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의 식구들은 가난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음식을 마련할 돈은 없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아주 극찬을 받을만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지만 그 때 이후로는 어떤 작품활동도 하고 있질 않고, 새엄마는 화가의 모델이 되어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카산드라의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는 그 직업을 계속 하고 있지 않다. 카산드라의 언니인 로즈는 할 줄 아는게 없고 카산드라와 동생 토마스는 너무 어리다. 그들은 집 안에 있는 돈 되는 가구들을 다 팔고 이제 더 이상 팔 가구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다. 이 가난은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카산드라 가족이 임대료를 내지 않은채 살고 있는 성에 미국 부자형제들이 방문했을 때, 언니 로즈는 기회로 삼는다. 형 '사이먼'의 재물을 보고 '반드시 그와 결혼하겠어' 라고 다짐을 하게 된 것. 그와 결혼을 하고나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고 식구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 로즈는, 기꺼이 돈을 보고 그에게 달려든다.
(돈벌이 하러 가는 이른 아침의 풍경)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이지만, 이렇게 책장에 쟁여두기 위해서는 돈벌이를 해야한다. 아니면 돈보고 남자랑 결혼하든가..)
돈을 보고 사이먼을 유혹하지만, 사실 사이먼이 딱히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사이먼에게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있었고,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던 것. 사이먼은 아름다운 로즈에게 첫 눈에 반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로즈에게 반한 사이먼이 키스하려던 순간, 로즈는 그에게 '수염을 깍고 와야만' 키스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이먼은 그녀의 말대로 수염을 깍고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당연히 로즈는,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동생 카산드라에게 수염을 깍은 사이먼이 정말 잘생겼다고 말한다.
"사이먼이 얼굴을 닦고 돌아서기까지 1분이 100년 같았어. 그 사람이 처량한 목소리로 '가장 흉한 꼴도 봤으니 뭘 숨기겠어요.' 라고 하더라. 화는 풀린 것 같았어. 대신 어딘지 자신 없고 측은한 표정이었는데, 너무나 잘생긴 거야! 지금 보니 사이먼 잘생기지 않았니, 카산드라?"
"응. 굉장히 잘생겼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내가 '멋져요, 사이먼, 당신이 천 배는 더 좋아졌어요.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다니 정말, 정말, 감사해요 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청혼했어." (p.280)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하고 '싶었다'. 이왕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그를 사랑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에게 수염을 깍으라 말하고 드러난 잘생긴 얼굴을 보며 감탄하고 키스를 한 뒤 그를 사랑하게 됐다고 동생 카산드라에게 말한다. 카산드라는 그래서 언니가 정말 사이먼을 사랑하게 된 줄 알았다. 사이먼의 동생 닐이 로즈는 형의 재산을 보고 결혼하기로 한거라며 끔찍하게 여길 때, 언니를 위해 변호해준다. 아니라고, 언니는 사이먼을 정말 사랑하는 게 맞다고. 그러나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남동생 토마스 조차도 로즈 누나는 사이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언니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거야?"
"음, 일단, 로즈 누나는 사이먼 형 얘기를 거의 안 하잖아. 해리네 누나도 사랑에 빠졌는데 그 누나는 입만 열었다 하면 자기 약혼자 얘기야. 해리와 내가 내기 걸고 세어보기까지 했다니까? 지난 주말에 내가 해리 집에서 지낼 때 세보니까 그 집 누나가 자기 약혼자 얘기를 쉰한 번이나 하던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언니는 과묵한 편이라서 그래."
"과묵? 로즈 누나가? 로즈 누나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쉴 새 없이 지껄이잖아. 로즈 누나가 나한테 보낸 편지에 사이먼 형 얘기가 단 한마디도 안 나온 거 알아?" (pp.378-379)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사랑했다. 언니와 결혼하게 될 남자를. 그리고 사이먼을 사랑했기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돈 때문에 결혼하려는 언니를 질책한다. 자신도 그 결혼이 이루어지게끔 도와줬지만, 사이먼을 사랑하게 되자 사이먼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내고 분노하고 질책하는 카산드라에게 로즈는 말한다.
"너, 사이먼을 좋아하는구나." (p.411)
가난히 지긋지긋한 로즈가 부자 남자를 잡아 결혼하려고 했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인생의 목표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였고, 눈 앞에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부자 남자를 택하는 거였다면, 그걸 거절하라고 하는 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장이다. 화려한 욕실을 갖고 싶었던 여자에게 화려한 욕실을 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면 그걸 잡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로즈도 카산드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을 알고나니 사랑하지 않는 게 역시 어떤 건지도 알게된다.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내 사이먼 생각뿐이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사랑도 사랑하지 않는것도, 숨겨지지가 않으니까. 이응준은 자신의 소설 <내 연애의 모든것>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모르고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남자가 하는 말인데, 오랜동안 한쪽이 사랑을 하고 있는데 상대가 모르고 있다면, 그건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게 맞을것이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보는 순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결론 지어야 할테니까.
