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 시작된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겪었던 일, 겪었다기보다는 '당한'일,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가 얘기를 할 때 내가 당한 일이 나 혼자만 당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는데, 이렇게나 많은 피해자가 이렇게나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다니, 이 삶들을 다 어찌하나 싶었다. 아주 많은 여자들이 그간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걸 인식하기까지 그만큼 오래 걸렸다는 뜻일테다. 그리고 물론 아직도 여전히, 그것이 자기 잘못인줄 안 채로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 경험을 남자들에게 얘기했을 때는 반응이 달랐다. 남자들은 그저 '안된(혹은 안타까운) 일'로 생각했고 분석하려 했다. 그걸 극복하라 했고 이겨내라 했다. 그들은 애시당초 이해가 불가한 사람들이었고 공감 자체가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그것들 중 하나로 여기는 듯했다. 내 고통이 얼마만큼의 고통인지에 대해 이 끔찍함이 얼마만큼의 끔찍함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몹시 피곤했고, 그런 식으로 이해를 시킬 의욕도 의지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남자들이 정말로 성폭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범죄와 달리 유독 성범죄에만 피해자 탓을 하는 것은 바로 성폭행에 대해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칼을 들이대야만,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해야만 강간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성폭행에 대해 얘기할 때는 '그러니까, 니가 거길 왜 따라가? 왜 술을 마셔? 왜 그런 옷을 입어?' 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너도 사실은 좋았던 거 아냐?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성폭행을 묘사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해자가 얼마나 나쁜놈인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 지에 대해서 그렇게 '자 봐, 이렇게 나쁜 놈이야' 하며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고. 그 장면이 실제로 많은 여자들을 숨막히게 하는 줄도 모르면서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 뭘까? 


이 책, 《다른 사람》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문학 작품 속에서의 가해자와 범죄 장면에 대한 묘사에 대한 부분이었다.






소설 《다른 사람》에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나온다. 저마다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방법, 없었던 일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방법이 다른데, 그 중 한 명은 닥치는대로 강간 피해자가 나오는 책을 읽는다. 인물들에 공감하고 이입하면서 극복해 이겨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강간에 대해 쓴 작가들은 사실은 강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다. 



그리고 책 속에서 "저 여자를 강간하고 싶다"라는 목소리를 읽었을 때 수진은 그날 선배의 목소리를 함께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그런 농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식의 농담. 어떻게 그게 농담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강간당한 것 같아." 어떻게 강간이 농담이 될 수 있는 거지? 소설들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지 않았는가. 온갖 (괄호)들을 이용해서, 지독하고 핍진하게 묘사하지 않았는가. 강간당한 것 같다고? 강간하고 싶다고? 이건 강간당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렇다면 (괄호)들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괄호)들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소주 뚜껑 끄트머리가 날아간 것 가지고는 절대 (괄호)를 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강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괄호)들이다. 왜 누군가는 강간을 쉽게 농담으로 사용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괄호)들로 무시무시하게 표현하는가. 쉽게 비유하는가. 그녀는 답을 찾기 위해 소설들을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들은 강간을 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p.218-219)



이 부분을 읽다가 나는 얼마전에 읽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떠올렸다. 땅이 파헤쳐지는 장면을 강간당하는 거라고 묘사했던 그 장면을. 초반에 나오는 장면인데 그 장면에서도 나는 멈칫 했던 거다. 뭐지? 왜 이렇게 강간을 여기다 갖다 쓰지?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러니 누구나 모든 걸 다 잘하거나 또 모두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랬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이만큼 여자로 살아온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이성애자인 내가, 늘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화가 났다.



은행이 땅을 사랑하지 않듯, 그도 땅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트랙터에 찬사를 보낼 수는 있었다. 기계의 외양과 불뚝불뚝 솟아나는 힘과 폭발하는 실린더의 힘에 감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트랙터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트랙터 뒤에서는 반짝이는 원반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땅을 잘라 내고 있었다. 그것은 쟁기질이 아니라 수술이었다. 그 원반들이 잘라 낸 흙더미를 오른쪽으로 밀어내면 또 다른 원반들이 흙더미를 잘라 왼쪽으로 밀어냈다. 땅을 잘라내는 원반의 칼날들은 흙에 씻겨서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 원반들 뒤에서는 씨레가 쇠이빨로 흙을 빗질해 작은 흙덩이를 부숴 땅을 평평하게 골랐다. 씨레 뒤에서는 파종기(주물 공장에서 발기한 음경처럼 다듬어진 열두 개의 쇠몽둥이)가 기어의 움직임에 따라 오르가슴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땅을 강간했다. 열정과 흥분이 없는 강간이었다.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권, p.75




열정과 흥분이 없는 강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강간에 열정과 흥분이 없었다는 걸까? 강간에 열정과 흥분이 있을 수 있나? 이건 강간이 뭔지 조차 모르는 거잖아? 아니면 강간에는 '원래' 열정과 흥분이 없다는 걸 설명한걸까? 뭐가 이래? 내가 왜 이 문장을 보면서, 도대체 존 스타인벡이 왜 이렇게 썼는지를 왜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해석하려 들면서 '아닐거야' 라고 해야 하는거지? 이걸 써놓고 잔인하게 땅을 파헤치는 걸 썼다고 스스로에게 감탄했을까? 읽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생각했을까? 나 역시 다른 의미로 기가 막히다.



