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사샤 마틴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몇해전에 친구가 내게 회사로 파이를 보내왔다. 호두파이와 치즈파이가 절반씩인 파이 한 판이었는데, 나는 이런 선물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 참신함에 놀랐다. 선물을 받은 기쁨은 물론 있었지만, 그 날은 유독 지친 날이었다. 지금은 왜 지쳤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쳤고, 그 파이를 들고는 집에 좀 늦은 시간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갔으니 샤워를 해야 하는데, 정말이지 지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은 그 밤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씻으러 들어가면서, 아 그런데 씻기 전에 친구가 준 파이를 한 조각 먹어볼까, 하고는 식탁앞에 서서 파이의 포장을 열고 치즈파이를 골랐다. 그렇게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치즈향과 씹히는 촉촉함 그리고 바삭함이 갑자기 내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입 안속의 향긋함은 곧 온 몸으로 퍼졌다. 서서 한 조각 후딱 먹고 샤워하러 들어가려던 나는, 주저 앉아서는 눈을 감고 먹었다.



아, 너무 맛있다.



나는 그 지친 늦은 밤에 이 맛있는 치즈파이를 먹으면서, 처음으로, 음식이 나를 치유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친 몸과 마음이 그 순간에 탁, 하고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파이를 보내준 친구가, 어떻게 내가 힘든걸 알고 토닥토닥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 받을 때면 매운 것 먹고 싶어하고 고칼로리 음식을 먹고 싶어하고 술을 퍼마시고 싶어하지만, 여태 그렇게 살아왔지만, 어떤 음식이 입 안으로 들어와 툭, 하고 나를 풀어놓는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맛있다'는 것과는 달랐다.




여름에도 설탕을 뿌려야 단맛이 우러나는 신선한 딸기 대신 깃털처럼 가벼운 동결 건조 딸기를 반죽에 섞었다. 새빨갛고 울퉁불퉁한 껍질에 여름을 머금은 냉동 딸기는 맛이 강렬하고, 반죽에 넣어도 속이 축축해지지 않는다.

여기에 색깔도 선명한 레몬이나 오렌지 제스트를 추가하고 크림을 몇 숟가락 끼얹으면 서리가 내린 창가가 따뜻해진다. 정말이다. 파운드 케이크 한 조각이면 지독하게 추운 날에도 몸이 풀린다. (윈터 파운드케이크, p.71)



'사샤 마틴'의 이 책,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이런 이야기가 가득차있다. 음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받고 또 치유가 되었던 경험의 기록들. 단순히 사랑과 경험이라고 얘기하기에는 더 내밀하고 깊은 사연들이 있다. 사샤 마틴은 세계 각국의 요리를 해보이며 그것을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하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점점 매체에서도 관심을 갖게 됐고 팬이 생기면서 그 모든 음식들을 한 데서 차려내 파티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요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만으로 책을 내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가 써내려가게 된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지내면서 엄마가 어린 자신과 오빠 마이클에게 요리를 해주던 그 부엌의 냄새와 분위기부터, 위탁가정에 맡겨지며 쓸쓸했던 기억까지, 자라면서 방황하고 엄마가 그리웠던 감정과, 끝내 섞이지 못했던 양부모와의 갈등까지. 사춘기와 대학시절 그리고 직장 시절을 거치면서 사귀었던 남자들, 그들로부터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고스란히 이 책 한 권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 사연과 기억들 틈틈이, 그것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준 음식과 그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녀는 자라는 내내 엄마와 아빠를 향한 그리움에 시달렸고 또 외로움을 겪었다.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단단히 붙들어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사귀었던 남자친구중 한 명이 그에게 이별을 고하며 '니 문제는 결국 니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뒤의 연애와 직장생활 그리고 육아에까지 고스란히 닿는다. 그 외로움과 아픔과 그리움이 그녀를 온통 잠식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또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소개하는 레서피에도 그 유머와 따뜻함과 그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철학이 다 담겨있다. 요리를 하는 그 과정을 하나씩 겪으면서,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의 초반부터 부엌의 따스함과 다정함 때문에 덩달아 한겨울의 난로앞에 앉아있는 기분이 되었었는데, 그러다가 툭툭, 그 따뜻함 사이에 끼어드는 강한 찬바람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이 책 한 권을 다 읽는동안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어제는, 지하철 안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아픈 사연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랑을 깨닫는 과정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은 어느 나이에 이르든 계속 성장하는 존재인 것 같다. 계속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오는 것 같아 속상하지만, 그렇게라도 깨달으면 그 때부터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에 또 의미가 있다.




