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마을로 들어서서 이스트 메인이라는 이름의 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걷다 보니 사거리가 나타났고 그곳을 지나자 도로의 이름은 웨스트 메인으로 바뀌었다. 상점 창문들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문에는 모두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베리빌은 모범생들만 모여 사는 도시인 것 같았다. 날이 저문 지 고작 두어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리처는 연신 곁눈으로 터너를 살폈다. 볼수록 멋진 여자였다. (p.157)
비록 탈출하고 도망중이긴 하지만, 리처와 터너가 함께 걷는다. 정말이지 이 사소한 장면, 이 대단하지 않은 장면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서로 호감을 가진 남녀가 함께 걷는 것. 어두워진 길을 계속 걷는 것. 나는 걷는 걸 너무 좋아하고,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도 너무 좋고, 나 혼자 걷는 것도 너무 좋다. 걷는 속도가 유독 맞지 않는 사람이랑 걷는 건 별로 안좋아하지만, 걷는 속도마저 비슷하면 진짜 짱이다. 게다가 이야기까지 재미있게 나눌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은가. 157페이지의 저 인용문을 읽으면서 아 걷고싶다, 생각했다. 혼자 걸으면 아주 많은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고,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아침에 걸어도 좋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 걸어도 좋다. 걷는 건 진짜 무지하게 좋다. 호감을 가진 남녀가 만나 데이트하는 데는 수많은 코스가 있겠지만, 걷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소하면서도 가장 짜릿한 것 같다. 진짜 너무 좋아. 아, 걷고 싶다... 생각했는데,
오늘 오전에 외근 다녀오면서, 아이쿠, 그런데 이 계절엔 그냥 실내에 콕 처박혀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생각했다. 추워서, 코끝이 시려서..걷기 싫어졌어. 두 다리로 걷는 건 좋은데, 머리통도 너무 춥고...모자도 쓰고 머플러 단단히 두르고, 장갑도 낀 다음에 걸어야지, 이거 어디 추워서 많이 걷겠나..싶은 거다. 나는 여행을 가면 줄곧 걸으려고 하는 편인데, 날이 추우면 쉬이 포기하게 된다. 몇 해전에 친구랑 전주 갔다가, 너무 추워서 얼마 안가 포기했더랬다. 전주는 나한테 딱히 좋은 장소도 아니었고, 음식도 별로였고, 전주 여행은 그냥 별로인 여행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피로해졌던 기억이 있다. 날이 추워 그랬다. 추울 땐 오래 걸을 수 없어... 어쨌든 리처와 터너가 함께 걷는 거 너무 좋다!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에도 함꼐 걷다니...아아, 없던 정도 생기겠는 것.....너무 좋아. 게다가 함께 걷는 남자는 운동 안해도 식스팩 있는 남자, 운동 안해도 이두박근이 농구공만한 남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함께 걷는 장면 너무 좋았는데, 이 장면도 좋았다.
이제 목적지까지는 3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새벽 4시에 리치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리처는 단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래서 리처는 두 눈을 감았다.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내에게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리처에게 땅콩을 던지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것도 손이 아니라 입으로 불어서. 터너 역시 같은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리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리처는 좌석을 젖히지 않고 상체를 등받이에 꼿꼿이 기댄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건 리처의 장거리 여행 수칙 가운데 하나이다.
'자다가 공격을 받으면 깨어나는 동시에 이마로 받아버린다.' (p.304)
둘은, 어쩌면 잭 리처의 딸일지도 모를 소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다섯 시간이 넘는 비행이었고, 앞으로 세 시간이 남은 상황, 터너가 잭 리처의 어깨에 기대 잠드는 거다. 그렇게 기대서 숙면을 취하는데, 와, 너무 좋아. 좋아하는 남자랑 같이 비행기 타고, 그 남자한테 기대서 자고...아, 너무나 사소하지만 너무나 좋다... 사실 기차든 비행기든 버스든 그게 뭐든,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어깨에 기대서 잠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게 키가 나랑 비슷하면 내가 너무 목이 밑으로 가니까 불편하고, 뭐 여튼 이래저래 어깨에 기대어 잠든다는 건 불편한 일인데, 아, 잭 리처라면.. 안불편할 것 같아. 잭 리처라면 그 어깨에 기대고, 그 농구공만한 팔을 내 양 팔로 감싸가지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크- 좋구먼.....
인생, 뭐 별 거 있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함께 비행기 타고 그러다 어깨에 기대 잠들고...그러는거지...... 행복, 뭐 별 거 있나... 다 그런거지...
어제는 여행친구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내가 와인을 마신다는 얘기를 마시는 도중 친구들에게 했는데, 다들 한결같이 '너한테 벌준다며', '사흘간 금주라며' 같은 소리들을 해댔고.....
닥쳐! 오늘부터 하면 될 거 아냐!!
같은 말을 나는 내뱉진 않았지만.....뭐 그런 심정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지. 어쨌든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아, 나 여행가고 싶어, 이번 달 안에 가고 싶어, 영월에 갈까, 했더니 여행친구가 나를 말렸다.
