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표지 왼쪽 위에는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라고 적혀있다. 그러니 형사 벡스트룀이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가 큰 축이다. 평소에 나는 '돈 많고, 나이 많고, 지위 있는' 남자들이 너무나 유해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에서의 벡스트룀이 바로 그런 남자이다. 형사라는 직책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남성. 그는 사건 수사에 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쓴다. 원하는대로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포르노를 보고, 집에 밀린 빨래를 죄다 호텔로 가져와서 부하 직원을 시켜 세탁을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사건 해결에 쓰여야 할 비용이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생기는 빨래가 아니라, 집에서부터 가져온 빨래.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빨래를 그는 이 기회에 빨아버리는 거다. 게다가 포르노는 어떤가. 자기 이름으로 보는 게 밝혀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동료가 하루 다른 지방으로 출장 간 사이에, 동료의 룸에서 동료의 이름으로 포르노를 본다. 사실 이정도는 벡스트룀이 저지르는 나쁜짓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에 속한다. 그는 수사에도 딱히 유능한 건 아니어서, 린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그 지역 사람들의 DNA 를 조사하라고 한다. 그리고 동료 경찰들을 포함해서 어떤 식으로든 여자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성적대상화 하기에 여념이 없다. 보기 좋은 몸매일 경우 하루 속히 데리고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기분 전환을 위해서 그 여자를 사무실로 불러 면담을 하고, 그러다 결국 성추행으로 고발도 당한다.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인종차별도 심하고 동료의 공을 가로채기도 한다. 동료가 머리 써서 범인을 찾아냈을 때 갑자기 그건 '우리의' 노력이 되어버리는 거다.
"이 자리 비었나요?"
물어본 사람은 여자였다. 서른다섯에서 마흔다섯 살 사이로 보이니 여자로서 유통기한은 끝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몸매는 풍만한 쪽이군, 벡스트룀은 생각했다. -1권, p.48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자 그녀는 목례만 하고 회의실에서 나갔다. 저 여자는 할 일이 많은가 봐. 경찰관 시절엔 어땠을지 궁금한데. 꽤 반반했어. 할망구긴 하지만. 마흔다섯쯤 되었을 게 분명해. 딱하네. 정작 대변인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벡스트룀이 생각했다. -1권, p.63
슬프게도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생각은 이성보다 속도가 빨랐다.
"분명 레즈비언이야." 아차, 이를 어쩌나. 이미 늦어버렸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나가 눈을 크게 뜨고 벡스트룀을 보았다.
"린다가 뭐였다고요? 방금 린다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쁘고, 사귀는 남자는 없고, 축구에 미쳤고, 주위에는 여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렇다면, 그 뭐냐, 레즈비언이었던 게 뻔하지 않겠느냐는 거네." 달리 내가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겠어.
"이것 보세요, 경감님." 산드베리는 지위를 생각하지 못한 채로 감정을 실어 말했다.
"저도 축구를 한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 둘이 있고요. 그게 지금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녀는 노기를 띤채 벡스트룀을 보았다. -1권, p.215
"십 년 전 이혼한 후로 연락을 거의 안 했고 이혼 전에는 말다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란 정말 곤란한 상대들이죠." 벡스트룀이 감정을 싫어 말했다.
"제 아내는 아닌데요. 경감이 겪은 세상에선 그랬나 보군요." 에녹손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안 그랬으면 내가 왜 이러겠소, 벡스트룀이 생각했다. -1권, p.224
"집시 놈들 짓 아닌가." 벡스트룀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에 찬 주장이 가까웠다.
"자네를 실망시키게 되어서 유감이군." 레빈의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었다.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 거의 전부 달뷔 토박이들인 듯해. 총을 쏜 자 역시 그렇고. 지역 방위군 분대장인데, 잡히지 않고 있어."
사람이 다 알아맞힐 수가 있나. 스웨덴 사람들의 무난한 기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벡스트룀이 생각했다. -1권, 229
저것들 게이가 분명하군. 자기 입으로나 다른 사람들이 그간 여자들 만났다고 지껄이는 걸 듣기는 했지만 게이들이 분명해. 안 그러면 어떤 것들이 벡셰에 와서 영화관에 가지? -1권,p.231
그리고 알고 지내는 사이인 라디오방송국 진행자인 여자사람과 술을 마시는데, 호텔 바에서 한 잔 더하자는 진행자에게 굳이 자기 객실에서 마시자고 하고는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타올로 중요부위를 가린 뒤에, 나와서는 타올을 내던지고 그녀 앞에 선다.
"아가씨, 이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배를 집어넣고 가슴을 펴면서 벡스트룀이 말했다. 그런다고 배가 안 나와 보이지는 않지만 노력이라도 해봐야 했다.
"야, 이 미친놈아! 그 작은 흉물 저리 치우지 못해!" 카린은 악을 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핸드백과 재킷을 집어 문을 쾅 닫고 객실 밖으로 나갔다.
저 여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나이냐? 작은 흉물이란 게 뭘 말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2권, p.168
결국 벡스트룀은 카린으로부터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한다. 그러나 벡스트룀은 자기가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그여자가 굳이 호텔객실로 들어왔다고 하며 이 사실을 부인한다.
