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손에 들 수는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는 일은 이전만큼 쉽지 않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평소에도 집에서 책만 집어들면 잠이 쏟아지던 터라, 이 책을 읽는 그 아흐레동안, 나는 책장을 넘기는 대신 잠을 택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달라져있기를 바랐다. 내 정신도, 마음도. 또한 이 세상도. 


모든 것들이 달라져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잠들기 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안정된 내가 잠에서 깬 후에, 거기, 있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ireaditnow 에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면서, 아 무척이나 힘든 독서였다, 라고 생각했다. 이런 때에는 읽지 않는게 더 좋았을것을, 했다. 아흐레나 걸릴 만큼 이 책이 재미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이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두고 나중에, 책장을 넘기는 일이 더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한 번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들을 앞에서부터 읽어보았다. 그 부분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 이 책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좋은 책이었어.




우주 비행사가 아니라 영문과 교수였다.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그것은 어느 책벌레 아동의 당연한 운명이었지만, 어쩐지 그 운명이 요구했을 게 틀림없는 순수한 지식의 축적에 약간 의기소침해져서 그는 8월 말이 될 때까지 대학에서 떨어져 지냈다. (p.81)



이 책의 주인공 샘슨은 머릿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고, 그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에는 12살 이후의 기억을 모조리 잃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건 열두살 이전의 자신인데, 서른 여섯의 그의 현재 직업이 교수인 걸 알고 그는 '내가 비행사가 될 줄 알았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혼을 했고 '애나' 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애나를, 자신의 아내를 기억하지 못한다. 수술이 끝나고 자신이 애나와 함께 살던 집에 돌아와 늘 그랬던것처럼 함께 있지만, 그것은 샘슨에게 불편함을 줄뿐이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여전히 품고 있는 애나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다.


열두살 까지의 나는 어땠는가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시절 무엇이 되고 싶었던가. 지금도 그렇지만 여전히 그때도 무언가 강력하게 원하는 건 없었다. 그러나 장래희망이란 게 있어야 했고, 그래야 수업시간에도 또 종종 질문해대던 어른들에게도 답할 수 있었다. 열두살 이전, 그러니까 열두살 보다 더 어릴때의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열두살 무렵 그리고 그 후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던 나는 기억하되, 내가 진정으로 피아니스트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약 지금의 내가, 열두살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그 기억을 잃은채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았다면, 그때 나는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아, 나는 내가 평범한 회사원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럴 줄은 몰랐어, 이런 어른일 줄은. 물론 내가 어떤 모습일 거라 추측했냐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말문이 막힌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건데, 나는 대체 어떤 어른이 어울렸을까. 아니, 어떤 직업이 내게 어울렸을까. 


지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내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보다는 역시 처음의 물음이 더 강력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되었는가. 나는 내가 바란 어른이 되었는가.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을 알았을까? 무엇보다, 열두살까지의 기억만을 가진 내가 보는 지금의 나는, 후회하지 않을 모습인가? 실망하지 않을 모습인가?




그는 애나와 떨어져 지내기로 결심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교수였던 그때 자신의 제자였던 '라나'를 만나 친구가 된다.



그는 라나의 선생이었고 그녀는 제자였으니까. 그래도 그가 특별히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수업 후 그녀가 자기 물건들을 챙겨 나갈 때 그 격정적이고 아슬아슬한 모습을 경이로움 같은 감정을 가지고 뒤에서 지켜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해 보였다. 아주 최소한,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만났다면 검처럼 깨끗이 그의 마음을 궤뚫었을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라나는 프랭크 외에 그가 사귄 첫 번째 친구였고, 아무튼 그녀가 자신과 어울려 주었으면 했다. 그녀에 대해 애나에게 바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이 다른 대부분의 것을 공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년의 세월, 결혼, 침대, 욕실, 레코드들, 접시들, 가구, 전화기, 친구들을 말이다. 그는 자신만의 뭔가를, 그러니까 함께하는 그들의 삶 바깥에 그에게만 속해 있는 작은 땅을 원했다. (p.92)




엊그제 친구를 만났다. 곰탕을 먹고 두루치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내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친구에게 나는 내가 도대체 왜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건지 얘기했다. 심리학을 공부중인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내가 왜그런지 얘기해주었다. 그것이 해결방법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아, 내게 이런 기질이 있는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런 나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 하는 기분. 그에 앞서 술잔을 부딪치며 내가 힘들었노라 고백하면서, 심리치료도 생각한다고 했을 때 친구는 내게 말했다. 자기가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그 친구의 '일'의 영역인데, 그걸 내가 '친구'로 만나 그 친구의 '능력'을 내게 보여달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공평치 않은 기분이 들어, 그건 네 일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 힘들다고 너를 불러,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힘이 들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기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돈을 주고 상담사를 만나고, 의사를 만나는거다. 그러나 네게는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들을 그냥 만나면 되는거다, 하고.



