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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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때 이른 죽음(1932~63)에 대한 세인의 피상적 관심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어릴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정신적 상처(실제로 그녀는 세번째 시도 끝에 자살에 성공한다)와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경도, 그녀의 <일기>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유한한 삶의 한계와 신화에의 매혹, 그런 논리적인 근거들보다, 남편의 외도가 자살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인 김혜순이 어느 글에서 지적하듯,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한 예술가가 남긴 깨끗하고 넓은 백지 위에다 자꾸만 무언가를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생의 시간들은 신화라는 덧칠로 괴팍해지고, 주인공도 없는데 나날이 길어지"는지도 모른다. (pp.191-192)



피카소의 작품론을 번역하기 위해 나는 2년에 걸쳐 여러 권의 참고문헌을 읽고 인쇄물로, 화면으로, 실제로 수많은 도판과 작품을 노려보아야 했다. (p.196)



'실비아 플라스'의 책 <침대 이야기>를 얘기하며 김남주는 '김혜순'의 글을 인용한다. 이 글에서뿐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역자후기'에는 꼭 다른이의 의견이나 표현이 인용되어 있다. 자신이 번역하는 책에 자신의 느낌만을 적는 게 아니라, 번역하게 될 저자와 책에 대해 쏟아지는 다른이의 관심까지도 다 챙겨본다는 뜻일테다. 기억에 의존해서 그것들을 인용하든 혹은 메모를 해놓고 인용하든,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김남주의 번역이 단순히 일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문학을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욕까지 들어간 막중한 책임감과 성의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카소의 작품론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또 어떠했나. 2년에 걸쳐 참고문헌을 읽고 작품을 챙겨보았다지 않는가. 그녀의 번역물에 대한 신뢰가 자라나는 지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번역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책들을 읽고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역자후기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완성된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말을 이 역자후기들을 읽어가며 떠올린다. 그러나,


이 역자후기가 에세이란 타이틀을 달고 책 한 권이 되어 나온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같은 생각을 가지게될 사람들 때문에 에세이 앞에 '번역' 이란 말을 붙여 '번역 에세이'란 타이틀로 약간 수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번역 에세이라면, 번역한 후에 본인이 가졌던 생각과 느낌을 말 그대로 '새로' 적어나가는 것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렇게 기존의 역자 후기를 가져오는 게 내게는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역자후기라면, 김선우의 소설에 정여울의 해설처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조현천이 해설을 썼던것처럼, 작품 자체의 이해를 돕는 데 크게 한 몫을 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책들에 대한 역자 후기는 그 책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책을 읽고 나서 읽는게 훨씬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토록 문장을 우아하게 쓰는 번역가라면, 문학을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며 거기에 대해 이토록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게다가 번역가 모임에서 그토록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자 후기'에 기대지 않아도 근사한 에세이 한 권쯤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나는 도무지 이 책의 간지, 총 다섯장에 이르는 간지의 역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이런 식이다.




저 주홍빛의 간지는..대체 왜 있는걸까? 분위기가 묘하니 예쁘긴 한데, 예쁘라고 있는걸까, 정녕? 그렇다면 나는 필요없다. 정말 필요없다. 이건 아마 사람의 성향탓이겠지만, 내가 가진 성향이란 실속 없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도 않으며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쪽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단순히 장식을 위한 아름다움에 가치를 둔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나는 그렇질 않다. 내 방에는 쓸모 없는 장식품이란 하나도 없다. 혹여라도 인형이나 또 뭐가 있을까, 여튼 예쁜 장식품들이 선물로 들어오면 나는 그걸 받는 족족 다른 사람들에게 줘버린다. 내 책장엔 책만 꽂혀있고, 간혹 와인이 세워져 있다. 너무 옆길로 샜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같은 성향을 가진 독자가 읽기에 이 책의 저 주홍빛 간지는, 정말이지 돈이 아깝다는거다.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대체 저게 저기 있는 이유가 뭘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걸까? 잠시 쉬어가라는걸까? 만약 그렇다면, 쉬어가는 것쯤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책의 끝에는 몇 장의 일상 사진이 실려있다. 그 사진들 중 하나에 특히 더 눈길이 갔다. '우아하다'는 단어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진을 보아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던 그런 사진.



앞에 놓인 LP 뒤로 보이는 책장, 그 책장속의 수많은 LP 들과 원서들. 어쩐지 나와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시간을 가질듯한, 내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우아함의 경지에 존재하는 듯한 사진이다. 


그 사진들 어느 밑에, 김남주는 이런 글을 써놨다. 



언젠가 나를 만든,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해 쓰고 싶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내 곁에 있어준 책 이상의 책들,

그중에는 루이 알튀세르, 에드먼드 윌슨, 마가렛 미드,

화이트 헤드, 자크 모노, 테리 이글턴, 김우창도 있다. (P.266)



이 문장들을 보며 나도 그녀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번역을 한 작품이 아니라 그녀가 읽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 그 편의 하나의 에세이가 되어 나오는 쪽이 내게는 더 애정이 생길 것 같다. 



몇번이나 이 책에는 오타가 등장해서 미간이 찡그려진다. 일일이 찾아내고 표기하거나 적어두진 않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두 개만 언급하자면 243쪽의 '실레'는 '실례'로 고쳐야 할 것이고, 244쪽의 '차근리'는 '차근히' 로 고쳐야 할 것이다. 차근리는 대체 어느 지방에 위치한 리란 말이냐.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잘 실행해오고 있다가 이 책에 있어서는 어기고 말았는데, 좋다는 말만 써줄 수 없어 유감이다. 역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지 않는 쪽이, 내 돈주고 내가 사는 쪽이 내게는 더 잘 맞는것 같다. 그게 내 마음이 더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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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02-07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이 첨 출간될 당시 트위터에 불이 나길래 호기심 쭉쭉 올라가다가 마침 도서관에 들어와 들춰보니 몇쪽 못읽고 빈수레구나...싶은 생각에 불쾌감을 느꼈어요. 내가 본 온통 호평들은 뭐였담?싶은 배신감도요ㅠㅠ

다락방 2014-02-07 11:19   좋아요 0 | URL
그동안 김남주 번역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그 때 만났던 번역이나 후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만 따로 모아놓은 책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더라고요. 새로운 글을 써주지,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답니다. 흐음.

그렇게혜윰 2014-02-08 01: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굳이 왜....이런 느낌이었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