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받을 수 있는 상처의 최대치-이런말이 존재한다면-는 얼마만큼일까. 우리 모두는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아닌 타인의 상처는 간혹 작고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왜 그정도도 극복을 못해, 왜 그걸 상처라고 말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누가봐도 상처가 어마어마하겠다, 라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상처라면, 대체 그 상처는 어떤 크기,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절대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보아도 그 상처의 크기 앞에 할 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일이 누구에게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누군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 '그레이브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열두살의 나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누나랑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살아가다가, 그의 나이 고작 열셋에 눈 앞에서 누나가 고문당하며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 소년. 결국 자신이 이르게 될 종착점은 자살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쌓이는 시간들. 피흘리고 멍들고 애원하는 누나의 눈빛을 그대로 보며 누나를 지켜낼 수 없었던, 범인을 보았지만 범인의 이름조차 입밖에 낼 수 없었던,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로 혼자가 된 소년. 그런 상처가, 과연, 어른이 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을까? '상처'라는 말을 과연 이 경우에 써도 되는 말인가. 아니, 이건 상처보다 더 큰 무엇이 아닐까.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레이브스는 수시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에. 혼자일 때도, 혼자이면서 누군가를 보고 있을때도, 누군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때도, 그는 수시로 어린 소년이 되어 누나가 고문당하는 그 현장에 놓인다. 그때 누나를 때리고 집어 던지고 죽이던 그 범인, 그의 앞에 그가 있다. 수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상황 때문에,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헷갈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미 나는 그레이브스가 되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과거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애써 그가 이끄는 과거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어느틈에 현재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과거 속에서 누나를 보고 있다. 현재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있고 과거 속에서 살인범의 목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틈틈이, 그레이브스가 써내는 소설속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게 수시로 빈번하게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대인관계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그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꿈꿀 수가 없다. 아니, 그건 그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면 보호해줘야 할 누군가가 생긴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혼자라면, 그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아도 된다. 결국은 자살을 할거라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끝내야 할거라고 생각하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그가, 여전히 혼자 사는 이유이다.
"선생님에 대해 조사를 좀 했어요. 올해 마흔다섯이더군요. 슬로백과 똑같아요. 결혼한 적도, 아이도 없죠."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그레이브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두려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벌어질 리 없다. (p.44)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와 침대를, 화장실을, 부엌을 함께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꺼진 집에 돌아가 내 손으로 불을 켜고 내 손으로 보일러를 돌리고, 내 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갈아치우는 일들이 간혹 외로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레이브스 조차 도시로 거처를 옮겨 다른이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니까. 내가 비명을 지르면 옆에서 누군가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곳. 내 공간에 내가 비록 혼자일지언정, 문을 열고 나가면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그가 원하니까. 나 역시 빈번하게 혼자 사는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말해오지만, 그 혼자의 의미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이 없는', 그런 혼자를 말한 게 아니다. 내 침대는 내가 혼자 쓰고, 내 집의 문은 언제나 내가 열고 들어가야할지언정, 까페에 가면 주문을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마트로 가는 길에 누군가와는 아는 척을 할 수 있기를, 가끔은 식성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기를 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24시간 365일 그 모두를 오롯이 혼자이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그런 혼자를 원했던 것이다.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한적한 곳에서 사는 일만큼은, 그레이브스도 피하고 싶었다. 그와 누나가 고통을 당하는 그 긴긴 시간동안 아무도 들러주지 않았던 그 한적한 집, 그는 그런 곳을 원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일상의 소리, 그에겐 그게 필요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그의 과거로 몰두하는 그 수많은 시간으로부터 그를 현재로 끌어올려줄 누군가도.
그러나 그는 그런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올랜도 블룸'이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려는 그 순간, 그 순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했던 생각을 똑같이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속에서 그가 자살하려던 그때, 식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자살을 진행할까 전화를 받을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고, 전화통화를 한 이후에는 수습할 문제가 생겨버리기 때문에 자살을 중단한다. 그때. 그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이 세상의 누군가가, 그러니까 단 한명이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식으로든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위기의 상황에 놓인지도 알지 못하는채로, 그렇게 나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인간에겐 누구나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물론 삶과 죽음은 운명일 수도 있고, 사실 나는 그건 대부분 운명의 소관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조금만 생각하고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갈 수도 있는거니까. 물론 그 틀어짐 자체도 운명이라고 하면 더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우리 모두에겐, 개개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나를 위기에서 구해줄, 수렁속에서 건져줄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그레이브스가 '엘리너'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된 것이 무척이나 고맙고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엘리너는 알았을까? 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 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엘리너는 계단을 올라오는 그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충망 문을 열어주었다.
"점심때 기다렸어요. 저녁때도 그렇고요."
