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45년간을 부부로 살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다. 남편이 찾는 사전이 창고의 어디쯤에 있는지 아내가 알고 아내가 오전에는 늘 개를 데리고 산책한다는 것을 남편이 안다. 서로가 서로의 사소한 습관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은 견고하다. 둘이 마주앉는 일이 그리고 이야기나누는 일이 나란히 눕는 일이 이들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이런 부부가 결혼45주년 기념 파티를 앞두고 있는데, 파티가 열리기 일주일 전, 남편 앞으로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남편이 결혼 전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를 찾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편지를 읽고 과거로 빠져든다. 과거의 여인과 함께 산에 올랐던 일, 그곳에서 그녀를 잃게된 일 같은 것들을. 그리고 지금 이렇게 거동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위스의 어느 곳, 그녀가 묻혀있는 곳을 가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지만, 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아내와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혼자 일어나 과거의 여인의 사진을 찾아 다락을 뒤진다. 과거로 돌아간 그는 자꾸만 과거의 그녀 얘기를 꺼내고, 잘 들어주고 위로해주려던 아내는 어느 순간 서운하다가 화가 난다. 이제 더이상 그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의 견고한 일상은 흔들리고 말았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과거의 연인 얘기를 듣다가 묻는다. 만약 그때, 둘다 그 산에서 살아돌아왔다면, 당신은 그녀랑 결혼했을까? 남편은 그렇다고 답한다. 아마 그녀와 결혼했을 거라고.
하아...45년을 함께 쌓아온 단단한 일상인데 그보다 오래전의 존재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는 이 견고한 일상을 흔든다. 이 일은 아내에게 큰 상처가 된다. 45년이면, 너무나 길잖아. 정말 길잖아. 결혼 45주년 파티는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오는데, 파티에 쓰일 곡들을 고르는 것도 아내의 몫이고, 아내는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평상시로 돌아와주길 바라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아내가 받은 상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파티때는 아내를 만나서 다행이라 말하고 아내를 사랑한다 말하고 그래서 아내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남편이지만,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편하지도, 안정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당연한듯, 《올리브 키터리지》가 생각난다. 오래전 바람피웠던 남편에게 '당신 아직도 그녀 생각해?' 묻던 아내가. 그리고 우리의 심장에게 더이상 이런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하던 아내가.
"말해요." 몹시 침착했다. 그녀는 한숨마저 내쉬었다. "제발, 얘기해줘요." 제인이 말했다.
어두운 차 안에서 가빠진 그의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녀의 숨결도 거칠어졌다. 제인은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기엔 우리 심장이 너무 늙었다고. 이런 일을 계속 우리 심장한테 시키면 안 돼. 당신 심장이 이런 일을 견뎌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p.246)
"그 여자 죽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죽었다면 스콧이나 메리한테 소식을 들었겠지. 그러니 안 죽은 모양이야. 하지만 소식은 전혀 몰라."
"당신 가끔 그 여자, 생각해요?" (p.247)
그가 대답하지 않자, 장이 뒤틀리는 듯하더니 속에서 해묵은 한 자락 고통이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그 특정하고 친숙한 고통은 제인을 얼마나 피로하게 했던가. 찐득한, 더러워진 은빛 액체가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더니, 이내 퍼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크리스마스 전구들도, 가로등도, 갓 내린 눈도. 모든 것의 사랑스러움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p.245)
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 나와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옆에 눕던 사람, 서로의 작은 습관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던 사람, 거실이나 부엌이나 욕실에서 부딪히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사람. 그 사람에게 잠깐 누군가 찾아들고, 그 누군가 찾아들었던 일 때문에 나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설사 그가 '잠깐동안'이었다 하더라도, 그 잠깐동안이 우리의 함께한 일상을 파괴했다면, 내가 그걸 지우고 사는 게 가능할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는 게, 그게 가능할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을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내자, 라고 백 번 다짐해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슬프다.
아니, 그런데, 이 대단히 훌륭한 책인 《올리브 키터리지》를 써낸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른 장편 소설이 지난주에 번역되어 나왔다!!!!!!!!!!!!!!!!!!!!!!!!!!! 꺅 ><
내가 진짜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진짜 나오자마자 너무 좋아서 당장 사겠어! 하고 장바구니를 비우려다가, 생각해봤다. 지금 당장 읽고 싶긴 하지만.. 안읽은 책 너무 많지 않아? 좀 참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여행경비도 모아야 하는데...책 사는 데 쓰는 돈을 좀 아껴야하지 않겠어? 사두고 안읽은 책만으로도 2년은 읽을 수 있겠는데..... 하루키의 신간인 라오스 책도.... 다음에 사도 되는거잖아? 응?
나의 계정에는 중고로 책을 팔아 입금된 돈 12,600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둘 중에 한 권을 사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환급 신청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여행경비하자...하고. 인생.......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하루키... 우리 조금 있다가 만나요. 그렇지만 꼭 만날 거에요.
4월달에,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마시고 있는데 남동생으로부터 갑자기 뜬금없는 문자메세지가 왔었다.
<갑자기 스토너가 참 대단한 소설이란 걸 느낀다. 가슴 울림이 있어.>
아니, 얘는 갑자기 왜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날 너 갑자기 왜그랬냐 물어보니, 소설중 캐서린이 스토너 앞으로 자신이 쓴 책을 보내는데 헌사가 쓰여진 게 생각났단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았고 짠했단다. 그게 생각나니 이 소설 진짜 좋구나 싶었다고.
나보다 먼저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읽던 남동생이 '쥐 좀 안나왔으면 좋겠다' 했는데, 내가 읽다보니 무슨 말인 줄 알겠더라. 그래서 나도 남동생에게 '쥐 좀 그만나왔으면 좋겠어'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남동생은 이렇게 답했다.
<이자식 일부러 이렇게 쓴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동생은 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군시절 장교식당 취사병으로 있다가 팔뚝만한 쥐랑 눈이 마주쳤던 것부터 시작해서 쥐에 대한 끔찍한 장면들 몇 개가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스티븐 킹 소설에서 쥐를 만나니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지난번에도 한강의 소설에 대해 친구들과 수다떨었던 얘기 쓰면서 말했었는데,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과 책에 대한 수다를 떠는 것은 진짜 즐겁다. 누구와도 가능한 대화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건그렇고, 함께 산다는 게, 함께 오래 산다는 게 대체 뭘까, 싶다. 45년을 살아도 한 순간에 저렇게 휘청일 수 있는건데.... 인생.......
당신 가끔 그 여자 생각해요? 라고 물을 수도 없고 대답을 듣기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