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이제는 예순이 넘은 수학교수 '리'가 '폭탄 테러범'으로 의심 받는다. 자신의 옆방 교수가 우편 테러로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옆에 있었고, 그 일이 있고나자 그런 테러를 가한 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며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때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옆 방에 있었던 그를 위로하고 그런 인터뷰를 멋지게 해낸 그를 응원했었는데, 어느틈에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된다. 폭탄 테러범과 그가 '아는 사이' 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 자신이 '폭탄 테러범'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주변인들과 FBI 는 의심한다. 그가 요주의인물임이 매스컴에 드러나자, 그의 직장인 학교와 그가 사는 동네의 사람들은 그를 따돌린다. 애초에 사람들과 많이 대화 하지 않았고 딸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그였지만, 이 따돌림을 견디는 게 몹시 힘들다. 이 과정에서 그가 범인이 아님을, 그가 생각하는 범인이 정말 범인인지 드러내면서 그의 과거와 지금까지의 시간이 교차한다. 기억은 왜곡됐을 수 있고, 오래전에 느끼거나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야 '그게 그게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리 교수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툭하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누군가가 '너는 툭하면 버럭 소리를 지르잖아' 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며 다시 버럭 성질을 내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의 그 신경질이, 소리지르는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그렇지만 그가 테러범으로 의심받고 모두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걸 보는 것도 싫었다. 딸을 사랑하지만, 그런 딸을 기억하려고 하면 딸리 어릴 때 뿐이었던 것을 깨닫는 것도 싫었다. 아내의 평생 소원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싫었다. 그가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아주 길었음에도 아이사인이라는 편견에 갇혀 수사를 받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그가 의지할 데라곤 정말 하나도 없는걸까, 하는 초조한 마음이 되어,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으로부터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한단 말인가, 내 나름의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집 밖에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는 테러범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인터뷰를 하자고 해야할까, 그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방송국에 전화해 내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해야할까, 그것 역시 사람들이 믿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다. 그렇기에 그가 수사 요원들을 도와 테러범을 직접 맞닥뜨리고자 했을 때, 그 마음을 이해했다. 봐, 진짜 테러범은 이 사람이었고, 나는 이 사람을 잡는 데 도움을 줬잖아, 나는 그가 그렇게 항변하길 바랐지만, 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 이름이 이 사건에 연루되는 것 자체를 원치 않소." 자기 접시를 또한 말끔히 끝낸 리는 모리슨의 말을 끊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 허기가 졌다.

"이 사건에서 내 이름을 다시 언급하지 마시오, 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 왔다는 말조차 하지 마요."

모리슨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리가 지성 폭탄 테러범 체포를 도왔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요?"

리는 헨들리가 폭탄을 받았던 그날 병원 보도에서 자신이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연설을 기억했다.

"텔레비전이나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교훈을 얻었소. 정말로 흥미가 없어요. 난 여전히 작다리 양귀비로 남고 싶소. 당신이 내 말뜻을 알진 모르겠으나." (p.571)



결국 이 힘없고 약하고 외로운 노인은, 자신이 직접,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제 해결하는 데 뛰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아니, 세상의 전부가 여전히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거기엔 이십년간 연락이 끊겼지만 자신을 믿어주었던 친구가 와있었고, 오랜 시간 소원한 딸로부터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는 엽서가 도착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빠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래서 언제 도착할건지 적어놓은 빼곡한 엽서에,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놓았다.



이 신경질적인 교수의 이야기를 내내 초조하게 읽으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데다 심지어 조용하기까지 한 성격이라면, 이 사람의 억울함이 어디가서 풀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사랑해요, 라는 말에 무장해제되는 기분이었다. 아, 사랑은 뭘까, 사랑이 뭐길래, 내내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답해하던 나를 이렇게 만들까. 이 말을 직접 들은 리 는 어떨까. 자신이 평생 살아온 것보다 더 긴 것 같은 시간을 최근 며칠 사이에 보냈는데, 자신의 모든 체력이 마치 여기에 쓰여져야 했다는 듯 이제 지쳐버렸는데, 집에 돌아와 마주친 '사랑해요'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어쩌면 사랑은, 정말 진부하지만, 사람이 무너지기 직전에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밧줄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만 있으면 사실 낭떠러지로 떨어지려다가도 온 몸의 힘을 내어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는, 그런 밧줄이 아닐까. 



긴 독서였다. 여행 후에 좀처럼 책이 읽히지 않았고, 게다가 책이 너무 무거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고, 들고 다니면서 읽기가 힘에 겨웠다. 이제 이러고 싶지 않다,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에, 어느 날엔 들고 다니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주아주 긴 독서가 되었다. 띄엄띄엄 리 교수를 만났는데, 그렇게 띄엄띄엄 만났음에도, 사랑해요, 앞에서 무장해제 되어버리다니, 사랑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단 하나의, 소수의 사랑이기만 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이 걸려서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다. 


"전 제가 뭘 잃어버렸는지도 몰랐어요." 마크는 흐느꼈다. (p.596)


뭘 잃어버렸는지 몰랐던 마크, 리가 그토록 부정하고 잊고 싶었던 존재가, 자신이 잃어버린 걸 찾았다. 너무 늦었을 수도 있지만, 이만큼의 시간이 있었기에 리와 함께 공항에 나갈 수도 있게 되었을 것이다. 각자의 외로움이 길었지만, 이제부터는 좀 괜찮아질 것 같다. '내'가 무얼 잘못했고, 무얼 보지 못했었는지를 깨달은 뒤의 일이었다. 




"이 나라에서 살아서 가장 멋진 점 중 하나는," 그는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자네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겠지. 내가 온 나라에서는 그런 말을 했다간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지만 리는 모욕당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 농담이 아니네." 그는 온화하게 반박하고 다시 모두들 미적분학 수업으로 돌아갔다.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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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08-1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이.. 마음에 와닿다니... 이 죽일 무더위보다 더 지치게 되네요...

다락방 2016-08-17 14:43   좋아요 0 | URL
네, 리 교수가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이란 설정이거든요. `내가 온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clavis 2016-08-20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몸의 힘을 내어 자꾸 위로 위로..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살 수있는게 사람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16-08-22 13:22   좋아요 0 | URL
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죠. 그렇지만 한 명은 부족해요. 조금 더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클래비스님.

2016-08-22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