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내게 어울리는 건, 흙묻은 지저분한 신발 [영국 양치기의 편지]

 

이따금씩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떠오를 때가 있다.

희뿌연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를 시각적으로 접하고 내가 저런 곳에서 산단 말인가...할 때와,

간만에 마주 앉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조차 회사 일과 동료들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채우는 남편을 볼 때이다.

도시 생활은 여간 팍팍한 게 아니구나.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눈앞에 쌓인 피로만 크게 부각되어 사람의 영혼이 쪼그라드는구나...하고 한숨을 폭 내쉬게 된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면 비슷한 처지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데도 말의 중심에 "내"가 있지 않고 "남"이 놓인다. 누구는 이번에 어딜 여행 다녀오고, 누구네 애는 학교에서 무슨 상을 탔고, 누구는 무슨 상표의 옷과 백을 들었으며...등등.

내가 오늘 점심 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고 무얼 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놓이기보다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에 움츠러들고 외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나를 잃어간다.

이럴 때, 오직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양떼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푸른 초원 위에 하얗고 몽실몽실한 양들이 가끔씩 메에거리며 지나다니는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거나 누워 있는 나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좋은 장면을 상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에는

바로 그런 양떼들이 위안을 주는 곳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작가 제임스 리뱅크스의  집안 사람들은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작가 또한 고향의 목장에서 허드윅 품종을 키우며 살고 있다.

목가적이며 안정적인 목장 생활에 대해 지루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겠지, 그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면 안되겠다, 단단히 마음 먹고 책장을 넘겼다.

그가 평범한 양치기였다면, 그래, 아마도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목장과 양떼의 이야기로만 가득차 있을 수도 있겠다. 학교에서 조례 시간에 늙은 선생님의 훈계를 들으며 몸을 비비 꼬고 넘치는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해 교실 바닥에 깨진 현미경 조각, 포름알데히드에 절여진 개구리 시체, 찢어진 책이 가득하게 만든 학생의 모습이 그려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임스 리뱅크스는 '야생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풍경, 곳곳에 산과 호수가 펼쳐져 여가와 모험을 만끽할 수 있는 자연, 낯선 사람들도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19 페이지 중)가 시인, 산책자,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가들의 놀이터라도 되는 양 말하는 선생님의 관점을 듣고 심한 반감을 드러낸다. 남들이 바라보는 낭만적인 동네가 그에게는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자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생활의 터전이다. 언젠가는 이 지역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창이 될 만한 책을 쓰리라, 다짐했던 초등학생은 옥스퍼드에 진학하고 넓은 세상을 접하면서 그 꿈을 실현한다.

한 해의 사계절, 즉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치며 목장에서 하는 일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1970년대와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온 작가의 성장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레이크 디스트릭트 사람들의 이야기, 수백 년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뿌리 내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관점에서 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 책 속에 실려 있다.

한 가족과 한 목장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바쁜 도시에서 살며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헤프트'란 양들이 벗어나지 않고 풀을 뜯으며 지내는 고지대 방목지의 일정한 영역, 또는 그러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본능적인 학습이 수천 년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몸 깊숙이 새겨진 그 본능의 끈을 끊지 않고는 양을 팔 수가 없다.-41

 

마지막 녀석까지 분류를 마치고 나면 양치기들은 털 깎기를 위해 양들을 데리고 간다.

한동안 주변이 온통 소란하다.

양치기들의 고함 소리.

휘파람 소리.

크게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드는 모습.

새끼를 부르는 어미의 울음소리.

어미에게 대답하는 새끼의 소리.

개 짖는 소리...

사람들이 양 떼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산자락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처럼 유유히 평화롭게.-61

 

차를 몰고 그냥 풍경을 감상하며 지나는 사람은 그 풍경 뒤에 숨겨진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일들은 날마다 우리 일상 속에 쌓여 있다. 보이지 않는 소박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이곳의 삶과 풍경이 완성된다. -79

 

관광객의 눈으로 스치듯 보는 목장의 일상은 그 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수백 년간 전통을 지키며 이어내려온 사람들의 진짜 일상과 다르다. 깊은 유대감과 소속감을 가지고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진짜 영국 양치기'가 말하는 일상에는 삶과 죽음이 녹아들어 있다. 옥스포드를 졸업한 그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전문 고문위원'으로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관광산업이 해당 지역 사회에 이익과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양들이 있는 목장에서 일하는 것이 '본업'이고 '고문위원' 일은 '부업'인 셈이다. 흙 한 점 묻지 않은 신발이 오히려 어색하다는 그는 양치기의 규칙을 지키며 산다.

낡은 흑백사진 속 농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들판을 둘러 본다.

양치기의 첫 번째 규칙 : 내가 우선이 아니라 양과 땅이 우선이다.

두 번째 규칙 : 상황이 항상 내 뜻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규칙 " 그래도 군소리 말고 계속 일한다.

 

영국 양치기의 삶이 갑자기 부러워지거나 산 속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특유의 뚝심과 자부심이 느껴져 그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물 위에 떠있는 백조가 실은 죽을 힘을 다해 발을 저으며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 안락하고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삶일지라도 직접 그 자리에 있어보지 않는 한은 알지 못한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편, 양치기의 부지런한 삶을 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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