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혹여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해서 사귀는 마음보다도 내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귀는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그래 그럼 사귀어보지' 라고 관계를 시작한 적이 내게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 역시 일방적으로 큰 사랑을 퍼부어서 관계가 시작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 거다. 아주 오래전에 장동건이 출연한 드라마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정말로 사랑하게 됐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 경우엔 노력한다고 사랑이 되지는 않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쌓이는 건 있는데 내가 좋아서 시작하지 않은 상대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킨다거나 다정할 순 있어도, 나를 짜릿하고도 행복하게 만들어줄만큼의 사랑이 생겨나진 않았다.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를 노력으로 유지할 수는 있으나 사랑 자체를 노력으로 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걱정스런 연애-이 관계는 나의 일방적인 감정 때문에 시작된 건 아닐까?-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감을 느끼는 쪽으로 바뀌었다. 내가 만나는 이 남자, 이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나를 그저 '네가 좋아하니까' 라는 이유로 사귈 리는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확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의 경험과 또 그만큼의 이별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같은 크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내가 시작하려는 관계를 의심해보고 들여다보려고 했던 거다. 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것도 안다.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는 그저 나같은 인간일 뿐이고, 사실 대부분의 연애에서 '좋아한다'는 이유 말고 다른 것들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나의 옷을 벗기는 이유가 그저 자신의 순간적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를 또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랑은 아주 순식간에 끝날 수도 있고 또한 어떤 사랑은 굉장히 지저분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사랑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거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사람이 나와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이라고 지금 이순간 확신한다해도, 그 확신 자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아는데, 리니는 몰랐다.
열세살 리니에게 지금 사랑하는 사랑은 운명적인 상대였고, 그 사람 역시 나와 아주 단단히, 리니가 사랑에 빠진 꼭 그만큼의 크기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우리는 사랑하잖아, 우리는 사랑에 빠졌잖아, 그렇잖아!
"세상에, 주니어. 당신은 뭘 상상했던 거예요? 건초 헛간에서 남자랑 있다가 들켰는데 다음 날 가족이 싹 잊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나는 당신에 데리러 올 줄 알았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려보곤 했죠. 내가 피 크릭 가를 걸어가고 있는데 당신이 매형의 트럭을 세우고 '타'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널 데려갈 거야' 그러다 당신이 편지를 보내고 기차삯이 동봉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그렇게 했다면 난 당장 짐을 싸서 떠났을 거예요! 나랑 말을 섞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만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그랬다구요. 오빠랑 남동생까지도 나와 있을 때는 다르게 행동했고, 학교에서 사근사근하게 구는 여자애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연애에 대해 자세히 들으려고 친한 척한 것뿐이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난 거기 사람들은 그 일을 모를 거라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당연히 그들은 알았죠. 나랑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 애들이 고등학교 애들한테 말했으니까. 그들은 '저기 리니 매 인먼 말이야. 자기 오빠 졸업 파티에서 애인이랑 홀딱 벗고 활보했잖아'라고 말했죠. 그즈음 그런 식으로 소문이 불어났으니까요."
주니어가 리니에게 말했다.
"넌 그게 내 잘못이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먼저 시작한 사람은 바로 너야."
"아니라고는 말 못 하죠. 내가 나빴어요. 하지만 난 사랑에 빠져 있었다구요. 난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어요! 당신도 그렇다는 걸 난 알아요." (p.504-505)
"솔직히 우린 언제나 부부였던 것 같아요. 심지어 태어났을 때부터." (p.495)
열세살 리니는 스물여섯살 주니어와 사랑에 빠진다. 주니어는 리니와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리니가 열세살일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어느날 오빠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말을 들은 주니어는 그렇다면 너는 몇 살인거냐 물었고, 이에 리니가 열세살 이라고 답한다. 주니어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는 놀라서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다. 이대로 가면 큰일난다고, 아니 자신들의 연애를 누군가 안다면 자기는 진짜 큰일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나타나지 않으려는데, 그녀는 주니어를 운명이라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부탁해 다시 만나게되고, 그러다 함께 헛간에 뒤엉켜 있는 걸 리니의 아버지가 보게되고, 그 길로 주니어는 마을에서 추방당하고...
리니는 주니어가 자기 평생의 사랑이라 믿는다. 그당시 자신이 그와 어마어마한 사랑에 빠져있었다고 믿고, 성인이 될 때까지 다른 남자와 일절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여덟살이 되자마자 여기저기 주니어의 소식을 수소문해서는 결국은 그를 찾아간다. 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주니어는 입이 하나 더 늘어난 것에도 부담스럽지만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따라붙는 리니가 못마땅하다. 그는 그녀를 모른체할까, 그녀를 버려두고 그냥갈까를 고민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주니어는 리니를 자기 차에 태우고 숙소에 데려왔다가 숙소에서 쫓겨나고..
주니어에게 리니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사랑이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몇 번이나 빠져나가고 싶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둘은 아이까지 낳게되고 그렇게 다른 부부들처럼 평범한 부부가 된다.