로즈는 사이먼에게 수염을 깍으라고 했다. 수염을 깍은 사이먼을 보면서 잘생겼다고 환호한다. 그전보다 더 좋아할 수 있었다고. 나는 연애를 하게되면 상대에게 금방 싫증을 낸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의 장점을 계속 스스로 열거한다. 이렇게 해줄수 있는 남자는 이사람 뿐이야, 이 남자에겐 이런 장점이 있지 등등. 장점을 열거하게 되면 대체 이렇게 좋은 남자가 왜 나를 사랑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순간이 사랑이 사라진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장점을 열거하는,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됐던건 그의 장점들 때문이 아니었는데. 내 변덕은 이미 오락가락하다 이미 애정이 식었음을 확인한거고, 그걸 애써 부인하기 위해 장점을 찾아내려고 했던거다. 로즈는 사이먼이 잘생겼다고 환호했지만, 돈도 많은 사이먼이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고 좋은점을 하나 더 찾아냈지만, 그걸 찾아냈기 때문에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했다고 볼 수가 없는거다. 사랑은 그렇게 마음먹어서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사랑은 장점으로 구성되어진 것도 아니고 사랑은 장점으로 완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과 장점은 별개의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장점은 그저 장점일 뿐인 것이다.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사랑하게 됐다. 사이먼은 카산드라가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에 노트를 선물해주고, 카산드라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카산드라가 좋아할만한 음악을 골라서 들려주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즐긴다. 사이먼은 카산드라의 생일에 카산드라가 좋아할만한 선물을 해줄수 있는 사람이다.
"<쿠들의 노래>란 시를 썼던 체스터톤의 개 쿠들은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더라? 물, 돌, 이슬, 천둥 ‥‥‥."
"그리고 일요일 아침 냄새. 일요일 아침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어. 그걸 집어내다니 대단한 시인이야." 사이먼이 말했다. 아, 내가 아는 시를 함께 아는 사람과 있는 건 정말 가슴 훈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233)
시에 대해, 음악에 대해 함께 얘기하는 사이먼과 카산드라를 보노라면, 그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다. 보는 내가 이토록 만족스럽고 즐거운데.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의 형태를 잘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사랑은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첫눈에 반하'는 것이 반드시 '사랑'인 것은 아니라는거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말 그대로 반하는 것뿐,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함께 쌓이는 어떤것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가 결정짓게 될것이다. 사이먼은 카산드라와 있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다. 좋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로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로즈는 뭘 입어도, 어떻게 해도 아름다운 여자니까. 로즈와는 음악에 대한 얘기도 시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얘기를 나누는 카산드라와의 시간이 좋으면서도, 사이먼은 로즈를 사랑한다. 일전에 한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이 있는 곳에 자꾸만 나타나고, 자꾸 그녀의 손을 잡고 싶고, 그녀가 가는 곳에 자기도 가고 싶어했던 장면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채로 그러고 싶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랑은 다른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자꾸 부르고, 나를 자꾸 찾고, 내가 여기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내 상태를 묻는 것이, 그것이 나를 사랑한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알겠다고 돌아선 적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놈은 병신이라고 생각한다. 지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병신.
카산드라는 유머감각이 넘친다. 자신의 감정도 들여다볼 줄 안다. 음, 그렇지만 이 소설이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이라는 것은 '정말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카산드라가 사랑스러운건 사실이지만....'성 안의 카산드라' 라고해서 어둡고 우중충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머감각이 통통거리고 튀어나와 유쾌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기만 한줄 알았던 카산드라의 동생 '토마스'가 아주 현명한 독서 취향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말이야, 항상 모든 걸 다 이해해야 한다고 누가 그래? 이해하지 않고도 좋아할 수 있는 거야.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거라구." (p.435)
맞다. 이해해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해가 안되지만 좋아할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다. 이해하고 좋아하는 게 반드시 맞물러야만 되는 건 아니다. 이해는 이해대로, 좋은건 좋은것대로 그렇게 갈 수도 있는거다. 좋아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감정인것이다. 다른 것들과는 별개로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거다. 장점과 이해와는 별개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래서'와 '그럼에도불구하고'를 모두 품는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