소설 《다른 사람》은 세련되게 돌려까기를 한다. 인간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걸 계속해서 드러내면서,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다, 우리 모두 실수하고 산다, 우리 모두 결백하기만 한 인간은 아니다, 우리는 야망이 있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나쁜 짓을 하기도 한다고,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또 괜찮은 연애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고 그저 무심하게 여러 명의 일상에 대해 얘기해준다. 그러니까 잘못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쁜 짓 하고 살아서 나쁜 짓 당했다고 보일 수도 있을만큼. 그렇게 어쩌면 친구를 왕따시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가운데, 치열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서, 죄책감에 대해서 얘기한다. 아직. 자매애나 연대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떤 여자들은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러나 점점 깊이 들어가 그들 모두, 그들 모두가, 죽을듯한 괴로움과 고통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그렇게 한 발 나아간다. 나는 나 자신을 원망했고, 나 자신을 미워했고, 나 자신을 욕했고, 나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저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었다. 스스로도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서 어떻게도 고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인물들. 대체, 순결한 피해자란 무엇인가. 우리가 피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피해의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아야 하고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고 밤 늦게 다니지도 말아야 하고 가슴이 파진 옷도 입으면 안되는 것인가. 내가 친구를 시기했다고 해서, 질투했다고 해서, 누군가의 뒷담화를 했다고 해서, 그래서 나는 완전히 강간은 아닌 것을 당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원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데, 원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증명할 수 없으면 누구의 동의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그녀가 찾아본 결과 대부분의 강간은 여자가 강력하게 거부했을 때만 입증되었다. 그러니까 폭력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을 때만 강간이라고 인정받았다. 수진은 그 사실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여자가 두들겨 맞고 소리를 지르고, 협박 당하고 그래서 목숨의 위협을 받은 후에 이루어진 성관계만 강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수진이 겪은 건 절대 강간이 아니었다. 수진은 두들겨 맞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협박당하지도 않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가해자가 가한 폭행의 정도로 판단되어야 하는건지 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진이 생각하기에 강간은 단순했다. 정말 쉽게 분류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았을 때 성관계를 하는 것.

바로 수진처럼. 술에 취해 의식을 잃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하는 것. 수진의 경우는 준강간에 해당했다. 준準. 세상에 이 단어 앞에 '준'을 붙있다고?

그나마도 수진은 입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일 그를 고발한다면 수진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할머니를 생각해야 했다. 수진의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강간 피해자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강간 피해를 주장했던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오직 의혹에만 둘러싸여 살고 싶지 않았다. (p.213-214)



나는 정희진 엮음, 한국 여성의전화 연합 기획한 책, 《성폭력을 다시 쓴다》를 읽다 밑줄 그은 부분을 떠올렸다.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돕는 상담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피해자들을 특정한 전형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폭력 피해여성들이 항상 불안해하고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은 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모습으로 폭력의 결과일 뿐이지, 그런 여성들이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피해여성들 중에는 가해남성보다 기질이 세거나 활동적인 사람도 있으며, 착하지도 않고, 일상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이도 있을 수 있다. 피해여성들은 가해남성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피해여성을 만나면 혼란스러워한다. 특별한 사람만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란을 갖게 되는 이면에는 ‘순수한 피해자‘,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라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통념은 여성 폭력에 대한 비판을 ‘피해 사실‘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돌리게 한다. (성폭력을 다시 쓴다, 김효선, p.176-177)



‘전형적인 피해자‘란 남성 사회의 신화이자 남성들이 투사하는 희망적 판타지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런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 폭력을 문제화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피해 사실, 그 자체여야 한다. (성폭력을 다시 쓴다, 김효선, p.177)




십년 전의 진아에게 일어난 일, 수진에게 일어난 일, 유리에게 일어난 일이, 이제 이영에게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영은 목소리를 내려 한다. 공론화 시키려 하고, 뒤로 숨지 않으려한다. 어떻게든 이 일이 나쁜 짓임을 밝히려 하고, 도움을 받으려 하고, 가해자에게 벌을 내리려 한다. 이제서야 진아가 깨달았던 것, 자기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영은 지금 알고 있었다. 


나는 이진섭에게 맞으면서도 맞지 않을 방법만 생각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을 좋게 해서 손지검을 피할 방법을.

하지만 진짜 필요했던 건 내 목소리였다. 하지 마.


나를 때리지 마. (p.78)



내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의 듣는 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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