리니는 이 일의 이면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지 못할 터였다. 그녀가 한 일을 보고 그가 받은 충격, 분노, 부당하다는 느낌, 손실을 복구하기 위한 노고. 유진이 '틸먼 브라더스'에 가야 했고, 그쪽에서는 급행료로 엄청난 액수를(일반적인 비용의 정확히 두 배) 청구했다. 주니어가 두 차례 새집에 가서 니스를 칠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금요일 아침에 가서 아이볼트(줄이나 훅을 거는 고리가 붙은 볼트)를 제자리에 넣고 8자형 고리에 로프를 다시 매고 천장에 그네를 매달 예정이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눈치조차 못 채겠지. 여기에 그들이 함께 사는 삶의 패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니어가 리니에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도 감추는 모든 비밀들. 이제껏 살면서 주니어가 얼마나 간절히 빠져나가고 싶었는지 그녀는 모를 터였다. 그가 곁에 머문 것은 단지 그러지 않으면 리니가 헤어나지 못할 줄 알기 때문인 것도 그녀는 모르리라. 또 잘못을 바로 잡으면서 하루하루 나아가기가 얼마나 힘이 부쳤는지도 모를터였다. 아니, 리니는 주니어가 계속 머문 것은 그녀를 사랑해서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마당에 그가 다른 말을 하면-그가 희생했다는 것을 그녀가 안다면- 리니는 무너질 터였다. (p.519)
희생한다고,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와 오래 함께 살게된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잘못' 확신한 채 믿는 게 좋을까, 아니면 상대의 마음을 진작에 아는 게 좋을까. 내 경우엔 아닌 건 빨리 빨리 말해서 서로 제 갈길을 찾아야 한다고 그동안 생각해왔는데, 이토록이나 강하게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는 리니를 보노라니,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면, 희생이라기 보다는 한 쪽의 감정이 일방적으로 크고 다른 한 쪽은 감정의 크기가 같지도 않으며 또 감정의 방향도 다르다면, 그들은 함께 하는 것보다는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리니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이라 확신하고 또 철저히 믿는다. 게다가 상대 역시 나랑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 믿음을 언제까지고 변치 않은 채로 지속한다. 어쩌면 리니가 '어려서'가 아니라 '그런 성향'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리니는 자신과 주니어를 로미오와 줄리엣쯤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주 나이가 들어서 며느리가 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주니어에게 신의를 지켰지. 한순간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어. 그래, 우린 작게나마 세계 최고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었지! 그러다 다시 만나자 헤어진 적 없는 사람들 같았어. 가끔 그런 일이 있기도 하잖니. 우린 헤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지, 예전과 똑같이." (p.403)
..... 주니어는 빠져나가고 싶어했는데...........다시 만나게 됐을 때 버려두고 그냥 갈까, 를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리니야말로 가장 자기중심적 사람이 아닌가 싶다. 열세살의 나이에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한...........
리니와 주니어가 열세살에 사랑에 빠졌고, 헛간에서 뒹굴다가 들켜서 몇 년간 떨어져 있었다는 것까지 리니로부터 다 들은, 앞으로 며느리가 될 애비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휘트생크 부인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녀가 시시콜콜 말하는 이 일이 …… 범죄라는 생각을? (p.403)
미성년자가 원해도 미성년자와의 섹스는 범죄다. 주니어는 미성년자와 몇 번이나 섹스를 했다. 당시에 미성년자임을 몰랐다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래서 도망쳤는데 성인이 된 그녀가 다시 찾아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부였던 것 같다 운운하며 결과적으로 훗날 부부가 되었다면.... 이건... 어떻게 되는걸까? 이건...... 뭐여...........
앤 타일러는, 줌파 라히리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어도, 새 책이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군에 속한다. 일상속의 작은 갈등을 그녀는 지독하게 잘도 묘사하니까. [아마추어 메리지]에서의 이런 문장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폴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마이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둘이 함께 사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230쪽
아, 나도 좋은 사람이고 당신도 좋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함께 사는 것도 좋아야 할텐데!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할까. 나는 결국은, 나도 좋은 사람이고 당신도 좋은 사람이라서 우리가 함께 사는 것도 좋다, 라는 식의 끝맺음을 맺고 싶다.
리니는 주니어를 사랑했으므로, 태어났을 때부터 부부같다 생각했으므로, 그래서 주니어와 함께 하는 생활이 행복했을까?
내가 널 받아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 왜냐면 나는 화가 났으니까. 오랜 세월 이런 장황한 말을 늘어놓게 만들었다는 게 분통 터져. 요 몇 년뿐 아니라 언제나 그랬어. 명절마다 오지 않고 가족 여행에도 얼씬하지 않고, 엄마 아버지의 결혼 30주년도, 35주년도, 지니가 아기를 낳을 때도 오지 않았어. 내 결혼식 때도 오지 않았고, 행복을 빌어 주는 카드나 전화조차 주지 않았지. 하지만 데니,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용서되지 않는 것은 …… 네가 우리 부모님의 관심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빨아들였기 때문에 나머지 형제들의 몫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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