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노라니, 그의 소설이라고 해서 언제나 '핵재밌는'건 아니다. 어떤 소설은 걍 그럭저럭 인 것들도 있는데, 이 책 《리바이벌》도 딱히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만고만한 책이군,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티븐 킹은 진짜 탁월한 이야기꾼, 타고난 이야기꾼 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문장 때문에.
다음 날 열린 실제 파티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같았고 조연만 추가됐다. 일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머지는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중 몇 명은 오래전에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던 직원들의 자녀이자 이제는 한층 넓어진 테리 형의 제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형은 연료 회사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체인으로 운영되는 모턴스 패스트숍이라는 편의점 사업도 하고 있었다. 악필이 성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p.393)
주인공의 형이 '테리'인데 테리 형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다가 참석한 사람들을 보고 쓴 부분이다. 그전에 초청장을 보내면서 형의 글을 읽고는 형이 악필이라는 걸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형의 성공을 얘기하면서 형이 악필이란 얘길 또 가져오는 거다. 형이 악필이라는 건 이 책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어떠한 이야깃거리도 안된다. 그러니 악필이란 설정을 하지 않았어도 이야기는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다. 마찬가지로 저렇게 또다시 형의 성공을 얘기하는 데에 '악필이 성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를 언급할 필요 역시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얘기함으로써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졌다. 형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저 문장 없이 충분히 완성되지만, 저 문장이 끼어들어갔기 때문에 이야기에 유머가 곁들여져 버리는 거다. 편의점 사업도 하고 있었다, 로 끝나면 그냥 성공한 형이지만, 악필이 성공에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라고 하면 확 생동감이 생기지 않나. 아아, 이야기꾼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스티븐 킹에게 감탄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이 책의 큰 줄거리처럼, 자신이 믿고 있는 단 하나의 신념에 광적으로 미치면 어떤 영향을 불러오는 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소하게 곁들이는 문장들 덕이겠다 싶은 거다. 그가 전해주는 메세지도 분명 의미있지만, 그걸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건 이런 문장들이 아닌가! 아아, 소설을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해. 편의점 사업을 하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악필이 성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같은 걸 덧붙여 줘야하는 거야. 스티븐 킹 선생님, 짱이세요!!
물론 형이 성공한 것 역시 책의 내용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부분이었다. 그러나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을 살려주기 때문에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촘촘해지고 단단해진다.
스티븐 킹을 읽지 않았을 때에는, 그냥 '베스트셀러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읽고나니, 오오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밖에 없겠군,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작가야!! 하게 됐더랬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작품을 전부 다 읽어보자, 하게 됐고. 물론 무서운 건 좀 뒤로 제쳐놓고 싶다. 단편집 읽다가 잠을 못잔 적이 있어가지고 ㅠㅠ 단편이 하나하나 다 무서워서 ㅠㅠ 읽으면서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막 그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이구나 싶다. 나도 타고난 이야기꾼이 되고 싶지만, 어느덧 내나이가 여기까지 와버렸고..그래서 '타고난' 같은 수식어를 받기는 힘들겠고...이를 어쩐담? 그렇다면 나는..음...대기만성형 이야기꾼? 이런거 해야하나? 아니면...어....늦바람난 이야기꾼? 흐음...
그렇지만 책 속에서 이제 막 대학에 가려는 젊은 여자와 51살의 남자가 섹스를 하는 건 마음에 안들었다. 여자가 먼저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니까 여자의 엄마는 그걸 좋은 차를 몰기 전에 중고차를 몰아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싫더라. 슈퍼파워를 가진 51세의 남자가 아닌지라, 연속되는 정사에 '고맙지만 못하겠어' 라고 솔직히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게,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 《사선에서》이다. 아주 올드한 경호원이 주인공인데, 머리도 백발이도 경호하면서 뛰는 것도 되게 숨차하는 캐릭터인데, 같은 경호를 하는 아주 젊은 여자랑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다. 읭?? 뛰는 것도 못하는 백발의 할아버지인데 저렇게 젊은 여자와???? 왜 저런 장면을 넣지??? 10대때 혹은 이십대 초반에 봤던 영화인데, 도무지 그 장면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나이든 남자도 또 나이든 여자도 섹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왜저렇게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랑 섹스하는 게 자연스럽게 그려질까. 일전에 국내영화 《부의맛》인가, 거기에선 김강우가 윤여정하고 섹스하는 걸 '싫지만 마지못해' 하는 걸로 나왔는데, 왜 영화속에서 젊은 여자들은 그런 백발의 할아버지한테도 매력을 느끼고 기꺼이 섹스할까? 왜죠?
