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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평점 :
나는 여기서 모든 남성들이 젠더관계의 이데올로기적 인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면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남성이라는 단어 앞에 '여성을 혐오하는' 이라는 수사를 붙여 혐오 집단을 제한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가 있다면, 나는 스스로 질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여성의 자율성과 권리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당신은 대학 내 압도적인 남성 전임교수 비율을 조정하거나, 여성에게 부과되는 양육과 돌봄의 책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거나,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여성노동의 저임금화를 극복할 물질적 토대를 고민하는 일을 방기하거나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제도적 물질적 변화를 강구하기보다 그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말하기 방법이 잘못되었다거나, 폭력적이라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남녀평등의 수사학을 쓰면서도, 페미니즘 연구 환경의 척박함을 개선하기보다 인용할 만한 수준을 가진 여성 철학자가 없다거나, 여성에서 출발하는 이론이 모두 파시즘적이라고 공격하고 있다면, 당신은 인정의 수사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하는 여성혐오 집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 p.101-102)
고백하건대 심경이 복잡해진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일부 여성들, 아니 오랫동안 여성철학을 연구해온 내 마음도 복잡해졌다. 메갈리안이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메갈리안들이듯, 여성도 여성들이며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들이기 때문이다. (p.10)
그러던 내가 이제 글을 쓰기로 했다. ‘결국, 난 꼰대였던 거야‘라는 좌절에서 ‘그래, 이왕이면 제대로 꼰대질 하자‘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궁리해온 페미니즘 철학과 이를 가능하게 해준 페미니즘의 계보들을 인용하는 가운데 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리지도 않은 채 소거될지라도 내 언어를 입 밖으로 꺼내보기로 했다. 내가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재고하게 되면서였다. 다시 보니 ‘비a-체object‘, 즉 어떤 규정된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참 유용한 언어였다. 어떤 존재를 무엇이다(A) 라고 규정하기 않고, 무엇이 아니다(~A)라고 말하는 방식은 그 존재를 어떤 경계에 가두기보다 그 여분의 공간, 경계의 열림에 위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페미니즘의 역사는 남성이 정해놓은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들었던 여성들, 항상 흐르고 있기에 개념적으로 잡힐 수 없는 ‘비-체‘가 되었던 여성들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그녀들이 비판받거나 마년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기존의 언어나 질서로는 파악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p.12-13)
여기서 함께 아파함, 타자에 대한 연민, 즉 동정심에 주목해 보자. 기존의 도덕과 법에서 동정심은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가령 "동정심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이나 전지구적 차원의 정의를 위한 해외 원조와 같은 노력을 뒷받침하는 중심적 지주가 될 수 있으며, 취약한 집단이 겪고 있는 억압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동정심이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감정이라는 데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거나 혹은 그들의 수준은 우리의 수준보다 낮다는 믿음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는 고통을 이겨내거나 고통받고 있지 않은 내가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리건과 위긴스는 동정이 사랑과 별 상관 없는 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것은 그/녀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동정은 대상에 대한 나의 우월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p.96-97)
공감은 자아와 타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감은 서로 다른 사람들 간의 정서적 결합관계인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우월이나 열등과 같은 불평등이 아니라 서로가 처한 사회적 상황과 경험이 잠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사람들은 공감 안에서 서로의 다름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공감은 내가 타인의 삶에 참여participate하는 태도이다. 공감은 타자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진정으로 누군가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그의 곁에with"서 나와 다른 그의 상황과 감정을 함께 경험한다는 의미이지, 그와 동일하게 느낀다거나 그의 옆에서 거리를 두며 그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감을 통해 나는 나와는 다른 타자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p.131-132)
가령 누군가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경험에 비추어 그/녀를 판단하기보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나 조건, 경험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그/녀의 고통에 참여한다면, 나는 이를 통해 경험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 타자의 차이를 경험하는 공감은 타자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동감과는 대조적이다. 자아와 타자가 서로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공감은 타자의 곁에서 타자의 경험에 참여하는 가운데 타자의 다름을 경험한다. 따라서 공감은 경험의 확장 속에서 자아 자체를 변화 시킨다. 마지막으로 공감은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관계, 즉 "상호감응responsiveness to each other"하는 관계이다. (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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