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치일까? - 여유 없는 일상에서 자꾸만 감정이 생기는 당신에게
벨 훅스 지음, 양지하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절반정도 밖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별점을 높게 줄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고나니 오히려 그녀의 전작 『올 어바웃 러브』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더라. 다시 사야겠다. ㅎㅎ 

리뷰쓰기는 뭣해 밑줄긋기만 올리고 싶은데, 알라딘아, 왜 이제는 밑줄긋기 따로 안되냐. 밑줄긋기만 되게 해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성장기부터 접하게 되는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를 비판해왔지만 현실은 아직 그대로다. 이제 소녀들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세상에서 자라나지만, 아직도 이들의 성장기에 페미니즘적 사고나 관습을 설 자리가 없다. 여전히 소녀들은 페미니즘 운동이 태동하기 전과 마찬가지의 성역할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페미니즘 운동의 가닥들이 그런 노력을 지지해주지만, 소녀들은 가부장제의 견고한 틀에 갇혀 살던 때와 비슷하게, 아주 작은 자유만이 허용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덫에 걸린 듯한 상황에서는 인종과 계급에 상관없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소녀들 사이에 널리 퍼진다. (p.14)

오늘날 많은 여성이 스스로는 절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즘에 영향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지만, 위협을 당하거나 비참한 상황에 놓이거나 혹은 단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면 그 관계를 그만둘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반면 `영원히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그들의 선배 세대는 대개 사랑에 회의적이다. (p.30)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아픈 경험을 해보았다. 고통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얻었고, 약속된 사랑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분명 약속을 지킬 것이다. 우리 중 몇몇은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지만 분명히 다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지속될 것이다. 수많은 시련과 착오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을 향한 탐색은 거듭해서 우리를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려보내, 여성인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돌아보게 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앞으로 불러온다. (p.37)

나는 사랑을 다룬 위대한 문학의 고전과 싸구려 로맨스를 번갈아가며 읽었다. 나중에 할리퀸 로맨스 장르로 자리 잡은 초창기 밀스앤분 출판사의 책 중 대부분은 노동 계급 여주인공이 고난을 거쳐 부유하고 막강한 상대와의 애정 관계로 보상받는 이야기였다. 대개 남주인공이 지속적으로 상대 여성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것이 줄거리의 핵심이었다. 가난한 노동 계급의 여성이 사랑을 찾는 작품 속 세계에 가정폭력이나 학대는 없었다. (p.48)

성적 규범을 거부하고 반체제적인 여성으로 존재하기 위한 지지를 찾으려는 이런 투쟁은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에게서 발견된다. 성적 비하와 폭압에 대항해 그들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은 자랑스럽게 `쌍년bitch`이라는 페르소나를 채택했다. 30대 언저리의 여자들과 함께, 사나운 엘리자베스 워첼은 "자유, 버려진 자유의 환각인 쌍년 페르소나는 우리에게 매력적이다"라고 선언한다. 내 세대의 반체제적 여성들은 모두 이제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이 되었고 더는 쌍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한 자아실현, 자기인식, 완전한 인간됨을 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가 그것을 원하는 우리를 반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의 성별에 관계없이 이 탐색을 긍정할 상대를 찾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었다. (p.53)

자신의 여정을 그릴 지도가 없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분명히 표현할 수 없었던 우리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의 글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우리가 겪던 모순들, 견디거나 맞서 싸워야만 했던 갈등을 전부 겪었던 플라스는 우리 세대의 아이콘이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길 원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길 원했으며, 그 두 갈래 길이 우리를 같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확실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양성이 평등한 세계가 되었다지만, 엘리자베스 워첼이 『비치』에서 이야기 한 것은 적확했다. "플라스의 목소리는 욕망하기를 허락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변했다. 그녀는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욕망을 원했다. (…) 자신의 욕망에서 행복하고 희망찬 것들의 맛좋은 영양분을 거부당한 그녀는 정서적 난파를 겪으며 고갈되었다. 그런 불충족은 플라스의 명석한 현존보다도 더 압도적인 무게로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부재였다. 결국 그녀를 죽인 건 정신적 기근이었다." (p.54-55)

