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면서 견딜 수 있는 모멸감의 크기는 얼마만큼일까?
나는 어제 저녁에, 아마도 여기까지가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이 들기 전까지 했다. 어제는, 정말이지, 너무 치욕스러웠다. 제대로 고용주한테 갑질을 당했고, 이걸 내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당장 드럽다고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또 너무 부끄러웠다. 저녁 밥도 건너뛰는, 아주 늦은 퇴근을 하고, 이 상황에 같이 맞닥뜨린 다른 직원들과 소주를 한 잔 하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혼자 울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답이 나오질 않아서. 그냥 나가버리는 게 누가 봐도 속시원한 답인데, 그건 그냥 일시적인 답일 뿐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나가면 저 꼴을 다시 안봐도 되지만, 이 자리의 누군가와 다른 직원들은 계속 볼 것이고, 또 내가 다른 직장을 들어간다면, 아마도 다른 형태의 갑질에 노출되겠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산다는 게 뭐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면, 나는 계속 이런 감정을 수시로 느껴야 하나? 이렇게 바닥에 쳐박힌 것 같은 느낌을 견뎌야 하고, 너덜너덜해진 자존감을 부둥켜 안으며 살아야 하나?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 밖에 없는건가?
어제 택시 안에서 줄줄 눈물 흘리면서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갑자기 '아나스타샤'와 '그레이'가 생각났다. 아, 그레이... 그레이를 만나고 싶다.
일전에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두 번째 편을 보고서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fallen77/9135173
요약하자면, 그레이는 아나스타샤가 일하지 않아도 될만큼 아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서 아나스타샤한테 사고 싶은 거 사라고 막 돈도 주고, 아나스타샤가 다니는 회사도 살 수 있고 그런 사람인데, 이런 사람하고 결혼했다가 경력단절 온다, 나중에 헤어져도 나는 먹고 살아야 되니까 내 능력이 있어야 된다, 뭐 이런 얘기였던 거다. 그래서 나는 그레이를 선택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써놨더랬다.
어제 택시안에서 이 글 생각이 났던 거다. 그리고 나는 내 생각을 뒤집었다.
나한테 그냥 꼼짝없이 집에만 있으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어떤 조건이 됐든 다 들어줄테니,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에게 계약하자고 했던 그런 계약서에도 싸인할테니, 주인으로 받들어 모실테니, 경력단절 걱정 안할테니, 말대꾸 하지 말라면 안할테니, 나를 소유물로 간주한다면 그것도 내버려 둘터이니, 그레이랑 결혼하고 싶어졌다. 그레이랑 결혼해서 그레이가 주는 큰 돈 받아 쓰면서 살고 싶어졌다. 생각 같은 거 안하면서, 고민 같은 거 안하면서, 그러면서 그냥 주는 돈이나 쓰면서 살고 싶어진 거다. 그리고 조금 더 큰 바람이 생겼는데, 그레이랑 결혼해서 그레이한테 우리 회사를 사라고 하는 거다. 내가 다녔던 회사 사버려, 그리고 오너를 내쫓아버려!! 그러면 나를 니 맘대로 해도 내버려둘게. 니가 시키는대로 다 할테니까, 나를 밥벌이의 전쟁터로 보내지 말아줘....
이런 마음이 된거다.
어제의 나를 아는 엄마는 오늘 내게 잘 잤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코피를 멈추느라 코에 휴지를 돌돌 말아 꽂고 있었다. 엄마는 너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어떡하냐 물으셨고, 나는 엄마한테, '엄마 나는 나 돈만 안벌게 한다면 그게 누가 됐든 결혼하고 싶어졌어, 아무 생각 없이 살테니까, 아무 말없이 살테니까, 돈 많은 놈한테 시집가고 싶어' 라고 했다. 엄마는 '그래, 잘생각했다' 하시면서, '너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중에 그런 남자 없어? 연락해봐' 하시는 거다.
"엄마, 없어...다 꼴도 보기 싫어..."
이러고 나는 또다시 회사로 출근한 것이다.............................인생............................내게는 그레이가 없어........................그레이 같은 놈 만나본 적도 없어..........................내가 아나스타샤가 아니기 때문인거야? 세상의 모든 그레이들은 어디에서 아나스타샤를 찾는거지?