안돼, 너 12월에도 가고 1월에도 가잖아....참어......
그래, 그것이 현명한 거다 ㅠㅠ 그게 맞아 ㅠㅠ 맞는데 ㅠㅠㅠㅠ 또 가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 걸으면, 그게 어디든..춥겠지... 이렇게 추운데 아무도 나랑 여행 가고 싶어하지 않겠지....그리고 돈은... 어떡해. 여행 가면 돈이 한두푼 깨지는 것도 아닌데..... 당장 12월과 1월에 호텔비도 할부로 나갈거고...그런데 여기에 뭔가를 더하면 안되겠지...그렇지만 11월에는 그러면, 모텔에서 자면 되잖아? 모텔은 저렴하잖아? 안돼..그만 가.... 가서 실컷 먹으면 돈들어. 알았어, 안갈게. 흙 ㅠㅠ 이러다가, 또다시 청도는 비행기값도 저렴한데...같은 생각을 하다가, 또 스스로를 말리다가... ㅠㅠㅠㅠㅠ
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나의 패이버릿인데, 영화 속에서 여자는 자신의 방에 큰 세계 지도를 붙여두고는, 가고 싶은 곳에 초록색 압정을 박아두고 갔다 온 곳에는 빨강색 압정을 박아둔다. 어쩌면 색깔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세계지도를 보며 자신이 가고 싶은 곳과 다녀온 곳을 표시하는데, 그 장면은 내가 참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때의 여자에겐 뭐랄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너무 좋은 거다.
그러다 여자가 덴마크 왕자랑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어서 덴마크 왕비가 되는데, 왕비가 되니 떠받들어주는 사람도 많고 온갖 보석으로 몸을 치장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서 여자는 왕비 자리를 내놓고 떠난다. 여전히 세계지도를 보면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여자는 원했던 거다. 덴마크 왕자는 그런 여자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주고 그녀의 삶을 응원해준다. 크- 멋져.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못했는데, 특히나 세계사,국사, 한국지리,세계지리를 못했다.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되는 과목들이라, 나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던 아이들도 높은 점수를 받는 과목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암기에는 진짜 완전 재능이 1도 없어서, 저 네 과목은 항상 낮은 점수만 받았던 거다. 게다가 방향 감각도 없어서, 지금도 길을 찾을 때면 지도를 보면서 너무 헤매야 되고... 결국 나는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가는 걸 택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나의 지구본을 너무 좋아한다. 지구본 들여다보는 건 너무 즐거워!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다가 내 방으로 탁탁탁 튀어가서 지구본 들고 나오고, 돌려보면서, 엄마, 저 나라는 여기야, 라고 말하는 순간이 너무 좋고, 조카들에게 지구본 빙빙 돌려가면서, 여기봐, 여기가 이모가 갔다온 데야, 하는 것도 너무 좋다. 지구본은 구남친1의 선물인데, 깊이 감사하고 있다.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슝- 날라왔더랬다. 지구본이, 내게로. 너무 좋다. 나는 구남친1보다 구남친1이 준 지구본이 훨씬 좋다. ㅋㅋㅋㅋㅋ
그러고보니 구남친2의 선물도 생각나는데, 그는 내 생일날에 미니컴포넌트를 선물로 주었더랬다. 지금도 그것이 내 방에 있음에 감사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술마신 어느날 밤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엉엉 울기도 하니, 역시 구남친2보다 구남친2가 준 미니컴포넌트가 훨씬 더 좋다.
남자는 가도 선물은 남는 것..... -0-
2017년 다이어리를 사기 위해 지난주에 잠실 교보에 들렀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이번엔 스벅에 작은 사이즈가 없고, 커피빈은 작년과 디자인이 똑같아서 쓰기 싫었다. 너무 크거나 무겁지 않아야 했지만, 너무 작아도 곤란했다. 몇 해전만 하더라도 작은 수첩도 괜찮았는데, 요즘의 나는 가슴에 한이 많아서 털어놓을 게 많아.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양이 많을 것...그러면서 예뻐야 돼...라고 생각했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더라. 그래서 아직도 사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제 yes24 에서 내게 포인트 5천점으로 상품권 교환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여긴 예전에도 한 번 그래서 갑자기 들어가서 책 사게 만들더니 어제도 그러대? 그래서 부랴부랴 5천원 상품권으로 교환하고는 책 한 권 사야지 므흣므흣 하다가, 아, 그런데 다이어리나 구경할까, 하고는 다이어리를 검색해봤다. 뭐, 나는 인터넷 쇼핑이든 오프라인 쇼핑이든 쇼핑 엄청 귀찮아해서 한 두 세권 보다 말아야지 했는데, 두 권째가...오! 세계지도가 있대!!!!!
그래서 부랴부랴 주문했다. 5천원 할인 받고. 후훗. 지금 내게로 오고있는데 두근두근하다. 나는 멍때리고 싶을 때마다 내 다이어리를 펼쳐서 세계지도를 볼 수 있어! >.< 씐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