가벼운 말투였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그다지 우습지 않았다.
"굶어 죽으려는 거예요, 폴?"
그레이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빴어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p.247)
굶어 죽으려는 거예요, 폴? 하는 엘리너의 말때문에, 나는 왈칵 울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녀가 고마워서. 그녀의 그 말에 담긴 걱정과 안타까움이 어떤건지 알 것만 같아서. 그레이브스의 외로움과 고독이 수시로 나를 후려갈기고 있는데, 이렇게 엘리너가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다. 엘리너는 그레이브스가 쓴 소설을 읽으며 그를 파악하고, 그가 과거로 갈 때마다 대체 어디를 가는거냐고 물을 정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그레이브스에겐 이런 경험이 처음이지만, 이것이 싫지 않다. 그녀와 헤어지는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엘리너가 그렇게 계속, 그가 도망쳐도 그의 옆에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레이브스에게 그녀는 정말 필요한 존재이니까. 이 아픈 남자에게 그녀는 구원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러면서 문득 나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나였다면, 그레이브스의 옆에 있으려고 했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아니오' 였다. 나는 그레이브스의 옆에 있기를 선택하는 그런 여자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고통과 상처, 그것이 아주 깊어 영혼이 지쳐버린 남자를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그를 외면한 채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레이브스에게 엘리너의 존재가 구원같다 여기면서, 나는 내가 그의 구원의 존재는 되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란 사람은 이토록이나 이기적이구나.
어릴때의 내가 자라 지금의 내가 된 것. 이건 유전적 요인이 더 큰지 혹은 환경적 요인이 더 큰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것인것 같다가 저것인것 같다가 그 둘이 사이좋게 조화를 이룬것 같다가, 뭐라 딱히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범죄자인 집에서 자랐다면 내가 그 가족들 틈에서 혼자 꿋꿋이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까? 모두가 감옥을 내집처럼 드나드는 그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나 혼자 학교를 가고 직장에 취직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레이브사는 오십년전의 살인사건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 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오십년전 그 저택의 아들 '에드워드'가 사귄 '모나' 란 여자를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어마어마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뒷조사를 시켜본 결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범죄자였기 때문에.
포트먼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모나는 가족과 함께 살았음에도 불법적인 행위에는 일절 가담하지 않았다. 여덟 살 때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소년 법원에 끌려갔지만, 그때는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포트먼이 알아낸 한도 내에서 그녀는 다시 체포당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늙은 형사는 그녀가 '가족이 저지른 많은 불법적인 계획 가운데 한두 가지 일에는 가담했을 것'이라고 보곳서에 적었다.
하지만 10대의 모나가 여러 범죄 음모에 가담했더라도 그런 생활은 갑자기 그녀가 짐을 싸 보스턴으로 향했을 때 끝나고 말았다. 보스턴으로 간 그녀는 '여자 기숙사'에 방을 얻고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946년 6월, 그녀는 에드워드 데이비스를 만났다.(pp.388-389)
가족은 세상 그 누구보다 나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내줄 수 있는 사람들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모나는 그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주 많은 시간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 아빠는 왜 우리 엄마는 왜 우리 오빠는..그런 생각들로 숱한 날들을 한숨 쉬며 보내지 않았을까. 그들이 자신의 가족임을 수없이 부인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음모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기까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은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일에 그렇듯이. 그렇지만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죄책감과 고통속에 허우적대던 그레이브스는, 결국 눈물 흘리며 죽어간 페이예를 이해하고 곧 그녀가 될 수 있었다. 그녀를 보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되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궤뚫고 있는 엘리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흉터를 없앨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그 사건을 겪었던 그 일 테니까.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홀로 버티어가던 이 외롭고 험난한 세상에, 자신의 과거를 혹은 자신의 상처를 아는 사람을 하나쯤 만들어 둔 것은 잘한 일이다. 그가 닫힌 공간에서 홀로 지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한 명쯤은 그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될 수 있으니까. 어떤 순간에는 그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려 준다는 게 한 순간을 더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동기가 되지 않을까. 붙잡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게 아니어도 나도 모르게 살짝 누군가의 옷자락을 쥐고 있다면, 오늘 끝날 수도 있는 삶이 내일로 모레로 더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고통을 끝내는 방법이 삶을 끝내는 방법 뿐이라면 그 사람에게 삶을 선택하라고 애써 강요할 순 없겠지만, 살아서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옷자락을 잡고 손길이 닿는채로 이야기를 나누면, 고통의 크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기쁨이란 것도, 행복이란 것도 찾아들 수 있지 않을까.