나는 항상 머릿속에 요리 생각을 하지만, 내가 결국 손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는 언제나 상태가 안좋아서 역시 돈 주고 사먹는 게 최고구나, 라고 번번이 깨닫는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요리를 해보고 싶다, 잘하고 싶다, 나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메뉴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요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걸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는 게 너무 행복할 것 같아서.



첫 조카가 세살 무렵이었을 때,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만든 적이 있다. 면을 삶느라 부엌에 열기가 있고 가스렌지에 불이 들어와있어, 이모라고 달려드는 아이에게 '조카야 여기 뜨거워, 위험해, 이모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테니까 거실에 가서 엄마랑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했었는데, 그 작은 아이가 '응' 하더니 내 말을 듣고 소파로 가 제엄마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거다. 나는 면을 다 삶고 마트에서 사온 미트소스를 부어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조카를 위해서는 작은 그릇에 담고 포크로 집어먹을 수 있게 잘라주었다. 식탁에 차려두고 아이를 불렀을 때, 아이가 포크로 스파게티를 떠 먹으면서 맛있다고 했고,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비워내는 걸 보는데 진짜 심장이 터질 것 처럼 행복하고 좋았던 거다. 이런 경험을 또 하고 싶어! 그러나 그 다음 스파게티를 만들어줬을 때는 조카가 먹지 않았다..................



사샤 마틴은 어마어마하게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어, 육아 때문에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던 남편과 아이를 재우고 잠깐이나마 데이트 시간을 갖는다. 그 날 밤은 사랑이 무르익어간 밤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샤가 맛있게 만들어낸 그 디저트의 힘이었다는 걸 믿는다. 나도 그걸 하고싶은데, 아아, 나는 그것을 돈에 의지해야 하는 것인가... 내 손은 정녕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요리로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단 말인가!!




사샤 마틴은 따뜻한 마음과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고 요리도 잘하는데, 그것들을 한데 모아 글을 쓰는 능력도 탁월하다. 이 책은, 글 자체로도 아름답고 뛰어나다. 자연스럽게 사연과 사랑과 유머가 그리고 깨달음이 글에 녹아나고, 그리고 그것은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의 성장과정과도 섞인다.

좋은 글이다.

올 해 읽은 가장 좋은 에세이라고 하고 싶지만, 혹여라도 내 에세이가 또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 말은 아끼기로 한다. (킁킁)



그런데 이 좋은 책이 왜 아직도 1쇄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더 널리 읽히라고 내가 이렇게 리뷰를 쓴다. 움화화핫.





바게트와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종이봉지 안에 넣은 채 손으로 잡고 뜯으면 바스라지면서 한숨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사슴처럼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제대로 만들어진 빵 껍질에는 그런 효과가 있다. 입에 넣고 씹으면 이스트와 소금으로 만들어낸 깊은 맛이 입안 가득 퍼졌고, 부드러운 속살이 내 입술에 대고 따뜻하고 촉촉한 입김을 불었다. (p.111)



한 남자와 몇 번씩 헤어지더라도 애착이라는 질긴 끈을 차마 자르지 못하는 여자도 있다. 엄마는 올리버의 약물 남용과 음주와 도벽으로 인해 벌어지는 감정의 줄타기는 견딜 수 있었다. 그의 변덕과 걸핏하면 사라지는 습관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마이클과 나를 생각해서 모든 인연의 끈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라질 때마다 실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고, 우리에게 그의 성미를 이해시킬 수도 없었던 것이다. (p.39)

마이클은 점점 더 자기 방 속에 아픔을 가두었다. 한번은 토니가 방안에서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마이클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대답하고는 끝이었다고 했다. 나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닫힌 방문만큼 마음의 상처를 감추는 동시에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도 없다. (p.81)

