.
그 길은, 내가 평생을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내가 만들어가야 할 길이다.
길 위의 소녀들 또한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세상에 내던져졌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
꽃들은 저마다 기나긴 기다림을 거쳐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린다.
꽃들의 기다림 가운데에는 찬란하고 따사로운 햇살, 산새의 휘파람 같은 울음소리 뿐만 아니라 끈질기게 삶을 위협하는 모질고 거센 비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수줍은 눈망울을 들어 아득한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시린 듯 눈 깜박였던 순진하고 어여쁜 소녀들도 이 꽃과 같아서 쉼 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을
꼭꼭 씹고는 새까맣고 영민한 눈동자를 만들어낸다.
세상의 좋은 것, 나쁜 것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점점이 수놓인 까만 눈동자를...
성장 소설이 공통적으로 형성하는 동질감의 뼈대 위에 흐르는 듯 유려한 문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이 어우러진 [길 위의 소녀]는
꽃과 같은 소녀들의 이야기다.
나와 닮은 듯 다른 여정을 걸어온 소녀들의 이야기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나를 홀려버리고 말았다.
"들어줘, 들어줄 거지?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해 줄 거지?" 소녀들은 말한다.
곱디 고운 목소리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들어달라고 보챈다.
열 세 살 천재 소녀 루와 열 여덟 살 노숙자 소녀 노는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 세상의 길 위로
나선다.
아직 세상에 맞서 크게 소리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인 만큼 그들의 행동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지만
그들은 수수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모습으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속수무책, 마음의 빗장을 슬그머니
무장해제시킨 소녀들 앞에 앉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점점 홀리듯 빠져들어가는 수밖에.
열 세 살 소녀 루는 '지적 조숙아', 즉 천재 소녀로 고등학생과 수업을 같이 듣는다. 이성적으로는 하등 모자랄 것이 없지만 발표 시간은
이상하게도 무척 떨린다. 완전무결한 천재 소녀는 아닌 것이다. 마랭 선생님의 사회, 경제학 수업 시간에 '노숙자가 어떻게 해서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나'라는 주제로 발표하게 되어 무작정 거리로 찾아나선 루. 이름에서조차 부정적인 기운을 마구 뿜어대는 열 여덟 소녀 '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다.
노는 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루퉁하게 있다가 가끔 가혹한 말을 내뱉는다. 신경 꺼, 날 좀 내버려둬, 아니면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같은 말을 해서 루를 질리게도, 숨 쉬기 버겁게도 만든다.
노의 하루하루가 루에게 흘러들어오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애정이 생긴 것인지, 루는 발표가 무사히 끝난 뒤에 훌쩍 사라져 버린 노를
찾아다닌다.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니 찾아다니지 말라던 신문 파는 아줌마의 조언도 루의 귀에 닿지 않는다. 내내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던 루는 부모님을 설득해 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바로 우리의 세상이지만 너무나 괴상한 세상에서 살았던 노는 루의 집에 적응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잠만 자더니 점차 회복해 루의 엄마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살도 좀 올랐으며 심지어 예뻐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삶은 정물화 속
고요함만으로 가득한 것이 절대 아니기에 근원적으로 심어져 있던 불행들이 슬쩍슬쩍 튀어나온다.
루는 천재소녀이지만 어린 시절 겪은 불행으로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을 내내 마음 속에 담고 있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진짜
어른처럼 생각하지도 못하는 꼬마 천재 소녀의 아픔이 구정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부풀어있다가 무심코 꾹꾹 누르면 울컥 쏟아져 나온다. 노는
어떤가. 나쁜 남자"들"에게 당해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된 노의 엄마는 노를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간다. 이리저리 맡겨지다 결국 길거리에
나앉게 된 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툴툴대고 강한 척해도 나약한 어린아이가 남아 있어 알콜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그렇지?"
루가 노를 길들이고 언제까지나 함께인 세상을 꿈꾸는 데 마음이 쏠려 고개를 끄덕이면
나도 유토피아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각 가정에서 노숙자 한 명씩만 책임져도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는, 어른의 눈으로 보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발상을 하는
루를 향해 차마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젓지는 못하겠다.
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강해지고 싶고,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루의 싸움이 비록 무모할지라도 소리쳐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겨우 함께 길을 걷고 싶은 친구를 만났는데.
루는 프랑스 국기의 레드,화이트,블루가 상징하는 자유,평등, 박애를 순결한 마음으로 실천하고 싶어하는데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모습의
유령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방해하는 짓궂은 부조리함이 넘쳐난다.
엄마가 딸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서 친밀함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 무언의 폭력, 노숙자에게 던지는 차가운 눈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력,
조금 다른 것에 대한 무자비한 선긋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자에 대한 쓸데없는 우월감, 보호받을 길 없는 약자에 대한 무배려 등이 결국에는
노로 하여금 루의 손을 놓게 만든다.
'쓰러져도 포기는 못해' 식의 강한 마음을 붙잡고 잔다르크처럼 용감하게 앞장서 나간 루의 마음을 노는 알아주나 싶었지만 결국 노는 루를
버렸다. 루를 두고 떠났다.
너무 가득 담겨 찰랑거리는 슬픔은 격한 쓰나미처럼 몰려오기보다 미세한 떨림으로 전달된다.
두 소녀의 섬세한 감정을 우리는 온몸의 촉수를 동원하여 더듬으며 알아챈다.
타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일조차, 현대인의 바쁜 삶 속에서는 감정의 사치가 되어버린 요즘,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순수함과 배려의 결정체인
소녀 루의 따스함이 낯설게 느껴진다.
소설 속 화자가 "나"(루)이기에 루의 비중에 비해 또 다른 중요한 주인공인 노의 속마음이 세심하게 그려지지 않은 점이 유감스럽다. 길
위에 선 소녀들의 선택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될 터.
예측불허의 인생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조금씩 더 단단해 질 거다.
홀린 듯 가만히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크고 작은 떨림을 전해주며 이미 어른인 나를 '소녀'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냉정한 어른이자 이 시대 대표격인 "어른"의 입장을 대변하는 마랭 선생님의 나지막한 격려가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
"베르티냐크 양? 포기하지 마요,"-299
루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조금은 다른 세상, 지금보다 나아진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