궁극적으로 나는 사랑을 찾는 데 무턱대고 기대기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믿게 되었다. 나는 사랑을 구했지만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내가 찾은 자유는 여성의 삶에서 사랑이 있어야 할 적절한 장소를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사랑은 애정 관계라는 원천에서 샘솟는 것이라기보다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일이며, 나를 건설하고 삶을 창조해나가는 단단한 토대에 사랑이 깃들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추구와 자유에 대한 탐색이 합쳐지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었다. 사랑을 찾는 여정에서 나는 자유를 향한 길을 발견했다.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사랑을 배우는 첫 단계였던 것이다. (p.57-58)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이 단순히 자유의지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속하게 된 제도속의 개체로서 행동하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는 가부장제가 남성을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보다 사회적 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여성의 자율성에 훨씬 강렬하게 동조했을 뿐이다. (p.62-63)

성적 관계 혹은 낭만적 관계를 이성애로 시작한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상대 남자를 바꾸는데 지쳐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훨씬 쉽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시기 우리는 여성이 가부장적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곤 했다. 아주 소수의 남성들만이 페미니즘으로 기꺼이 개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남자와의 관계도 유지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을 포용하고자 한 여성들은 단순히 남자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권력 투쟁에 끝없이 휘말려야 했다. (p.64-65)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목표는 개인의 성장이었다. 온전한 자아실현을 위해 우리는 날개를 펴 모든 곳을 날아다녀야 했다. `좋은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선언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꼭 급진적 페미니스트만을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p.66)

경제력의 변화와 맞물린 전투적인 페미니즘은 노동의 성격을 바꾸었다.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쪽이건 아니건 점점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남성이 늘어나고 있음이 여러 조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여성이 새로이 경제력과 자유를 가지게 되면서 운동을 힘을 잃어갔다. 집 밖에서 페미니즘의 성공은 쉽게 인정됐지만 집 안에서의 일들은 천천히 그리고 계속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곧 모든 페미니스트를 실망과 좌절로 몰아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2교대the second shift"라고 이름 붙였듯 여성들은 점점 바깥일을 하면서 여전히 집 안에서도 아이 양육과 요리, 청소 등의 가사를 거의 모두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바깥에서의 혁명보다 집 안에서의 혁명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각 가정 내부에서 여성이 남편과 자식에게 뿌리 깊은 버릇을 바꾸라고 설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p.78)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으로 중재되어야 했다. 선천적으로 남성이 우월하다고 믿는 여성 혐오자들이 계속해서 감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담론을 맹렬히 만들어낼 줄은 아마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하며 얻는 기쁨과 별개로 남성들은 정서적 영역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사랑의 가치절하를 의미했다. (p.113)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자와는 다른 여성의 인지 방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을 이용한다. 남녀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에서 저자는 내내 페미니즘 학계의 남녀 모두가 공히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던 성적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복하며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
길리언과 마찬가지로 그레이는 남자보다 선천적으로 관계지향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길리언과 달리 그레이는 이 이론을 남자들이 더 관계지향적으로 바뀌게 하기 위해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남자들의 정서적 무심함을 정당화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마치 가부장제나 현실에서 남성의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남녀관계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가 환기하는 관계의 세계에서 이성애자 사이의 갈등이나 불행은 대체로 단순히 소통 불능인 경우가 많다. 『화성~ 금성~의 자녀교육』에서 그레이는 "태어나는 날부터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로,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로 태어난다"고 독자들에게 환기시킨다. 남녀 역할이 선천적으로 다르게 주어진다는 성차별적 사고는 이를 통해 강화된다.(p116-117