주인공인 벡스트룀 형사는 이렇게 어디 하나 바람직한 구석이 없지만, '살인범은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한다. 그래서 그동안 경찰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아주 괜찮은 경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딱히 좋지 못한 평판으로, 좋지 못한 행실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이런 엉망진창의 남자 주인공이라니 좀 놀랐지만, 그래서 이 소설이 왜이러지? 싶었는데, 작가 자체가 혐오를 하거나 비하를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가 얼마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없이 앞으로 나아가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쓴 것 같다. 계속해서 벡스트룀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벡스트룀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충분히 나오니까. 함께 지내는 동안 동료들고 그에게 문제가 많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경찰 내부에서도 그는 감사에 걸리게 되는데, 그러나 그가 형사라는 직업을 잃지는 않는다. 사건을 해결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피해자의 가족에게 거액을 몰래 받았고, 그 돈으로 자신이 공금으로 사용한 부정한 비용을 죄다 갚아버리는 거다. 성추행 고소건에 대해서는 진행되다 피해자 쪽에서 고소를 취소한다. 둘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고, 벡스트룀은 한사코 아니라고 계속해서 부인을 하니 그것이 진행되기는 어려웠다. 그는 분명 잘못을 계속해서 저질렀고, 주변에선 그런 그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게 된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남자가 차지하는 몫일 것이다. 비리도 좀 저지르고, 성추행도 여러차례 하지만, 그러나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위협을 당하지는 않는. 그냥 뭉개고 있어도 일은 진행되고 시간은 흐르고 월급은 들어오는.....
이런 남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고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역시 사실이다. 박사 논문을 준비중인 여자형사는 언론의 역할에 대한 논문을 쓴다. 린다 살인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잘했다고 언론인들이 서로를 부둥부둥 해줄 때, 언론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편파적인 기사들을 써왔는지를 잡아내는 사람이 있다.
5월 28일 금요일 리사 마테이는 스톡홀름 대학교 철학과에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의 제목은 '피해자 추모?' 였다. 마지막의 물음표는 정말 물음표였다. 언론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살인 사건을 다룰 때 어떤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는지를 연구한 논문이었다. 리사 마테이는 이 문제를 젠더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오십 년간 이백여 명의 강간 살해 피해 여성이 살인 사건 앞에 이름으로 남았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오십 년은 된 사건만 꼽아봐도 비르기타 살인 사건, 예르드 살인 사건, 세르스틴 살인 사건과 울라 살인 사건이 있다. 2000년대에 일어난 최근 사건으로는 카이사 살인 사건, 페트라 살인 사건, 옌뉘 살인 사건……그리고 린다 살인 사건이 있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여성들은 어느 순간 언론에서 선호하는 기호로 단순 변화되었다. 기호학 용어에 따르면 그들은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언론은 경찰이 용의자를 검거하는 그 순간까지도 피해 여성을 거듭 활용했다.
스무 살 수습 경찰인 린다 발린부터, 린다 살인 사건, 린다 살인자 등등, 사법절차의 마지막 순서까지 린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무엇에 대한 상징일까? 이 여성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언론이 다루고 결국은 스웨덴의 범죄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점은 차치하고 말이다. 성별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다. 남성이 죽으면 살인 사건 앞에 이름이 붙지 않는다. 살인 동기가 성적이든 뭐든 간에 그렇다. 인간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여성이어야만 받는 취급이었다. -2권, 376-377
벡스트룀 같은 남자가 세상에 많고, 그런 남자가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이 저지르는 짓이 잘못이란 자각이 전혀 없다. 또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인정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를 성추행으로 고소한 카린은 신문과정에서 그의 성기가 작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읽은 벡스트룀은 그걸 믿지 않는다. 자신의 성기가 작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여성을 성적대상화 시키는 것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전혀 없다. 성소수자와 인종에 대한 혐오를 가진 것 역시, 고칠 생각도 전혀 없고 잘못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주 약간, '잘못 말하면 상대가 기분 나빠한다' 정도의 인식만이 있을 뿐,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경찰의 간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경찰의 간부인 것이, 전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다. 어느 한 명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 순 없다. 그러나 약자 혐오와 비하를 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일전에 영화 배우 메릴 스트립이 시상식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사람들 앞에서 약자를 혐오하는 것을 발언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얘길 한 적이 있다. 그정도는 우리가 지켜야하는 것이다. 벡스트룀은 이미 50이 넘은 남자이고, 그동안 약자 혐오를 일삼았던 사람인데, 앞으로 그가 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추행으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고 경찰이란 직업도 잃게 되길 바랐지만, 사실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굴러가는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끊임없이 제재를 가하는 인물들을 심어두어서-그것이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힘은 벡스트룀에게 더 있지만, 제재를 가하고 공부를 하고 발언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지난주에 페미니즘 강연 한 번 땡땡이 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 주가 마지막인데, 정희진 쌤 강연이다. 얏호~ 그동안 수고 많아다, 나여...
그리고 금요일엔 퇴근하고 통영에 간다. 다찌집을 가려고 친구들하고 다 검색했다가, 다찌집은 그냥 패쓰하기로 했다. 머릿속에 놀러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이라 미치겠어. 얼른 금요일 와서 얼른 기차도 타고 친구들도 만나고 수다수다 했으면 좋겠다.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