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요 - 봄처럼 찾아온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
클레리 아비 지음, 이세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을테고 그중에는 내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관계의 시작도 있을 터이다. 이 책에서처럼 이미 혼수상태인 여자를 처음 맞닥뜨리고 나서 시작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혼수상태인 여자를 처음 만났지만, 혼수상태에서 청각만 살아 있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병실에 우연히 들어온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음성과 목소리-모르는 여자에게 하는 이야기-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설정 자체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포장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읽는 내내, 혼수상태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혼 상태-, '마크 레비'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개정판 제목은 '천국 같은')》이 생각났어야 이 말랑한 로맨스에 내가 빠져들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페도르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가 자꾸만 생각났다. 즉, 공감보다는 짜증이 더 컸다는 거다. 



우리는 실체가 없는 대상과 충분히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에미'와 '레오'처럼 이메일로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하고, 영화 《her》처럼 목소리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가능하다. 폰팅으로 데이트를 하던 시절도 누군가에겐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는 눈 앞에 있는 대상, 재스민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누워있는 여자에게 사랑이 생겨난다고 해서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병실에 들어가서 그녀의 침대에 눕고, 아무리 '두 시간 정도는 호흡이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제멋대로 호흡장치를 떼내는 것을, 사랑의 연장선상과 과정의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낭만을 치덕치덕 발라대느라 상대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로맨스가 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도, 누워서 청각만 살아 있는 여자 역시 자신의 병실에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남자를 좋아하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건 책을 읽어 여자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데, 여자 역시 사랑이 싹트고 있었으므로 이게 괜찮아질까? 글쎄? 여자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내 옆에 누워요' 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는데? 그러니 여자의 사랑 역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남자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이 모든 일들은 낭만으로 포장되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여자가 아무것도 못한다. 아무것도 못해서 누워있고 눈도 뜨지 못하고 기계에 의지해 숨만 쉬고 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기존에 사랑을 나누던 사이도 아닌데, 거기에 자꾸 가고 침대에 누워서 자??? 




'페도르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래서 여자의 집에 몰래 따라가 여자가 샤워하는 틈을 타 여자의 방에 몰래 침입해 그녀의 머리핀 하나를 가지고 나온다. 그러다가 샤워가 끝난 여자와 마주쳐 여자를 겁먹게 한다. 그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고 그는 그녀의 간병인이 되는데, 그녀의 머리를 잘라주고 손톱을 다듬어주고 몸을 닦아주고 생리대를 갈아주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하며, 생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무성영화를 보고 와서는 의식 없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얘기해준다.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리고는 그녀와 결혼할거라 친구에게 말하며, 급기야 그녀를 임신시키고 만다. 이게 남자가 모두 '사랑해서' 한 일이다. 여자는 자신의 의견을 한 마디도 전달한 적이 없는데.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무성영화 얘기를 해준다해도, 여자가 그걸 바랐는지 바라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대상은 일전에 자신의 방에 몰래 침입했던 남성이었다. 그녀가 허락한 적 없는데 남자는 그녀와 결혼할거라 말하고, 그녀가 허락한 적 없는데 남자는 그녀를 임신시킨다. 그녀도 혼수상태에서 이 모든 과정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고 허락하는 마음이 되었을지, 물론 모른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고(낼 수 없었고!), 그러므로 남자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해' 라면서 임신을 시켜?



자꾸 이 영화가 이 책을 읽는데 겹쳐져서, 나는 작가가 쳐발쳐발한 낭만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는 거다. 나는 낭만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설사 상대 역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한들, 그 사실을 들은 적이 없으면서, 허락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제멋대로 자신의 사랑을 '실행'에 옮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소설의 낭만이 통하지 않는 이유다. 




아버지는 이제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혼수 상태에 빠져도 다 들을 수 있고말고. 하지만 자명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엘자는 본인의 선택으로 우리를 떠나가는 거야."

"엘자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본인 선택으로 이렇게 됐다고 하실 수 있어요?" (p.251)




생명 연장장치를 떼어내기로 결심한 가족들에게 남자가 나서서 반대를 하는 장면이다. 엘자는 청각이 있었고, 속으로 물론 자신이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므로 남자가 '엘자가 선택한 게 아니다'라고 한 말은 아주 '정확한' 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녀가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는 '침대에 함께 눕기'를 계속해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당신, 이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 당신이 한 건 뭔데? 하고 반문하고 싶달까. 




이 책속에 그려진 '친구' 관계 만큼은 좋았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친구가 주인공들에게 있었다. 주인공들의 삶은 그래서 하루를 더 살게 되고 또 연장이 되고 할 수 있었다. 친구, 좋네.. 하는 생각을 책을 읽다 여러번 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공들의 연애에 이르지는 못했다. 자기들이 좋다는 데 내가 뭐랄 수 있을까마는, 내가 읽고 싶은 연애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아, 그리고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런 얘기, 아무리 친하고 다정하고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도 막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너도 빨리 가족이 생기면 좋겠어." (p.150)



일전에 한 친구가 내게 '너도 빨리 연애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하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아니 ... 내가 '비연애' 상태라고 해서 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내 연애를, 내 결혼을 니가 바라지 않아도 된다. 


할 말이 없다. 늘 이렇다. 이래서 쥘리앵을 제일 친한 친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1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하물며 이 자리에선.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술집에서 질질 짤 수 있나. 수요일 저녁이란 말이다.
"그만 나갈까." 쥘리앵이 말한다.
"뭐?"
"너 울음 터질까봐."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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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2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2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7-04-1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를 읽고 바로 [그녀에게]가 딱 떠올랐는데.. 역시.

전 패스!

다락방 2017-04-12 17:17   좋아요 0 | URL
친구에게 빌려 읽었는데 친구도 읽고 영 찜찜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에게 계속 생각나서 즐겁지 않은 독서였어요. -.-

2017-04-12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3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룩말 2017-04-1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미친년 ˝ 이란 말이 자동으로 나왔어요. 그 친구. 지금도 친구예요??^^

연애와 행복이 무슨 상관이죠? 저와 제 옆에 있는 그 분은 서로 ˝사랑해˝ ˝사랑해˝는 수만번 하지만, 제가 ˝ 행복해? ˝라고 물으면 ˝ 아니 ˝ 라고 대답하는 요즘입니다. 그 분의 ˝행복해?˝라는 질문에 저는 ˝참담해˝라는 대답이 나오더군요.

다락방 2017-04-13 09:48   좋아요 0 | URL
그 친구는 지금도 친구입니다. 그 당시에 니 기준을 나에게 적용하지 말라고 말했고요. 훗. 자기 딴에는 선의로 한 말이고 제가 한 말을 알아들었어요.
그나저나 얼룩말님, 옆에 누가 계시군요! 일상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또 서로에게서 행복을 찾으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다정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거 참 안정적인 기분을 줘요.
:)

moonnight 2017-04-13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읽지 않기로 합니다. ^^ 저도 영화 ‘그녀에게‘가 끔찍했어요ㅠㅠ;

다락방 2017-04-14 08:4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그 영화가 정말 끔찍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는 영화더라고요.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