아, 내게는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친구가 있는가. 새삼 감사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들이 내게 베푸는 한없는 애정과 친절과 관심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친구를 만나고난 후의 나는, 그 전의 나에 비해 조금 더 가벼워져 있었다. 다음날 엄마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친구에 대해 말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친구를 사귀었냐며 정말 잘 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나갔고,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던 그 시간. 나는 내 친구들을 떠올렸다. 엊그제 만나 나와 곰탕을 먹었던 친구를, 그전에 만나 내게 스파게티를 사주었던 친구를, 나랑 노가리를 함께 먹는 친구들을, 늘 내 옆에 있진 않지만 부르면 응답해주는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 모두가 내가 만든 친구들이었다. 내가 원해서, 내가 좋아해서 붙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나라는 인간을 보고 내게 응답해주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상의 영역에 가끔씩 끼어드는, 그러나 내 일상 영역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속해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모두 내 스스로 붙잡고 있었다. 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그는 복도 탁자에 전화를 찾아 어둠 속에서 더듬거렸다. 저편에서 전화가 울릴 때 뉴욕이 세 시간 더 빠르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러니 아마 애나는 잠들어 있을 터였다. 그녀를 깨운다는 생각, 심야에 불쑥 끼어드는 친밀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무방비할 터였다. (p.164)




곰탕을 함께 먹은 친구 N 이 나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 새벽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었다. 술을 마신 뒤라 잠을 깼다고, 내 잠을 깨울까봐 문자 대신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고. 나는 엊그제 그 친구를 만나 네가 깨는 새벽이면 언제든 문자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아침과 낮, 깊은 밤에 불쑥 끼어드는 친밀함을 나눠가진 사이었고, 그것이 새벽이라고 금기시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친구들과 그런 친밀함을 나누고 싶다. 심야에 불쑥 끼어들어 나를 깨워도 괜찮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충분히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러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가슴속에 몇몇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끓어오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특히나, 내가 낮을 살고 있을 때 밤을 보내는 친구가 생각난다. 햇볕을 받으며 일자산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잘자요, 라고 건넬 수 있는 곳에 있던 친구. 내 안의 충만한 애정을 그가, 그들 모두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시간을 줘요. 당신에게도 시간을 주고. 상황이 어쨌든 간에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기운을 되찾는지 보면 놀랍지요. 확실해요,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 다 깨닫고 그것을 실감할 거요. 눈을 뜨면, 아마 빛이 어떤 식으로인가 당신들을 비출 것이고, 당신들은 일어서서 자신에 대해 '괜찮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녀에게는 더 어려운 일일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게 당신은 슬픔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거요. 슬프고 혼란스럽고, 그럴 거라고 장담합니다." (p.165)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 남겨진 사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한 쪽이 더하고 덜한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의 슬픔. 그러나 어떤 이별에 대해서는 기운을 찾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기운을 차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그 이별을 겪기 전의 기운과 같은 강도의 기운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별에 대해서 우리는 괜찮아졌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하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찮은 척 하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은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 감정을 함께 겪으려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감이고, 공감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능력이다.



샘슨도 그걸 깨닫는다. 모두에게 똑같은 기억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세상이 살기에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답. 샘슨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억을 심어준다고 해서 방법이 되는게 아님을 깨닫는다. 우린 모두 각자의 기억을 각자의 몫으로 가지고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같지 않지만, 다른 기억을 가진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감정에 공감하려고 해야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정신이란 그 자신이 아니면 어떤 존재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의 의식에 들어가서 거기에 깃발을 꽂는 것은 그 의식이 기대고 있는 절대적인 고독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자아에 대한 위협이고,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일 것이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p.321)



견디는 건 스스로 해내야 하는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있었다. 거기에는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해받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에는 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다. 다른 사람에게 깊숙이 접촉당한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종양 이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의 옛 인생 이야기를 무슨 비화처럼 혼자 읇조렸다. 옛날에 그가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를 품에 안았는데, 그러한 접촉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자 그는 놀랐을 것이다. 침대 옆의 등불을 켜면서, 그녀에게 아무 표시가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이름은 통과할 수 있고 반대편에 똑같은 곳으로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소리였다. 애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 그 속에서는 붙잡을 게 없는 이중의 메아리였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가 충분히 가까이 오도록 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별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p.322)



우리가 상실을 견뎌내는 것, 고통을 극복해내는 것, 괜찮아 지는 것에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같은 기억, 같은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별개로 존재하며 서로 다른 경험,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뻗고 또 그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찾을 것이다. 내가 부를 때 당신이 응답하고, 당신이 누군가를 찾아 헤맬 때,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길에 샘슨은 마리에타를 지나쳤다. 그녀는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연속극의 연기를 자신의 끝없는 무언극으로 다시 뱉어 내고 있었다. 그 아시아계 남자는 「세이 유, 세이 미」는 부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대신 손짓을 곁들여 불안정한 가성으로 크게 「헬로(Hello)」를 노래했다.

"헬로,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인가요‥‥‥." (p.74)







이 페이퍼의 제목은 이 책의 373 페이지 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페이지의 정확한 문장은 아래와 같다.

그는 그 순간을, 날씨와 장소와 미리 준비한 말들을 주고받는 것을 종종 그려 보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은 흩어지고, 현재 벌어지는 일의 어찌할 수 없는 유일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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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 2014-05-04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readitnow! 쓰시는군요!

다락방 2014-05-07 08:53   좋아요 1 | URL
네, 씁니다! ㅎㅎ

2014-05-05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