나는 요리를 하고 싶었다. 요리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엄마가 가르친 무언의 교육에 따르면 요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우여곡절의 해결책이었다. 권태를 해소하는 해독제일 뿐 아니라 슬픔, 헤어짐, 외로움과 같은 암울한 현실을 떨치는 방편이었다. 반죽을 주무르거나 냄비를 저을 수만 있다면 이 새로운 삶을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 사랑하던 반쪽과 사별한 뒤에 셔츠를 안고 자는 배우자처럼 나도 요리를 하면, 재료를 다듬고 보글보글 끓는 그 냄새를 맡으면 엄마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p.85)

온 사방이 귀청을 찢는 소음으로 덮이자 결국 내 안에서 뭔가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감정의 속삭임에 점점 중독이 된 채로 움직이고 춤을 추고 살아갔다. 시인인 셰인 코이잔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무언가에 중독되는 것은 고통의 몸부림이 아니라 제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이보다 더 맞는 말이 어디 있을까. (p.121)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풀면 돼. 희한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보여. 당신과 함께 할 모든 게 전부 다 보여." (p.240)

제로니모에는 기다림이 있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열매를 맺기 마련이라고 다들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야구공만 한 우박이 쏟아지든, 한 마을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토네이도가 들이닥치든, 가벼운 소화불량에 걸리든,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떠오르는 태야, 뜯어먹을 수 있는 메기, 뜨끈한 저녁, 잦은 미소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키스는 이런 세상의 귀감이다. (p.252)

로맨스 지수를 최고로 끌어올리려면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초콜릿의 씁쓸한 뒷맛이 그런 역할을 하듯, 사랑의 달콤함도 고난을 통해 좀 더 세련되게, 좀 덜 질리게 발전한다. 힘든 일을 겪은 뒤에 다시 만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이인지 깨닫게 된다. 자허 토르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콜릿 케이크인데, 다크 초콜릿과 적당량의 설탕이 어우러져서 완벽하게 달콤 쌉쌀한 맛을 연출한다. (자허 토르테, p.320)

"당신이 자랑스러워." 키스는 내 어깨를 꾹 누르며 테이블을 둘어보았다. "당신, 진짜 행복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행복은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다. 행복해지려면 끊임없이 잡초를 뽑고, 감정과 상황을 맞닥뜨리는 대로 조절해야 한다.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나 행복을 보장하는 사람이나 장소는 있을 수 없다. 혼란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혼란을 통제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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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3-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글, 너무 좋네요~~~
치즈케이크를 부르는 글이예요. 전 가끔, 치즈케이크를 먹으려고, 밥을 먹어요.
일단 밥을 먹고, 그리고 치즈케이크... 첫 번째 만남이 최고죠. 크하~~~

전 요리에 관련된 책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요리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제게 요리는 요리가 아니라, 끼니가 되어서요 ㅎㅎ 이 책은 정말 근사하네요. 특히 요기요.

˝요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우여곡절의 해결책이었다. 권태를 해소하는 해독제일 뿐 아니라 슬픔, 헤어짐, 외로움과 같은 암울한 현실을 떨치는 방편이었다.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도 떠오르구요.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부엌이야기, 다락방님 새 책 다음 가는 에세이로 찜을 해놓고요 ㅋㅋㅋ

다락방 2018-03-30 10:28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이 책 너무 좋아요!
특히 음식을 요리하고 먹을 때 묘사가 대단해요! 저 위에도 인용했지만 바게트 먹는 거 묘사 좀 보세요. 어휴..음식이 생생하게 그려져서 미치겠더라고요.
이건 단순히 요리 얘기라기 보다는 요리에 얽힌 성장과 사랑, 이해의 이야기인데요 작가가 글을 아주 잘 썼어요.
또 몇 번의 사랑을 잃고 결국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지켜봐주는 짝을 만나는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책날개에 보면 블로그 주소도 있던데, 어제는 거길 가서 음식들 구경을 했답니다. 근사한 음식을 구경하는 건 근사한 글을 읽는 것처럼 제겐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라서요!

레이먼드 카버의 그 단편, 저도 좋아해요! 빵집 주인이 일단 잘 먹이려고 하는 그 장면,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마음이 따뜻해지죠.

아무튼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저같이 요리랑은 거리가 먼 사람도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요리를 끼니라고 생각하는 단발머리님이 읽으셔도 아주 좋을 책이에요. 아름다운 책이거든요.


그나저나 다음책은 백래시를 읽을까 하는데... 너무 분위기가 달라지려나요? 하하하하하

2018-04-03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