이 영화속에서도 아만다 피트는 아빠뻘인 잭 니콜슨과 애인이다. 그리고 애인을 자기의 엄마에게 인사 시키는데, 그 여자가 다이안 키튼이고. 다이안 키튼은 싱글이고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잭 니콜슨과 사귀게 되진 하지만, 그전에 다이안 키튼에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젊은 키에누 리브스. 키에누 리브스는 자신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다이안 키튼에게 반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정중하게 대하는데, 다이안 키튼은 그렇게 젊고 멋진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몹시 좋아하지만 좀 부담스러워한다. 그게 뭔지 알 것 같아... 나도 연하의 남자들과 연애를 한적이 있고, 뭐 앞으로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나이차이가 많이 나면 '어휴, 이건 좀 부담스러워서...'하고 뒤로 물러나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 나이차이가 얼마가 될진 모르겠지만.... 열 살? 스무살? 모르겠다. 생각만해도 오글거리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글거린다, 하니까 생각나는 게,
여덟살 나의 조카는 외할머니(우리 엄마)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한다. 조카는 항상 '할머니 사랑해' 하고 끊는데, 할머니는 자꾸 툭- 그냥 끊어버려. 이게 서운했는지 조카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이제 전화 끊기 전에 꼭 사랑한다고 말하고 끊어" 라고. 아 진짜 너무 예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이제 우리엄마는 알았다고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데, 이게 너무 예뻐가지고, 어제 나는 나의 친구와 통화를 하고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우리도 이제 전화 끊기전에 사랑해 뽀뽀쪽 하고 끊을까?
물었다. 그러자 상대는 내게,
-니가 먼저 해봐. 그럼 내가 할게.
이러는 거다. 음.. 그래서 머릿속에 그려봤다. 사랑해 뽀뽀쪽 하고 전화를 끊는 장면을.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못하겠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사지에 소오름이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야 너무 오글거려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말자 하지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카는 나랑 통화할 때에도 끊기 전에 사랑해 뽀뽀쪽 하고 끊는다. 그래서 나도 어김없이 사랑해, 하고 돌려준다. 지난번에는 내가 술마시고 있는데 '너무 많이 마시지마' 이러고는 사랑해 하고 자러 들어갔었다. 며칠 전에는 지하철에 있을 때 전화왔는데, 이모 몸이 좀 안좋아, 했더니 끊으면서 '조심해, 사랑해' 했더랬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진짜 너를 내가 폭풍사랑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음..스티븐 킹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지? 두줄짜리 쓸라 그랬는데 또 이렇게 되어버렸네...인생...글이란 무엇인가.....의식의 흐름..............
그럼 이만...
"형은 오늘 같이 오지 않겠다고 햇어요.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그래?" 제이컵스는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무서워했어요." "그랬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겁에 질린 사람들은 자기만의 감옥에서 살거든. 콘이 벙어리 증상을 만들어 낸 것처럼 자기들이 만드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성격이 그래서. 그러니까 딱하고 가엾게 여겨줘야 해." (p.121)
콘 형은 자기보다 스무 살쯤 어려 보이는 미남 청년을 소개했다. "하와이 대학교 식물학과에 재학 중인 친한 친구"라고 했다. 나는 그와 악수하며 두 사람이 캐슬록 인에 방을 따로 잡았을지 궁금해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콘 형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언제 맨 처음 알아차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형은 대학원에 다니고 나는 메인 대학교에서 컴벌래늦와 함께 「천 가지 춤의 고장Land of a Thousand Dances」를 연주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훨씬 전에 알아차렸을 텐데 두 분이 아무렇지 않게 여겼기에 우리도 그랬다. 아이들은 말로 표현된 규칙보다 무언의 본보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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