그레이의 책(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감정적인 교감에 관심이 적은 남성들은 언제나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다뤄진다. 남자들의 그런 정서적 성향을 당연히 여김으로써 그는 기본적으로 가부장제를 지지한다. 남자들이 정서적 무심함을 심리학적 테러리즘의 무기로 삼는다는 사실은 논의되지 않았다. 무심한 남자를 다루는 기술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건 여자의 잘못이었다. 그레이는 그런 기술을 알려줌으로써 여자를 구해주고자 한다. 예컨대 동굴로 숨어버리는 남자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계속 이야기하자고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그의 책은 성차별주의자 남성과 잡음 없이 살기 위한 전략을 여성에게 제공한다는 관점에서라면 어느 정도 유용했다. (p.117)

존 브래드쇼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뉴에이지 시대에 쓰인 관계에 관한 책은 대부분 좀처럼 가부장제의 힘을 언급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내재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가부장제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여성과 남성이 그런 사고를 받아들인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p.119)

반反가부장적 사고는 생물학적 성 차이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문화적 상황이 신체적 차이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것,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가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양육자로 사회화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런 사회화는 자궁 속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고 키워진다는 생물학적 사실에 따른 것일 터이다. 그러나 임신했을 때 아이를 소극적으로 키운, 즉 태교를 별로 하지 않은 엄마는 출산 후에도 아이에게 무관심하다는 구체적인 사례도 있다. 처음으로 출산한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경우도 많다. (p.119)

실제로 다른 이가 더 잘 지내도록 돕는 양육 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는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는 남성이 타인을 양육하고 돌봐주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상황을 강화시켰다. 오늘날에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페미니즘의 가장 유용한 통찰 중 하나는 건강한 방식으로 양육된 성인 남자는 자신이 양육되는 과정에서 양육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생 이후 유아기까지 양육을 담당한 남자들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유대감을 느낀다. (p.120)

제인 저비스는 페미니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내가 어떤 참치 샐러드를 좋아하는지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요리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원한다면 그 방식대로 가장의 요리법을 정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른네살에 대학원에 입학했고, 이혼했으며("남편은 내 새로운 열정에 기뻐하지 않았어요"), 마흔 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찾았고, 정서적으로 준비가 되었기에 상호적인 사랑을 찾았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면서 상호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우리 자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변화시킬 수 있는 스스로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이다. (p.140)

결코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성인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사랑의 탐색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 여정은 친밀감과 진정한 사라으이 본질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 믿음을 재검토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성이 천성적으로 사랑에 적합한 존재라는 편견 대신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성과 개인적 성장, 정서적으로 열린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p.140)

자녀는 단순히 부모가 하는 말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자녀는 그들의 행동으로부터 배운다. 부모가 딸에게 `있는 그대로의`모습을 긍정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나 다른 여성이 지닌 가치를 폄하한다면 건강한 자기애의 토대를 만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건 건강이라고 말하면서 딸들이 날씬해지기를 바라며 집착하는 아빠, 심지어 다른 여자와 비교하며 아내에게도 살을 빼라고 종용하는 아빠는 실질적으로 여성이 스스로를 싫어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체중이 자신의 가치를 매길 것이며, 결정적으로 사랑받을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거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p.144)

엄마가 딸을 위해 여성의 몸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되며 존중되는 가정을 형성하려 노력한다면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신체 조건을 싫어하게 만드는 미디어의 폭력적 메시지에 적절한 대응을 해줄 수 있으리라. 대체로 여성의 신체를 평가절하하는 문화는 사랑받는 집에서 자란 경우까지 포함해 모든 소녀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신체적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하다.
자신의 몸을 싫어하도록 길러졌더라도 마음을 바꾸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이에 상관없이 먼저 건강한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미와 매력의 토대로 삼아 스스로를 사랑하는 작업을 시작해보자. 이것은 단지 `싫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는 문화적 혁명 중 하나도. 싫다고 거부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물리적인 신체를 통해 규정되며 여성의 몸이 뭔가 부족하고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모든 종류의 비하나 평가절하에 대해 싫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p.145-146)