어제 점심엔 혼자서 좀 먼 데 있는 식당으로 눈누난나 걸어갔다. 이어폰에서는 심규선의 새로운 앨범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렇게 나는 차돌박이를 먹으러 갔다. 차돌박이를 앞에 두고 먹으면서 심규선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아아, 이건 뭐지, 갑자기 구슬픈 가사가 귀에 쏙- 박히는 거다.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일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행복…. 하소
뭐라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 가라고 하고, 발병도 나지 말고, 행복하라고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래? 뭐야? 이건 바보야 미치게 착한 거야? 이것이 소위 말하는 그 진정한 사랑...뭐 그런 거야? 그러면 나는 진정한 사랑 안할래. 이게 뭐야 등신같이... 어떻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라고 해!! 난 못해!!! 네가 불행하길 바라진 않지만, 나랑 지낼 때보다는 덜행복해야해!!
막 이런 마음이 되어가지고 울먹울먹 차돌된장찌개를 떠서 밥 그릇에 넣고는 슥슥 비벼서 밥을 먹는데, 어라? 얘 좀 보소? 글쎄, 이러는 거다. 그러니까, 저렇게 말하면서, 안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짜 마음'은, 이렇다는 거다.
마침표 없는 문장을 가득히 눌러 안고
안으로 외치는 말
가지 마소 가지 마소 나를 버리고 가지 마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멀리 멀리 저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두고 가신 임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소
아라리요, 아라리야 끝내 떨치고 가신 임아
돌아보소…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속으로는 저러고 있었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심규선, 당신은 또 한 곡 해냈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또 내 가슴을 찢어놓는구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떡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심규선 콘서트 예매해놨는데, 아아, 정말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콘서트 가기 전에 신곡 들어보고 가야지, 했던 거였는데, 아아, 이런 보석 같은 노래가 있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심규선은 진짜 ㅠㅠ 가끔 완전 내 안에 들어갔다 나왔나 싶을 정도의 노래를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여전히 내 아이폰에서 가장 많이 재생되곤 하는데, 콘서트도 내가 다 갔는데, 아아, 이번에 또 한 번 해냈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노래를 심규선이 부르는 걸 듣노라니, 콘서트에서 꼭 보고 싶어졌고, 아아, 어쩐지 이 노래 부르다 심규선 울지 않을까 싶은 거다. 심규선이 이 노래 부르다 울면...나도 울어야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같이 울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심규선 진짜 내 영혼의 썅둥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이 노래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보고, 아아, 가지 마소... 막 이러다가 정신 차려보니, 내 앞에는 차돌된장찌개가 놓여있었고, 아아, 이미 슬픈 감성에 쩔어버린 나는 밥맛이 훅- 떨어져버린 거다.
어라? 어쩌냐..밥맛이 훅 떨어져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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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돌된장찌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흐음, 밥맛이 떨어졌어, 어떡하지....하다가, 다시 슥슥- 밥을 비볐고, 그렇게 남김 없이 다 먹었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도 찬, 서리 같은 마음 어찌 품었나
너는 하오에 부는 바람만큼 온화했는데
우는 날 떼놓고 걸음 어찌 걸었나
하염없이 비 내릴 때 너도 억수처럼 울었나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일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행복…. 하소
연무처럼 흩어지는 맘 어찌 붙잡나
너는 그믐에 피는 손톱달처럼 저무는데
기어이 돌아서는 널 어찌 탓할까
너는 아무도 몰래 받을 벌을 다 받았는데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일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언약과 증표 가련한 맹세여 다시없을
사람
마침표 없는 문장을 가득히 눌러 안고
안으로 외치는 말
가지 마소 가지 마소 나를 버리고 가지 마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멀리 멀리 저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두고 가신 임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소
아라리요, 아라리야 끝내 떨치고 가신 임아
돌아보소…
간 밤에 꾼 꿈결인 듯 전부 다 잊고 행복 하소
나를 두고 가신 임아 누구보다 더 행복 하소
행복…. 하소….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서 남동생과 맥주를 한 잔 하고, 내 방에 돌아와서는 내 소중한 책장 앞으로 가서 《올리브 키터리지》를 꺼내두었다. 내일 출근길에 읽어야지, 하고 가방 옆에 두었고, 오늘 가지고 나왔는데, 오늘 출근길에서는 한 장도 읽지 않았다. 오늘부터 읽어야지. '우리 심장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마' 라고 했던, 그 대사가 나오는, 그런 책이다.
"말해요." 몹시 침착했다. 그녀는 한숨마저 내쉬었다. "제발, 얘기해줘요." 제인이 말했다.
어두운 차 안에서 가빠진 그의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녀의 숨결도 거칠어졌다. 제인은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기엔 우리 심장이 너무 늙었다고. 이런 일을 계속 우리 심장한테 시키면 안 돼. 당신 심장이 이런 일을 견뎌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p.246)
6월 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