책장을 덮었을 때는 그저 울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그저 울고 싶다는 말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점심으로 게살볶음밥을 시키고, 군만두를 옵션으로 시켜두면서, 아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브스 때문에 소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그레이브스 때문에 많이 슬퍼서, 그 고독함과 외로움이 손에 잡힐듯해서, 그의 과거속으로 자꾸만 나도 빨려들어가서. 나는 그저 이 책을 읽는 동안만 그의 과거를 같이 겪을 뿐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게다가 앞으로 그의 삶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 지친 영혼을 생각하며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페이예의 우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듯이, 당신도 울라고. 그리고 그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라고. 혼자 눈물을 삼키는 대신 격렬한 울음을 바깥으로 꺼이꺼이 토해내고, 침을 흘리고, 가슴을 치다가, 그 모습을 누군가에 꼭 들키라고. 우는 모습을 들켜야만 누군가 와서 등을 두드려줄 수도 있고 휴지를 건네줄 수도 있고 품에 안아줄 수도 있으니까.
토마스 쿡의 소설은 《붉은 낙엽》을 제일 처음 읽었는데, 그 책보다는 그 후에 읽은 《채텀 스쿨 어페어》가 더 좋았고, 또 그 책보다는 최근에 읽은 《밤의 기억들》이 더 좋았다. 대체 왜 이 책이 절판인지 알 수가 없다. 제발 개정판이 나왔으면... 나는 그간의 토마스 쿡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위험한 확신'을 가진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한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도 말할 수 있는 작가였다. 그의 책은 모조리 다 읽어봐야겠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위치한 사진을 올리고 싶었는데 못찾았다. 무슨 호텔이 산꼭대기에 있어.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 호텔이 아무리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고 해도 나로서는 찾아갈 리 만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냐, 돈이 많으면 저런것 조차 누려야 하는걸지도 몰라.
영화는 재미있었고 많이 웃었는데, 하하하하, 나오면서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부자 친구를 사귀자'는 것. 부자 친구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받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매니저를 보노라니, 제기랄, 내 친구들은 왜 다 가난해서 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거다. 그래서 이 영화를 같이 본 친구에게 극장을 나서면서 말했다.
"우리 이제 절교해. 넌 너무 가난해."
친구도 웃고 나도 웃었다.
조연인 건 알고 갔지만 그래도 '틸다 스윈튼'이 너무 짧게 나와서 놀랐고, 랄프 파인즈가 그런 웃긴 주연일 줄 몰라서 또 놀랐다. 여하튼 재미있는 영화였다.
일전에 그 뭐더라, 황정음 나왔던 게..하이킥. 하이킥에서 황정음이 닥터랑 갑작스레 키스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고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아서 그때를 생각하며 미쳤어 미쳤어 하고는 자기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는 장면이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쉽게 요약하자면, 분위기나 술에 취해 예정에도 없던 키스를 하고 다음날 자기 머리 쥐어뜯는 거랄까. 갑자기 왜 이 생각이 났냐면, 오늘 오전에 외근을 다녀오다가 길바닥에서 내가 내 머리를 쥐어 뜯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언제나 생각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나는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도 종종 내 머리 내가 쥐어 뜯는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오늘은 날도 좋은데, 썬글라스를 끼고 걷다가, 뜬금없이 계란말이를 함께 먹던 남자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해프닝이라도 해도 좋을텐데, 술을 마시면서 안주로 계란말이를 시켜두고 맛있다고 먹고 있다가, 얘기를 한참 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계란말이를 잘라 나에게 먹여준다고 입을 아- 벌리라고 한 것이다. 한 손으론 젓가락에 계란말이를 들고, 한 손으로는 그 손을 받치고 공손하게 들이밀었지만, 아, 나는 그걸 도무지 받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고 해도 그 앞에서 입벌리고 뭘 받아먹는 걸 정말이지 도저히 못하겠다. 내가 입에 넣어주는 건 그렇게까지 싫진 않지만, 누가 먹여주는 걸 받아먹는 건 끔찍하게 느껴진다. 상대의 눈 앞에서 입을 벌려야 한다니!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조차 사실 난 억지로 꾹 참는거다. 진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거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길을 걷다가 그때 생각이 퍼뜩 나면서, 아니 뭘 그렇게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나 싶었던거다. 굳이 그렇게 고집 부릴 이유가 뭐야, 상대방 무안하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던 거다. 난 쓸데없이 고집스럽고, 상대가 무안하든 말든 내 생각 먼저 하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같은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아마 나는 또 똑같이 할거야...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날 게 뭐람.
좀전에 팔당으로 자전거 타고 바람 쐬러 간 남동생이 예쁘게 벚꽃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메세지를 보냈다.
「시카고에핀벚꽃」by H
아놔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이런 또라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도 답장을 보냈다.
「개또라이」
암튼 녀석이 보내준 사진으로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꾸었다.
시카고에도 벚꽃은 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