최근 페미니즘의 가장 활발한 활동은 여성으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게 하는 미의 기준에 반발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렇듯 여성 신체에 대한 자기혐오가 가져온 섭식장애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많은 여성, 특히 페미니즘 정책의 옹호자였던 이들은 계속해서 전통적인 여성 혐오적 미의 기준들(주로 과하게 체중을 줄이거나 날씬함을 강조하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서만 페미니즘 이론과 관습을 접한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라면 여성의 외모를 향한 찬사에 격렬히 반대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을 향해 요구한 것은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지만 않는다면 외모 꾸밈과 미적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p.146-147)

페미니즘 강의를 듣는 남자들은 성역할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부장적 모델을 따르지 않고 남성으로서 자아실현을 할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페미니즘 해방을 찾는 남성들을 가르치고 이끌 자료들은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다. 성차별에 반대하는 남성들은 그들 주변을 온통 둘러싼 성차별적 관념에 순응하라는 압력 때문에 숨고 싶어 한다. 해방된 남성성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느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여성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좋은 남자`들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협이나 지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여성을 공격함으로써 증명해야 하는 남성성이 없다. 좋은 남자에 대한 유용한 정의를 제안하며 실버스타인과 래시봄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공감할 줄 알고 강인하며 독립적이면서 연결되어 있고 자신과 가족, 친구, 사회에 책임감을 느끼며 그런 책임감이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p.237)

`사랑을 행하는 남성`은 아직 `사랑을 열망하는 남성`만큼 많지 않다. 그래도 남성들이 사랑을 열망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남자를 사랑하고 그들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하는 이야기에 기꺼이 가슴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화성에서 온 남자가 아니라 바로 이 지구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남자들이 쓴 책을 읽고 싶다. 이들이 우리에게 치유의 지혜를 줄 수 있다. 이들의 가슴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사랑의 대화가 시작될 것이고, 그때 진정한 이성애적 교감은 가능해질 것이다. (p.239)

우리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아내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 누구도 행복이나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자기인식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파트너십에서, 커뮤니티 속에서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교감을 나누는 건 우리 삶에서, 지구상의 생명체로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내면의 기쁨은 자기 자신의 충만한 영혼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최근에서야 여성이 스스로의 영적 자아를 보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공적으로 인정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디어는 페미니즘의 맹목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많은 여성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게 한 의식적 촉매제 역하을 한 데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했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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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ology 2015-07-0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사치일까요? (하하)

다락방 2015-07-06 16:27   좋아요 0 | URL
다시 읽으면 좀 더 이해가 될까 싶어서 다시 읽어보려고 했지만 쌓여있는 다른 책들을 보니 차마 엄두가 안나요. 하아-

blanca 2015-07-0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왜이리 뜸하셨단 말입니까?

다락방 2015-07-06 17:38   좋아요 0 | URL
네.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느라 그랬습니다. (응?)
히히, 반가워요, 블랑카님!
:)

단발머리 2015-07-0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지금 [올 어바웃 러브]를 읽고 있으며, 곧 이 책을 읽을 예정이었던 저는, 다락방님의 이 페이퍼를 읽고서는, 아...
나는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네요.

밑줄긋기를 시간날 때마다 꼭 추가해 주시기를....
남동생분께, 다락방님의 회의 중단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꼭 전해주시기를... ^^

다락방 2015-07-07 13:53   좋아요 0 | URL
네네 요즘 모든거에 의욕상실이라 책도 읽기 싫고 밑줄긋기도 하기 싫고 막 그러네요. ㅎㅎㅎ
더위 먹었나 ㅠㅠ

반가워요, 단발머리님! >.<

2015-07-07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7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7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